학회 분위기야 나에겐 큰 차이는 없었어. 과학철학회는 무주리조트에서 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저번에 제주도에서 하고 이번에는 강원도에서 했는데, 무주에서 했을 때 운치도 있고 여유로웠던 것 같아. 이번엔 세션이 많아서 학회 자체가 크게 성장한 것처럼 보이고. 이정민 선생의 말처럼 발표 하나 하나에 담긴 메시지와 주장들이 의미가 깊고 수준이 높다고 했나, 아무튼 좋았던 것도 사실이야.
나는 과학철학회에서 논평을 몇 번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학회에서 발표는 세 번 한 것 같은데 첫째 둘째 셋째 모두 양자역학을 다루었어. 첫째는 2003년인데 나만의 양자역학 해석을 제안했어. 과학철학회엔 처음 참석하였고 과학철학회 데뷔 무대인 셈이야. 이 논문은 나중에 조금 수정해서 (학회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무려 6쪽이나 되는 답변을 첨가했어) 학술지에 발표되었는데 이 논문 감사의 말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이 논문의 초안은 2003년 6월 25일과 26일 무주리조트 국민호텔에서 열린 2003년 한국과학철학회 하계합숙세미나 「현대물리학과 철학의 만남」 분과에서 발표되었다. 고인석 선생은 과분한 격려와 함께, 논문의 질을 압도하는 논평을 해주셨다. 날카로우면서 해명적인 질문으로 이 논문의 진보를 가져다주신 고인석, 이상욱, 이영의, 이중원, 이한구, 최성호 선생과 그 외 저자의 현재 연구와 향후 연구에 호의적인 관심을 보여주신 김국태, 김유신, 정계섭 선생께 감사드린다. 여러 각주들과 부록을 통해 이들의 논평과 지적에 답변해 놓았다.
위에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은 거의 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고 나에게 질문한 사람들 중에서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을 감사의 말에 거의 다 적었던 것 같아. 논문 발표 하나로 고인석 이상욱 이영의 이중원 최성호 김유신 정계섭 김국태 이런 선생님들은 나를 과대평가하는 수준으로 늘 호의적으로 인정해주셨던 것 같아. 그 외에도 다른 과학철학회 학자들은 여기서 거의 모두 처음 만났는데 내가 학회에서 뻘줌하지 않게 된 계기가 되었어. (분석철학회도 비슷한 방법으로 그렇게 되었어.) 지방의 무명 서생에 불과한 내가 이들로부터 7년 동안 받은 호의와 관심은 (대학에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애쓴다든지 강의를 맡긴다든지 여성을 소개해준다든지) 세계 자체가 은총이라는 생각을 강화시켰어. 아니면 그들의 존재 그 자체가 사랑이자 은총인지도 모르겠다.
둘째 발표 때는 특색 없는 발표였던 것 같다. 드 브로이와 보옴의 양자역학 정식체계를 소개한 논문이었어. 나는 점차 드 브로이와 보옴의 포말리즘이 양자역학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물리학도들에게 이 포말리즘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국내에선 좀 편파적으로 거부되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냥 담담하게 소개하는 수준이었는데 별 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어. (해석이 아니라 포말리즘을 소개했으니까. 우리 양자역학 스터디에서 이 부분을 다루지 않지만 언젠가 이것도 공부했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좀 거창한 주장을 했는데 다른 학회에서는 가끔 거창한 주장을 하곤 했는데 과학철학회에서는 처음으로 거창하게 주장한 것 같다. 물론 첫째 발표도 행간에 거창한 것들이 있어. 결론은 이렇게 되어 있다:
내 해석은 전체적이고 비국소적인 물리량만이 물리적 실제 속성에 대응하는 존재량이며, 부분적 물리량은 전체적 물리량에 의해 상황적으로 규정되는 부수량이라고 가정한다. 이 가정을 수용할 때 우리가 얻게 되는 실재주의는 비국소적 상황적 실재주의이다. 실제로 사물의 속성이 그 사물의 다른 속성이나 다른 사물의 다른 속성과 독립되어 있지 않으며, 부분들의 성격과 본성이 전체의 속성에 의해 영향 받는다면, 세계는 더 이상 부분들의 집적체가 아니다. 부분은 세계의 한 측면에 불과하고, 그 측면들의 총합은 전체 세계와 동일하지 않다. 세계는 그런 측면들의 종합물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오히려 측면들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국소적 현상만을 감각하는 한, 그래서 전체 세계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의 세계 이해는 측면들에 관한 이해에 불과하며, 그 이해는 그만큼 불완전하고 불충실하다.
암튼 이 번 발표는 드러내 놓고 거창하게 주장했다는 점에서 나에게 의미 있는 발표회였다. 거창하게 말하는 것이 나의 자양분인 양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다. (내 주장이 너무 거창한 나머지 술자리에서 한 대학원생은 내 이야기를 '제로존이론'이라는 황당무계한 이론에 빗대기도 했다.) 내 발표는 내 미래의 자연철학 연구를 예고하고 압축한 것이다. [나는 자연의 원리를 석차 1년차 가을학기 기말 에세이에서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리고 내 심리철학과 언어철학과 생각철학 연구(사랑의 원리라고 언급한 부분)를 어떻게 자연철학과 연결할지를 넌지지 말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의 이 자연철학 연구 기획을 가장 잘 파악한 사람은 아마도 이정민 선생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민 선생은 지혜를 사랑하는 진짜 철학자라서 이런저런 투박함과 미숙함과 난잡함 속에서 거창하게 사소한 내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그를 만난 게 크나큰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짧지만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 이중원 선생과 이정민 선생과 나눈 10분 동안 나눈 대화와, 잠 들기 전 정민 선생과 나눈 30분 대화가 이번 학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적 대화였다. (하지만 아직 내 심리철학과 언어철학과 생각철학 연구의 뇌관을 발견한 사람은 아직 만나지 못한 것 같다. 철학 공부를 시작한 1997년 이후부터 계속된 이 연구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것은 내 발표에 대한 이야기이고 무엇보다 나에게 의미 있었던 것은 과학철학회에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가영 리나 주희 성경 보미 수민의 존재였다. (피곤해서 눈이 가물가물한 것 빼고) 친구들은 거기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지적 열정을 세계에 발산했고 다른 선생들도 이것을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정민 선생의 말처럼 너희들이 자랑스러웠다. "지금 이 감정은 뭐죠?" (이 문장의 기분을 모르는 사람은 에프엑스의 누예삐오를 들어보길 ㅋㅋ) 특히 간친회와 그 이후 자리에서 여러 선생들이 너희들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고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 거기에 다른 학교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많았지만 말야. (나는 간혹 대학원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무 선생도 그렇게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나라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ㅋㅋ)
친구들이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어. 나는 학술발표회에서 발표된 것은 아주 조금만 이해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게 많아. 친구들은 한두 개념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성적 변화가 생길 만큼 지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을 테니 뭔가 얻은 것이 많았을 거야.
학회를 마치고 동지천과 소양강(맞나) 주변을 걷고 쪼그려 앉거나 벤치에 앉아 이야기 나누었던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점심을 먹을 때 내가 좀 거칠게 말한 부분만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정민 선생의 의도와 생각을 내가 파악하는 데 게을렀던 것도 있고, 내가 하려는 일들, 내가 지금까지 했던 말들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게으름과 오해는 차차 풀면 되겠지. 그리고 나의 성깔, 특히 독선적인 성깔과 다른 사람을 과소평가하고 비하하는 우월감을 너무 많이 드러내었던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몇몇 친구들에게 그리고 이정민 선생에게 너무 함부로 대해 왔다는 것을 내가 자각했다는 사실이다. 나에겐 예의를 차리는 것과 친한 것 사이에 반비례가 성립하는데, 이런 식으로 행동할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하지만 이런 반비례가 좋지 않다는 것을 때때로 경험한다. 대인관계에서 내가 이 부분이 좀 서툴다. 고슴도치 딜레마 비슷한 것인데 가까이 가면 상처주기 쉽고, 상처를 덜 주기 위해 조금 더 멀어져야 한다. 이정민 선생은 상처 받지 않을 분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가까이 가는 데 주저함이 없었는데, 이 또한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친구들에게 이제 나의 이런 방식으로 계속 가까이 갈 수 없을지 모르겠다.
이정민 선생이 제3자적 관점에서 웃으며 "집요해"라고 말할 때 사실 뜨끔했는데 나에게 그런 유형의 집요함이 있다. 내가 매사에 진위를 판단하는 데 집요한 것은 아니지만 친한 사람일수록 문장 또는 판단의 진위 그리고 그 평가에 대해 좀 집요할 때가 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선배가 있는데 술자리에서 여배우들에 대한 취향들을 이야기할 때 그 선배가 "김정은이 TV에 나오면 꼴도 보기 싫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문제를 트집을 잡았는데 내가 김정은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김정은도 내 취향이 아니다.) 나는 그런 판단을 가지는 것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평가했고 그 선배는 정서적 취향에 대한 판단은 그런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것은 정서적 취향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사람 일반에 대한 판단이 반영되어 있고 그런 판단은 나쁘다고 주장했다. 나는 정말 집요할 정도로, 새벽 4시까지 이것으로 논쟁했다. 그 선배가 너무 놀라 나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했다. ㅋㅋ. 내가 그 선배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집요했으니 말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요즘엔 반성을 많이 한다. 내가 뭔가 진지하게 주장할 때 표정이 무섭게 변하잖아. ㅠㅠ)
이것과 상관 있는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 친구는 정말로 착한 친구인데 그 아버지는 정말 말썽이었다. 이 친구가 고생을 많이 했다. 반면 그 친구의 동생은 정말 문제아 비슷한 아들이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무덤에 들어가겠다며 난리를 피웠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리고 흙을 긁고 아버지의 죽음을 정말로 고통스럽게 슬퍼했다. 하지만 내 친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때 외쳤다. "임마, 울어!" 원래 하관식 때 "아이고 아이고"를 외치는 게 예의이고 특히 상주는 큰 슬픔을 드러내야 한다. 나는 "임마, 울어!"라는 말이 우스웠다. 조롱이 아니고 정말로 웃음이 나왔다.
내가 군대에 막 들어갔을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누나가 별세했다. 가족의 의미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가해자는 음주운전으로 중앙선을 침범하였는데 그는 보험도 들어 놓지 않았다. 그가 우리에게 지불한 것은 거의 없다. 책임 보험으로 받을 수 있는 돈도 고작 천만원 내외였다. 우리 집안은 살길이 막막했다. 돈을 버는 사람은 아버지와 누나였고 동생 둘은 대학생이고 나는 학교를 자퇴하고 아무에게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군대에 가버린 지 고작 한달이 되었다. 가진 집도, 가진 재산도, 심지어 전세금까지 없는 집안이었다. 거기에 남동생은 당시 사고로 눈 주위가 함몰되었고 어머니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거의 패닉 상태였다. [내가 제대 후 곧장 한 것이라고는 무책임하게도 철학을 공부한 것인데 이제 내가 가족을 벗어나도 괜찮을 정도로 가족이 안정을 찾았다.]
장례식장에 가해자 가족들이 찾아 왔는데 약간의 조의금을 가지고 왔다. 우리 친지들이 그 사람 앞에 그 돈을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다 필요 없고 죽은 사람 그대 살려 놓아라." 나는 이 말이 너무 우스워 속으로 웃었다. 그냥 조롱이 아니라 웃음이 나왔다. 친지의 그 말이 레토릭일까, 아니면 정말로 진지하게 그런 문장을 발화한 것일까? 그런 레토릭을 사용한다는 게, 그런 레토릭을 사용하게끔 의식이 작동한다는게 좀 재미 있었다.
나는 상주로서 그 가해자 가족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아무런 비난도 아무런 증오도 없었다. 그가 법정에서 높은 처벌을 받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친지들이 그 가해자 가족들을 박대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이후 가해자가 한 번도 우리를 방문한 적도 없고 어떤 사죄의 말이나 배상도 없었지만 나는 한번도 그에게 미움의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자. 그 가해자 가족이 자신이 가해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자기들이 사고 낸 것이 아니고 내 아버지가 과실을 한 것이라고. 이럴 경우 내가 어떻게 반응했을지 모르겠다. 나의 선천적인 집요함이 발동했을까? 진실을 알기 위해 집요하게 따졌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가해자가 정말로 내가 친한 사람이라면, 최소한 내가 계속 관계해야 할 사람이라면, 집요하게 따졌을 것 같다. 그것은 단순히 처벌과 보상 때문이 아니라, 발화에서 표현된 명제의 진위에 대한 집요함 때문일 것이다.
연애한 경험은 매우 적지만 사랑하려고 한 경험은 (사랑한 경험이 아니라) 좀 있다. 한 사람에게 내가 몇 년 동안, 그와 함께 한 거의 모든 시간동안 가장 집요하게 물었던 것은 "그때 그런 행동이 나를 사랑한 행동이었냐"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집요해서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짜 잔인하다." 이 답변이 그 물음에 대한 Yes일까 NO일까, 먼저 생각했지 그 물음 앞에서 그가 얼마나 고통스워울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할수록 그에게 미안하다. 부디 나의 집요함을 용서해.
부록1: 내가 석사 1년차일 때 쓴 에세이 중 "제3절. 자연학"
자연학이란 이것이다.
P: 오직 하나의 자연이 있다.
자연학은 P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P는 자연학의 가설이 아니다. 가설은 검증의 법정에 서야 하지만 P는 그럴 필요가 없다. P는 전제가 아니라 자연학을 여는 원리이다. 자연학은 P에 의해 열린 어떤 학이다. P는 자연학의 자리를 만든다. P는 자연학을 시작하게 하고 창출한다. P가 어떻게 자연학을 창출하는지를 보기 위해 P를 다르게 표현해 보자.
P*: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보이는 오직 하나의 자연이 있다.
이 말은 사람의 그 어떤 상태과 사정에 의해서도 변형되지 않은 오직 하나의 자연에 대한 서술이 있음을 뜻한다. 자연에 대한 그 하나의 서술을 자연학이라고 하자. 자연에 대한 절대적인 그 하나의 서술을 서술하는 자를 자연학자라고 하자. 그러면 원리 P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P**: 자연학자에 대해 상대적이지 않은 절대적인 하나의 자연학이 있다.
위에서 등장한 <자연학자>는 물리학에선 주로 <실험장치>로 표현되기도 한다. 물리학의 역사에서 P**는 다음의 세 조건으로 표현된다. 이 세 조건들은 공간의 동질성homogeneity, 공간의 등방성isotropy, 시간의 동질성 등으로 각각 불려진다.
> 자연학은 자연학자가 자연을 보는 위치에 상대적이지 않다.
> 자연학은 자연학자가 자연을 보는 방향에 상대적이지 않다.
> 자연학은 자연학자가 자연을 보는 시간에 상대적이지 않다.
여기서 물리학에서 자연학자가 자연을 보는 위치와 방향, 시간은 물리학자 또는 실험장치의 좌표계coordinate system로 표현된다. 이제 자연학자가 할 일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i) 실재로 그런 자연학을 찾는다. (ii) 그 자연학이 원리 P를 만족하는지 검증한다. 따라서 만일 자연학자가 그가 찾은 자연학이 만일 P를 만족시키면 그 자연학은 과연 자연학이 된다. 자연학자는 위의 (i)과 (ii) 단계를 수행하기 위해 소위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 (i)를 위해 반성적 평형, 선험적 반성, 아니면 콰인의 그 <자극으로부터> 구성된 과학 등이 필요하다. (ii)를 위해 <관찰>, <실험> 등이 수행된다.
만일 P를 만족하는 두 개의 자연학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다음 중 하나의 결론을 얻을 것이다. (a) P를 만족하는 두 자연학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따라서 둘은 확정적으로 서로 번역된다. 예를 들어 뉴턴의 역학과 라그랑지 역학. (b) 둘 중에 하나는 틀렸다. 다시 말해 둘 중에 하나는 P를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뉴턴의 역학과 양자역학. (c) 더 많은 실험에도 불구하고 두 자연학이 P를 만족하면서, 번역되지 않는다면, 즉 같지 않다면 그 둘은 더 큰 하나의 자연학에 포함된다. 다시 말해 둘을 동시에 포함하는 더 큰 자연학이 존재한다. 더 큰 자연학을 찾기 위해서는 번역되지 않는 두 자연학을 잇는 다른 자연학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그리고 아직 나타나지 않은, 대통일이론Grand Unified Theory.
뉴턴이 최초의 물리학자라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이다. 그는 지금까지 간략하게 설명한 그 <자연학>을 찾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의 운동에 관한 세 개의 법칙 중 제1법칙을 아주 쉽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N: 자연의 모든 일부, 즉 물체는 가만 두면 가만 있다.
여기서 <가만 둔다>는 것은 영향 또는 힘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오직 그 물체만 홀로 둔다는 것이다. <가만 있다>는 것은 정지해 있거나, 속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제2법칙을 쉽게 표현하면 <모든 물체는 가만 두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는다>이다. 위의 N은 물론 <관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진술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뉴턴은 이것이 물리학의 첫 법칙임을 알아차렸다. N은 그 어떤 물리학자에게 동일하게 관찰될 수 있는 사실이다. 뉴턴은 N을 관찰의 결과로, 다시 말해 케플러의 방식으로 N을 법칙이라 하지 않았다. 이것은 흄이 묘사한 것과는 전혀 다른 식의 법칙이다. 뉴턴는 N은 <제1법칙>이라고 불렀다. 그가 N을 <제1법칙>이라고 불렀을 때 물리학은 시작되었다.
뉴턴의 세 개의 운동법칙은 20세기 초의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출현하기 전까지 유일한 물리학이었다. 뉴턴 물리학 또는 고전역학은 정확히 말해 그의 N을 포함하여 세 개의 운동법칙이 저 위의 P를 만족하는 자연학임을 고집하는 이론체계이다. 쿤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하나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분명히 쿤이 말하는 그런 패러다임은 아니다. 뉴턴의 물리학은 그의 세 개의 법칙이 모든 물리학자에게 동일한 의미를 산출하게 하려는 개념체계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뉴턴의 물리학은 절대적인 그 자연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틀린 물리학이었다. 비록 그가 틀렸다 하더라도 저 원리 P는 여전히 유지된다.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자연학을 찾았다.
E: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빛은 속도가 모든 물리학자에게 동일하게 관측된다는 E의 사실을 그의 상대성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로써 뉴턴의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에 의해 대체된다. 물론 E는 실험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관찰>이 아니다. 이것은 저 원리 P를 만족하는 자연학이다! 아인슈타인은, E가 바로 그 자연학이이기 때문에, 이것이 모든 물리학자에게 동일한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 공간, 시간, 동시성 등의 개념을 수정해야 했다. 그의 이런 활동은 분명히 <자극으로부터> 부추겨진 것이 아니다. <자극>은 그토록 완고한 <동시성> 개념을 수정하게 할 수 없다.
나에게 나의 딸국질과 나의 방귀가 동시에 일어났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사건은 동시에 발생된 것으로 관측될 것이다. 동시성에 관한 수많은 <경험>들은 완고한 경험이다. 그러나 이 동시성 개념은 틀렸다! 한 사람에게 동시적인 사건은 다른 사람에게 동시적인 사건이 아닐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그때까지 확고했던 시공간, 동시성 개념을 수정하게 한 것은 저 원리 P 때문이었다. 그가 E를 단순한 <관찰자료>로 간주했다면 그는 상대성이론을 발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학은 <자극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저 P에 의해 열린다. 자연학이 과연 이런 것이라면, 자연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 말고 어떤 무엇을 알 수는 없는가? <인식론>이란 과연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19971126
부록2: 인간적인 학문을 위한 정초 일부
[[위 글은 아마도 기말 에세이의 초안 같다. 아래 첨부 파일은 1998년 10월에 제출되었지만 거절된 논문 일부. 제목은 "인간적인 학문을 위한 정초"라는 엄청나게 거창한 제목인데 자연의 원리와 함께 사랑의 원리를 제안한 최초 원고이다.]]
부록3: 인간적인 학문을 위한 정초 예비심사 발표문 결론
[[앞 논문 노트에 언급된, 예비심사회의에서 발표한 발표문의 결론 부분. 이게 논문이냐, 라는 비난을 들었던 글. 하지만 내가 철학을 계속하게 된 붉은 열정 같은 것.]]
글을 맺어야 할 때가 왔으니 내가 살아있는 날 동안 묻고 또한 지금 여기서 현재-세계적 삶을 살기 위해 답하고 싶은 것을 말해야 하겠다. 사람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어떤 것인가? 나는 물리적인 속성과 심적인 속성을 동시에 가진다. 나는 같은 자리, 같은 때에 물리적 상태와 심적인 상태를 가진다. 나의 몸에서 육체적인 사건과 정신적인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 사건이란 어원상 ‘출현하는 것’ 또는 ‘나는 것’, ‘생기는 것’인데, 자연의 원리를 따르며 세계에 의해 생기는 것은 물리적 사건이다. 사랑의 원리를 따르면서 지적인 존재에게 생기는 것은 심적 사건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사랑의 원리와 자연의 원리 아래서 의미를 가지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사랑과 세계 사이에서 생기는 존재이다. 세계와 사랑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세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무가 아니라 몸을 가진다. 사랑은 사람이 세계 속에 거주하면서 여전히 사람다움을 유지하게 한다. 이때 세계는 사랑이 작동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해 준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나는 아는 존재가 된다. 사랑 때문에 나는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른 말할 수 있다. 나의 감각기관이 고장 나도 나는 여전히 해석가능하다. 애니 설리번은 사랑의 힘으로 헬렌 켈러를 해석할 수 있었다. 유전자나 생존가치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바로 사랑과 자연의 협력 아래서 우리는 인간적이고 공적인 언어를 창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성상 해석가능하고 사람의 믿음은 참말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본성상 해석가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일 타인에게 해석되지 못한다면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고 해석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루돌프 아이히만이 정말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곳 땅 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예컨대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대로 우리는 아직-아닌-존재들 또는 아직-아닌-의식들인지 모른다.
사랑이 없다면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해프닝에 불과하다. 다다 그룹에 속해 있었던 마르셀 뒤샹은 사람들이 자기의 그림을 볼 때 어떤 불결함을 느끼도록 자극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선동했다. 뒤샹은 '해프닝스'라는 이름의 전람회에서 거대한 그러나 텅빈 액자를 설치했다. 이때 관객들은 우연히 그 액자의 인물이 된다. 이쪽 사람은 저쪽 사람을, 저쪽 사람은 이쪽 사람을 액자의 주인공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액자에 담긴 내용의 주제는 우연 그 자체이다. 암스테르담의 프로보스 투사들은 자신의 무정부주의 시위를 ‘해프닝스’라고 불렀다. 피에르 쉐페르에 의해 전개된 ‘뮈지크 콩크레테’의 연주들에서 인간의 언어는 우연히 발생되는 뒤틀린 소리로 재현된다.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순하디순한 여성이 그 자리에서 죽어 썩어가는 모습을 보는듯 할 것이다. 베르히만은 그의 영화 <침묵>에서 사람들의 인생을 재현하기 위해 외설적 장면들을 단편적으로 짜집어 놓았다. 존 오스본은 <마르틴 루터>라는 연극에서 역사의 우연성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 준다. 그 연극은 “자네는 자네가 옳다고 생각하는가?”라는 한 수도원장의 물음에 대해 “그렇게 되기를 바랍시다”라는 루터의 대답으로 끝난다. 헬리 밀러는 지금 이곳의 개별적인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범우주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새롭게 부상할 것이기 때문에, 개인상호간의 진리, 개인적인 의미는 무의미하며 그래서 개인적인 섹스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말 것을 제언한다.
진정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해프닝스로 가득할 것이고 사막 같은 곳이 된다. 우리는 절망 자체에서, 비극 자체에서, 무 자체에서, 우연성 자체에서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가? 오직 사막뿐이라면 과연 우리는 땅에 충실할 수 있는가? 사막뿐인데 어떻게 우리가 신앙의 비약을 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우연인데 어떻게 우리가 어떤 최후의 경험 소위 실존적 경험을 기다릴 수 있는가? 절망뿐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무엇 무엇을 하려는 행위에 의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가? 정말 사막뿐이라면 존재하는 어떤 언어 또는 시를 지시하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는 앨더스 헉슬리처럼 마약을, 아니면 티머시 레어리처럼 LSD를 제일차적 경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로 인정해야 하는가?
예수는 자기의 살을 찢고 피 흘리게 하는 이들을 자기들이 정녕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붉디붉은 피를 쏟았던 것은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해석되지 못했으며 그래서 자기를 알지 못하는, 진리가 없는 동료 인간들의 비극을 체현하기 위해서였다. 사막 같은 땅에, 다시 말해 오직 물질밖에 없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서 말이다. 때가 늦기 전에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타인들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녕 모를 것이고 나 또한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한 인간이 될 것이므로. 그래서 언젠가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 진리가 무엇이뇨?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선이 무엇이뇨? 우리가 대화하는 것입니다. 미가 무엇이뇨? 이렇게 마주보는 얼굴입니다. 19981025.

TwoPrinciplesForTrueScience.pdf

2010/07/03 14:37
2010/07/04 01:47
학회에 초대해주셔서 참 감사했습니다. (꾸벅) 발표도 있으신데다 저희들까지 챙겨주시느라 힘이 많이 드셨을것같아요. 그래도 이와 같은 기회가 생기면 또 저희들을 초대해주셔요. 분석철학회, 논리학회 *.* 머릿속에 콕콕 입력해두었답니다. 철학이라면 뭐든 좋아요.
자유예술캠프 강좌에 무려 20분정도나 지각을 했지만 다슬기 친구들과 함께 해서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 . ^ ^ ; ; ; ; ; ; ; ; ;
참, 여쭐 타이밍을 놓쳐버렸는데 이정민선생님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궁금해요. 알려주세용~용용
그리고 선생님의 성깔에 대한 염려는 놓으셔도 돼요. 허울 없이 저희를 친근하게 대해주시는 데에 기쁨을 느껴요. 저도 예의를 차리는 것과 친한 것 사이에 반비례가 성립하는데 ㅋㅋ 제가 간혹(혹은 종종?) 예의에 어긋나는 게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ㅠ.ㅠ 쓸데없는 가식을 걷어내는 게 곧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게 마련인걸요.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황에따라 타인에게 내세우는 나의 가면은 각기 다르기에, 저희에게 가까이 오시는 데 방식을 달리하지 않으셔도...ㅠ.ㅠ
2010/07/04 14:35
2010/07/04 02:18
선생님! 이번 발표 내용도 플로어에서나 다른 선생님들로부터 받은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 포함해서 학술지에 게재하실 건가요? ㅇ.ㅇ
저기 부록2에있는 '저주받은'논문의 전문이 궁금해요*.*
2010/07/04 14:35
2010/07/04 03:15
우리 모두가 세계를 동일하게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까닭이 뭔지, 자연학이 무언지는 김명석 선생님의 1998년 논문 본문에 쓰여있겠죠? 몹시 궁금하지만 전 솔직히 서론과 결론의 몇 페이지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 조금 나중으로 미뤄봅니다.
2010/07/04 03:17
오픈 아이디를 사용하는 게 이름/비밀번호로 글쓰는 것과 뭐가 다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이메일 주소를 남길게요. einsundeins@nate.com 입니다.
2010/07/12 21:00
2010/07/04 14:12
2010/07/04 14:37
2010/07/07 19:22
또 학회가 뭔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좀 더 인간적이고 드라마틱했었던 것 같아요. 전 뭔가 냉철한 지식인들의 전문적인 대토론장! 이런 걸 생각했는데 ㅋㅋ 자신을 잘 알아주지 못하는 평가(?)비판(?)에 대해서 눈물을 글썽이던 어떤 분의 모습이나 논문 코멘트 할때 수위높은 비판을 얼굴을 마주보고 서슴없이 하는 모습등등 ,여러가지로 다 신기했었어요.그리고 발표자분들이 개성이 참 강하시더라구요. 뭔가 대화를 나눠보지 못했지만 보는 것만으로 성격이나 아우라같은 것이 느껴져서 즐거웠어요.
내용은.. 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첫번째 색션, 참여적 비판에서는 솔직히 아직도 참여적 비판의 뜻이 뭔지(;;) 감이 안와요ㅋㅋㅋ
두번째 색션, 사회과학 부분에서는 이렇게 수리적인 사회과학을 접한 건 처음이라 살짝 당황했어요. 경제학에서는 진짜 이렇게 수학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분석하는구나~ 근데 뭔가 이상하다. 과연 사람의 행동을 수리적으로 계산하고 더 나아가 예측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실 몇몇은 경제사회학 시간에 살짝 배운 것 같은데 어려웠습니다..
세번째 색션에서는, 대상없는 표상(?)강의에서는 논문모음집을 받지 못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하나도 알아듣지를 못했어요.ㅠㅠ 두번째 한 박사과정에 있는 학생의 강의는 인상적이었어요. 제일 나이가 어려보여서 왜인지 동질감도 느끼면서 그나마 제일 잘 알아들었어요 ㅋㅋ 이 사람은 물리주의자들을 비판하기 위해 그들의 논리적 결함을 들춰내고 있구나! 이런 느낌. 세번째 강의는 너무 빨리 넘어가서 솔직히 이해를 잘 못했어요. 뭔가 제가 제일 흥미있어할 내용인 것 같았는데 그 후이어지는 수위높은 코멘트에도 엄청 놀랐구요!
여러모로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특히 막국수랑 춘천닭갈비가 +_+ 정말 맛있었어요. 클라라 샘의 발표를 놓친게 아쉽지만 ㅠ_ㅠ.. 담에 기회가 되면 꼭 선생님의 발표를.. 더나아가 이정민 선생님의 발표도 볼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2010/07/08 01:05
그나저나 '인간적인 학문을 위한 정초'대단하신데요. 더 나아가서 학문 분야 하나 만드셔도 되겠어요.아닌가요?
왜 논문 심사에서 거부 당했지?? 파격적이라서 그런가?
사실 제 지성적 수준에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드네요. 공을 들여서 꼼꼼히 읽어봐야겠어요.
선생님은 석사때나 지금이나 항상 진보적이시고 시대를 앞서가시는 것 같아요 ㅎㅎ 재능이 빛나고 진심이 느껴지는 논문이라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선생님의 의지,뜻,세상에 대한 사랑,진심같은 게 느껴져요.선생님이 조금 더 연구에 몰두하실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을텐데-
2010/07/12 20:59
bbomting@naver.com 입니다.
2010/08/05 2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