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석 선생님, 그리고 여러분 잘 지내세요? 세 주 동안 못 뵈었는데 참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네요. 오늘이 모임 있는 목요일인데 잘 하셨겠지요? 포스트가 한 동안 안 올라와 소식이 궁금하네요.
제가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곳은 네델란드 브레다라는 작은 도시의 호텔방입니다. 제 발표는 어제 무사히 마쳤고 오늘은 좀 편안한 마음으로 방에 돌아와 그 동안의 성과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학회는 내일 끝나고 헤이그에서 하루 머물고 모래 돌아갈 예정입니다.
4년전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처음 외국에 나온 셈인데 그때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을 새로 느끼게 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더 성숙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장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완벽한 개인이었던 반면 지금은 제게도 작게나마 어떤 사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을 가리치는 것도 분명히 그 중의 하나겠지만 강의도 영어고 밥벌이인 만큼 얼마나 충심으로 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에 비해 다슬기 모임은 여러 모로 제게는 소중하고 애착을 느끼게 됩니다.
우선 살아가는 방식인지 몰라도 저는 우리말로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생업에 바쁘며 가족과는 떨어져 있습니다. 김명석 선생님도 대전에 있을 때는 자주 뵙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임이, 때론 거의 일방적인 제 얘기가 되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죄송하게 생각) 그래도 제가 가장 편한 우리말로 이야기하고 그걸 들어 주는 여러분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고마워집니다.
사실 국내 학계에서 우리말로만 학문 활동을 해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많은 대학이 영어 강의를 강화하고 국제학술지 논문 게재를 학자의 학문적 역량을 재는 척도로 삼고 있습니다. 분명 지난 며칠 간은, 제가 사숙한 분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들으며 좁은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또한 제가 좋아하는 그림들과 보낸 시간을 잊을 수 없고, 특히 렘브란트 "에케 호모"는 지금 상상해도 눈물이 글썽여집니다. 그러나 때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나 느끼한 음식을 접하고 나는 지나가는 여행객일 뿐 결코 여기 속하지 않는다는 자의식이 들 때마다 고국의 친구와 가족, 그리고 여러분 생각이 스쳐가는 것은 왜일까요?
여행도 그렇습니다. 사실 세상을 많이 둘러보지 못했다면 외국이 새롭고 설렐 수도 있겠지만 정작 우리 나라는 여행해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여행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우리 나라가 정말 그러한 여행지가 아닐까요? 어려서부터 동경한 학문과 예술, 그리고 모든 근대 문물이 유럽을 발상지로 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전통과 관습의 무게가 현시대를 짖누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는, 물론 조선 시대가 많은 문화적 유산을 남겼지만 일단 얼마나 "잘 죽어버린" 문명인지 감사하게 생각할 따름입니다.
짧은 시간이어서 깊이 있는 관찰을 할 수는 없었지만 사회적 유대감이나 활기, 변화의 속도, 문물 조직에서 이미 우리 나라는 유럽 이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나 민주주의의 발달로 선진국을 얘기한다면 우리가 세계 제일의 선진국입니다. 물론 여기에도 많은 병폐가 있고 또한 한국 안에만 있으면 그러한 측면이 부각되어 우리 사회가 못살 사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할 것은, 좋건 나쁘건 지금 여러분이 사는 사회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 자본주의, 민주주의 등의 혜택을 누리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선진국을 운운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누구의 모델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필요하면 우리 안에서 창조하면 될 뿐입니다.
다만 그런 사회에서 아직까지 학문과 예술은 유럽이 몇 세기 전에 이룬 수준에 조금 못 미치는 것 같다는 우려는 있습니다. 네델란드는 작은 나라이지만 17세기 황금 시기에 렘브란트와 스피노자, 호이겐스를 낸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세계사적 개인이 우리 사회에 아직 없다는 것은 단지 우연일까요, 아니면 그러한 천재나 개성의 발현을 억누르는 어떤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유럽이나 미국이 이러한 이러한 일을 하기에는 이제 낡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수세기 안에 동아시아, 특히 우리 나라에서 그런 인물들이 줄지어 나온다고 생각하면 그러한 사회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제 자신에 대한 확신이 듭니다. 한때 상상했던 것과 달리 저는 결코 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우리 사회, 우리 말, 우리 나라 사람들보다 좋은 것은 없다는 자부심을 갖기 바랍니다.
춘래불사춘이라고 4월에도 많이 추운 모양이네요. 중간 고사로 많이 바쁘겠지만 다음 주에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케런 앤의 Not Going Anywhere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people come and go and walk away
but I'm not going anywhere.....
I won't go anywhere so give my love to everyone


2010/04/17 13:32
글을 읽으면서 좀 불공평하다는 느낌을 받는군요. ㅋㅋ. 정민 샘은 글로벌하게 살면서 조선 사람이 되어 가지만, 나는 늘 로컬하게 살면서 조선 사람이 된다는 것이 뭔지 모르겠으니 말입니다. 정민 샘은 연고를 찾아가는 중이고 나는 연고를 잃어가는 중이니까요. ㅋㅋ
테일러인가 어떤 공동체주의 정치철학자는 연고에 의해 우리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연고를 잃어가면서 살았어요. 태어난 곳, 출신학교, 친구들 등. 그래서 내 정체성은 연고 없는 정체성이며, 그런 점에서 시대적 공간적 떠돌이 세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식으로 어쩌면 나는 조선 사람이 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무튼 반은 농담이고 .... 정민의 글이 오늘 토요일은 풍요롭게 하는군요. 빨리 다녀오세요.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2010/04/21 21:48
2010/04/25 01:12
노래대로 정말 not going anywhere가 됐네요 ㅠㅠ/
네덜란드는 비행기 경유하느라 땅만 잠시 밟고 다시 떠났던 경험이 있는데,네덜란드에서 좋은 그림들도 많이 보시고 부러워요.킬러들의 도시라는 영화의 배경으로 나왔던 걸로 알고있는데(어,,아닌가 덴마크인가?!) 그 때 영화에서 보고 정말 아름다운 동화같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전 항상 여행을 동경해요. 사실 어느 곳도 서울이라는 공간과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이 더 좋은 곳이라는 걸 여행을 해보면 늘 깨닫지만, 그래도 항상 더 다른 좋은 곳 이색적인 새로운 곳을 꿈꾸게 되네요. 네덜란드 사람들에게는 서울이 더 새롭고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환상의 공간일 수 있을텐데 ㅋㅋ 시험을 많이 봐서 시험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고싶은지도 모르겠네요. 선생님 글을 읽으니 정말 풍요로워지네요. 무사히 돌아오세요 선생님:D
2010/04/22 00:25
다슬기 모임은 저희에게도 자칫 건조해질 수 있는 학교 생활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서로 만나고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이에요. 저희에게 의미있는 공동체이기도 하구요. 아무래도 아는 것들이 없고 견해가 부족해서 말을 아끼다보니 저도 말이 많이 트이진 않았지만 쌤 말씀은 늘 재밌게 경청하고 있지요, 뭣보다 다슬기가 쌤께도 소중한 공간이 된다니 감사해요. ㅎㅎ
노래가 따뜻해요.. 저도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느끼곤 했지만 사실은 쭉 아무데도 가지 않고 제자리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사고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주에 뵈요 ^^,
2010/04/25 13:45
그래도 잘 지내시고 계신것 같아 다행이네요ㅋ
저는 저번주 내내 시험공부하느라 일주일을 보냈어요.
저는 어려서부터 우리나라 여행은 많이 해봤는데..여름휴가마다 가족끼리 유적지를 찾아 다녔거든요...외국을 아직 한번도 안가봐서 그런지 외국은 동경의 장소에요. 어디든지. 색다른 언어, 생각, 풍습을 소유한 곳에 가면 나는 어떤 나로 존재할까 하는 고민을 요즘 하고있어요. 그래서 아예 휴학해버리고 외국에서 살아볼까하는 상상도 하구요..ㅋㅋ
하여간 담주는 샘 다슬기에 오시죠?
저번주에 다슬기 못가서 넘 슬퍼요..이번주 목요일에는 시험도 끝났으니 다른 분들도 많이 오시겠네요. 기대되요, 다가오주 다슬기 모임. 그때 뵈요^^
2010/08/12 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