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샘과 한글낱말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말 70%가 한자말? 일제가 왜곡한 거라네"는 주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는 낱말에 대해서만 한정되어 있는데요. 문제는 철학적 용어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서양철학의 용어들은 그리스어에서 대부분이 왔습니다. 그리스어 낱말을 라틴어로 고치거나 영어로 고치고, 일본학자들이 다시 한자어로 고치고 그래서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철학적 개념들이 일본학자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철학적 사유를 하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최근 정민 샘은 그리스어 연구를 하고 있어요. 아마 철학을 더 근본적으로(래디컬하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요? ㅋㅋ. 정민 샘의 의견이 듣고 싶군요.
저는 개인적으로 기존에 있는 한글 낱말을 사용하거나 새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이런 겁니다. 철학적으로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 나는 이것을 그냥 "말"이라고 해도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을 "마음"이라고 해도 상관 없고요. 하지만 철학에서 이런 단어들은 엄청나게 긴 개념적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정민 샘의 견해는 일상적 우리말을 사용할 경우 아마 이런 역사를 간과하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그리스어로서 로고스를 이해하는 것과 "말"에 대한 철학적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약간 다른 차원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로고스는 라틴어 라티오로 번역되는데, 이건 영어에서 rational이라는 형태로 변해 "이성적"으로 한자로 번역합니다. 우리말로 이성을 뭐하고 하면 좋을까요? 한편 그리스어 누스가 있는데 이것도 한자어로 "이성" 또는 "정신"으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그리스어 푸시케(psychology에서 앞쪽의 어원에 해당하는 것)와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암튼 개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우리가 그냥 "말"이라고 하면 이것과 "이성", "이유" 등과 연결이 사라진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개념은 그 나름의 역사와 계보가 있는데 우리말을 사용할 경우 철학적 추억을 잃을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말이 철학적 사유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정민 선생이 이런 의견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견해는 가능한 많이 우리말 낱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케이아"를 "완전태"라고 번역합니다. "완전태"가 그렇게 어려운 말은 아닙니다만, 저는 완전태 대신에 그냥 '엔텔레케이아"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이니까.... 이것의 말뜻은 én[in]+télos[end, or purpose]+échein[to have]인데 "제 안에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있는"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군요. 저는 이에 상응하는 우리낱말을 찾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vitale pricipium(생명원리, 생기)로 쓰든, elan vital(베르그송의 용어, 생의 충동, 생동)으로 쓰는 것은 이런 노력의 다른 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로 생각하는 것은 철학적 성찰에 도움을 줄까 방해가 될까? 이것이 정민 샘과 언젠가 다룬 문제였습니다. 저는 최근 가능한 한 우리말을 많이 사용하는 철학교과서를 써볼까 생각 중입니다. 제가 공부했던 것 중에서 radical interpre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radical을 학계에서는 "원초적"이라고 합니다. 저는 농담반으로 "맨땅에"라고 합니다. ㅋㅋ


2009/09/12 13:56
이성(理性)이란 한자어 표현을 처음 쓴 이는 주자(1130-1200)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성이라고 말하지 않고 성즉리(性卽理)란 표현을 중용장구 서문에 썼습니다. 인간 본성이 도덕과 자연 세계를 아우르는 원리와 같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 바탕에는 도덕의 뿌리가 있습니다. 맹자의 논적인 고자가 말하는 식색(食色)과 같은 무차별적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이를 다스리는 벼리를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근대에 와서 일인들이 reason을 이성으로 번역했을 때는 이런 뜻보다 물론 서구어에 있는 일차적 의미, 수학이나 과학을 할 수 있는 인간 능력, 그리고 '이치'에 맞게(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마음에 두었겠지요. 여기서 신유학 전통과의 단절이 발생합니다. 곧 우리가 말하는 이성은 글자는 같지만 주자가 말하는 성, 리와 별 관계가 없습니다. 현대 일본어나 한국어에서 사람들이 '이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의미를 떠올릴지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현대어에서 이성은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지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런데 개념의 뿌리를 이렇게 따져 가는 일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깁니다. 곧 logos, nous, ratio, reason와 같은 개념과 주자의 성, 리 개념을 아우르는, 아니면 이 둘과도 전혀 다른, 새로운 철학 개념을 우리말로 하나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의 경우에는 이것이 매우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모두가 쓰고 있고 더 좋은 말이 수 세기 안에 나올 법하지 않습니다. 어짜피 영어의 reason도 프랑스어의 raison을 베껴서 몇 세기 동안 잘 써먹고 있지 않나요? (OED에 따르면 1225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말이라고 합니다. OED = Oxford English Dictionary)
오히려 제가 우리 말에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말은 '헤아림'입니다. 이 말은 '숫자를 세다'라는 뜻(원래 프랑스에 raisoner에 이런 뜻이 있습니다)과 함께 보통 '추론하다'(영어의 reasoning)의 뜻이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헤아림'은 아직 매우 약한 말입니다. 누가 '헤아림'에 문화적 권위를 부여할 만큼 이 말을 써서 어떤 철학적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할 생각을 못하고 있는 이유가 큽니다).
아무튼 문제는 우리말을 쓰고 말고와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넓게 인식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점에서 이정우 선생님의 [개념-뿌리들 1, 2권]과 같은 책이 선구적 작업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철학을 떠나서 우리말 사전 만드는 철없는 국어학자들을 위해 한 마디 하자면 문헌과 출전 없는 어떠한 사전도 거짓입니다. 물론 이두나 향찰로 옛 우리말을 아주 조금은 재구성해 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영어에 대해 "Old English"[Anglo-Saxon]어 밖에 되지 않습니다.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는 우리말 대신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한국어 corpus를 놓고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서 최초의 용례와 그 연도를 발굴해 가자는 겁니다. (위의 'reason'-1225년처럼)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이 그나마 현대 20세기 용례(주로 소설)를 보여주는데 사실 신문학 전체가 별게 없기 때문에 그러한 용례들이 그 말에 대한 모범 용례인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별게 없어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어짜피 그것 빼면 남는 게 없기 때문에 ...
아무튼 OED와 같은 작업 없이는 한국어 사전이 수백 개 나와도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한국어 OED를 만들어 놓으면 거기서 나올 수 있는 사전은 무궁무진합니다. 실제로 OED 이후 거의 모든 현대 영어 사전은 OED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2009/09/17 01:01
문제는 우리에게는 그런 용례 문헌들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매우 슬픈 일이죠. 지금부터 그런 용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헤아림"은 아주 좋은 말 같아요. 원래 logos도 counting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고... 아마도 logos의 내포를 결정하는 핵심적 의미라고 생각해요. "계산적 합리성"이라는 그런 맥락과도 잘 어울리고, "이해", "해석" 등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쓰는 "이성"은 한자의 원래 뜻에 따라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용례의 복합에 의해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철학자들도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독일어 등의 번역어로서 "이성"을 이해하고 있어요.
세계는 비율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세계가 논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세계는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은 해석 가능하다 등의 철학적 논제들과 어울리는 우리말 낱말을 계속 사용하고 찾아내는 작업은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세계를 헤아릴 수 있을까? 세계는 헤아릴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을 거야. 어떤 구조일까? 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말과 생각을 헤아릴 수 있을까? 말과 생각은 헤아릴 수 있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을 거야. 어떤 구조일까? "헤아림'은 괜찮은 단어 같아요. 이런 용례는 성경 번역에서 종종 나와요. 네가 신을 헤아릴 수 있느냐? 세계를 헤아릴 수 있는냐? 등 같은 표현.
그러고 정민 샘이 사용한 "철없는"는 너무 지나친 표현 같은데요. 과격한 표현. ㅋㅋ. 10년 전부터 남영신이라는 사람이 용례 사전을 만들기도 했어요.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그런데 "철 없다"고 말하기전에 한글로 쓴 철학적 텍스트가 있기나 한가요? 누구는 류영모나 함석헌 글을 철학적 텍스트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15세기에서 19세기의 한글 철학 텍스트가 없다는 게 아쉬워요. 제가 느낀 문제는 20세기에도 그런 텍스트가 없고,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21세기에도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일본사람이 메이지유신 전후에 만든 단어들을 계속 사용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는 친족어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철학을 언어적으로 토착화했다고 생각해요. 한편에서 쯔빙글리, 루터, 깔벵 같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다른 한편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 근대철학자들에 의해. 가령 독일어의 Vorstellung는 근대철학자들의 "idea"를 독일어로 토착화한 사례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한글말은? 실학자들이 왜 한글 저술을 남기지 않았을까? 오늘 우리 철학자들은 한글말 낱말 용례를 얼마나 축적하고 있을까? 이런 문제 의식을 갖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