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석 선생님이 언급하신 사건은 이 페이지 맨아래 Q&A란에 제가 '암울한 사회 소식'이라고 에두른 일입니다. 혹시라도 모르시는 분이 검색해 볼까 직접 언급하기를 꺼릴 만큼 끔찍한 범죄였습니다. 사건의 경과와 거기서 드러나는 의도의 악랄함은, 아마도 범인이 아이를 도끼로 살해했다 해도 마찬가지 충격을 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상상화가 말한 사건도 별다르지 않겠지만 범인은 아무런 개전의 정이 없었습니다. 몇 년, 몇십 년의 형량이 문제가 아니라 이 생애에서, 아니 아마도 그의 영혼을 영원히 가두어 둔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많은 이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모두가 더 강한 처벌을 원했고, 일부는 범죄만큼이나 끔찍한 처벌을 원색적 언어로 그리기도 했습니다.
제게 물어본다면 저 또한 더한 처벌 쪽에 무게를 두었을 것입니다. 이런 제도는 정비해야 하고 문제는 은폐하기보다 공론화시켜 지속적인 논의의 토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위 사건을 취재해 처음 알린 기자에 따르면 더 비참한 사건이 많은데도 피해자들이 꺼려 보도를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의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는 다릅니다. 어떤 완전한 법 제도 아래 모든 악행을 적절한 처벌로 다스려도 정의의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아니 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건드려지지도 않습니다. '미드'를 보면 아시겠지만 사회 모든 영역에서 그러한 제도를 철저히 구비한 미국이란 나라에서 정의가 실현되기는커녕, 가장 참혹한 범죄를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은 반성할 만합니다. 처벌이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더한 제도는, 더한 처벌은 더한 교묘함, 더한 악랄함만을 낳을 뿐입니다. 처벌이 되지 않는 한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는 지옥을 상상해 보셨는지요? 공자는 말합니다. 정치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려 한다면 백성은 빠져나가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이 점에서 철학은 법이나 사회과학과 다릅니다. 윤리나 도덕은 어떤 의미에서 법이나 처벌 밖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벌되지 않는 거대한 악행이 있는가 하면, 처벌되어도 정당한 선행이 있습니다. 사회과학을 전공한다면 이러한 생각이 낯설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철학자가 바라보는 관점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당하고만 있으란 말이냐'라고 오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당한다'라는 표현을 문제삼지 않더라도 이러한 반론은 '당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처벌이나 보복밖에 없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짜라두짜처럼 생각하려면 '호탕'하기보다 좀 더 지혜롭고 냉정해야 합니다. 상상화의 다음 말을 살펴봅시다.
피해자는 정신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자살시도를 수없이 했다고 하는데 왜 가해자는 4년제 대학도 다니고 취업도 하고 전과기록도 없고 반성도 안하고 아무 일 없이 잘 살고 있을까요? 약자-피해자 박수진 양(가명)은 사회하위계층으로 보임-들은 왜 저렇게 당하고만 살아야할까요?
여기서 제 마음에 걸리는 표현은 '잘 산다'입니다. 과연 그들이 잘 사는 걸까요? 잘 사는 것,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얼마 전에 우리 사회에 유행한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건강 적당히 챙겨가며 취미나 여가 적당히 즐기는 삶을 가리키는 말 같은데, 씁쓸한 것은 바로 이런 말에 우리 사회에 흔한 '잘 삶'의 기준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어로 '잘 산다'는 말에 유 젠(eu zen)이 있습니다. 분명 그리스 시대에도 통용되던 잘 삶의 기준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의 논적인 소피스트 칼리클레스는 원하는 만큼 쾌락을 추구해도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는 독재자와 같은 삶을 제시합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잘 산다는 것은 영혼이 잘 산다는 것이며 가장 잘 사는 삶, 가장 행복한 삶은 영혼에 아무런 사악함이 없는 삶이라고 합니다. 만일 영혼에 죄가 있다면 이를 치유하는 벌을 받는 것이 다음으로 좋은 것이며, 영혼에 죄를 짓고도 아무런 치유(=벌)을 받지 않는 삶이 가장 나쁜 삶입니다. 이는 선행에 대한 보상과 악행에 대한 처벌을 얘기하는 권선징악과도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는 잘 사는 삶에 대한 기준의 전면적인 변화를 뜻합니다. 이러한 기준에 비춰 보면, 가해자들이야말로 가장 나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더 나쁜 일은 그런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나쁜 삶을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기분이 어떤지,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별 관련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가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죽은 삶, 그것은 살지 않는 삶과 같습니다. 내가 바로 내 영혼이기 때문입니다(우리 게시판 '나는 어디에 있니' 참고). 제가 항상 수수께끼처럼 생각했던 성서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e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Galatians 2:20)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내 몸이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삶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영혼이 몸을 보살피기 위한 종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그 자체를 보살피는 삶, 그 마음을 잃지 않는 삶은 맹자가 안타까워한 것이기도 합니다.
슬프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그것들을 찾을 줄을 알면서 마음을 잃어버리면 찾을 줄을 모른다(哀哉! 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而不知求).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 '마음'에 안 들면 성형으로 고칠 줄은 알면서 정작 그 마음의 흉함은 보지 못하지 않습니까?
반면 피해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피해자의 영혼이 순수한 한에 있어서는 저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고통받는다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는 그를 둘러 싼 주변과 우리 사회에 영혼의 삶에 대해서 무지한 탓이 큽니다. 부디 수진 양의 영혼이 이를 이겨낼 수 있기를.
그리고 이 모든 논의가 관념론이고 현실은 다르다는 반론에 대해서는 오히려 진정한 현실은 바로 이러한 영혼으로 이루어진 세계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철학에서 영혼과 인식 밖에 또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우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현명해지고 만일 당하더라도 긍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긍정하는 것, 그리고 자기 영혼의 순수함, 그것이 가장 좋은 삶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러한 문제는 우리 모임에서 앞으로도 계속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영혼을 돌보라 - 상상화에 답해
2009/10/24 16:37http://thinkinglab.kr/t/tl2010/trackback/17
- 짜라두짜처럼 호탕하려면 어느 정도 수련을 해야할까요? 다슬기: 다함께 슬기롭게 2009/10/25 21:17 Delete


2009/10/27 06:00
물론 저도 처벌이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은 수업에 통계자료까지 동원해 배웠건만 이 사실을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한 생각에까지는 연결시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러면 이정민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피해자는 당해도 선한 존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을 삼으며 게속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이 건 너무 억울하다!'라고 오해를 했었습니다.
이제 이정민 선생님의 생각이 어느정도 이해 되었습니다. 처벌되든 되지 않든 정당한 정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처벌과 정의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찌보면 정말로 당연한 사실인데 이제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선과 악의 문제, 정의의 문제는 참으로 어렵군요.. 사실 이제까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부분이에요. 특히 영혼으로 이루어진 현실세계, 벌이 치유 라는 구절은 제겐 굉장히 생소합니다.단순한 제게 잘 산다는 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마음 편하게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부분을 많이 고민하면서 살아야겠어요. 수업시간에 이와 관련된 논의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답변 감사합니다!
2010/08/12 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