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곧 소크라테스는 독미나리 즙을 먹고 죽어야 한다. 배움 동무들이 스승의 죽음을 가엽게 여기고 슬피 운다. 그는 오히려 살아있는 내내 죽음을 마련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그의 온 삶은 깨닫는 것을 좋아하는 삶이었다. 철학자라는 말뜻은 앎, 슬기,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는 늘 철학자로 산 셈이다. “깨달음을 올바르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죽어감과 죽음을 스스로 닦달해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죽음을 닦달한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살아있는 내내 죽음을 뜨겁게 바라면서 오랫동안 스스로 닦달하던 것이 막상 자기에게 닥쳐왔을 때 성을 낸다는 것은 진짜로 엉뚱한 짓이야.”
깨달음을 좋아하는 것과 죽음을 기다리고 좇는 것은 무슨 맺음이 있을까?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왜 죽어가는 것과 죽음을 스스로 닦달해야 하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몸의 즐거움을 좇는 것과 깨달음을 좋아하는 것은 함께 갈 수 없다고 믿었다. “자네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과 같은 것으로 느끼는 즐거움에 안달하는 것이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을 것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의 몸과 얽힘으로써 얻는 즐거움에 안달하는 것은? 그 밖에 몸의 다른 보살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자네는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돋보이는 옷과 신발을 가지거나 그 밖에 반지 귀걸이 노리개 따위를 가지고 있다는 데 퍽 우쭐해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것들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것을 높이 살까 아니면 업신여길까?”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넋을 보살피기 위해, 몸이 즐거워하는 것을 좇는 일에 휘둘리지 않도록 넋을 몸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게 할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이란 넋이 몸에서 빠져나가 사람에게 넋이 없어지는 것이다. 죽음이란 넋이 몸에서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쩌면 죽어가는 것을 늘 닦달해야 한다. 그래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몸의 즐거움도 없고 이런 것에 전혀 골똘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몸의 즐거움에 아무 마음도 쓰지 않는 이들을 거의 죽음에 가까이 와 있다고 여길 거야.”
그러면 왜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넋을 보살피고 되도록 넋을 몸에서 떼어 놓으려 해야 할까? 왜 소크라테스는 깨닫는 데 몸이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몸으로 느끼는 것은 언제나 흐릿하고 어렴풋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으로는 참된 앎에 도무지 이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짜 깨달음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넋이, 우리의 마음이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또렷하게 알고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과 귀와 살갗으로 얻은 몸의 느낌은 틀릴 수 있으니, 느낌은 되도록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는 있는 것들은 오직 마음으로만 헤아려 생각해야 한다. 마음으로만 헤아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느낌을 따르지 않고, 말뜻과 말길에 따라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말뜻은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 본모습인데 흔히 “이데아”라 부르는 것이다. 말길은 말과 생각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길인데 흔히 “로고스”라 부르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있는 그대로의 착함, 있는 그대로의 참됨을 아는 것이다. 몸은 이런 것들을 알 수 없다. 어렴풋하게 아니면 비뚤어지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살갗은 있는 그대로의 그것들을 볼 수 없다. 몸을 쓰지 않고 오로지 생각만으로 그것들에 다가갈 때만, 때 묻지 않은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착함과 참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참말로 깨닫고 싶은 사람은 넋을 몸에서 멀리 떼 놓으려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깨달음을 좇는 것과 죽어가는 것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몸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의 넋, 우리의 마음은 그토록 흠 많은 몸과 범벅이 된 채 죽는 날까지 함께 해야 한다. 몸은 먹을거리가 없으면 안 되니까 이 때문에 우리는 먹을거리를 찾아서 바삐 살아야 한다. 또 몸이 아프면 몸을 돌보느라 우리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을 겨를이 없다. “몸은 꼴림, 안달, 두려움, 허깨비, 어리석음으로 우리 속을 가득 채워 놓아 도무지 아무런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 버려. 몸으로 말미암은 것 때문에 우리는 깨달음을 좋아할 겨를이 언제나 없어. 이보다 더 고약한 것은 어쩌다 우리가 몸을 보살피지 않아도 되어 짬을 얻어 뭔가를 따져 보려고 하면, 몸이 이곳저곳에 끼어들어 우리를 들뜨게 하고 엉클어 놓고 얼빠지게 만들지. 그래서 몸 때문에 우리는 참된 것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아.”
진짜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넋은 몸에서 떨어져 나와야 하는데, 우리가 아무리 힘을 써도 억지로는 넋을 몸에서 떨어지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 있는 내내 넋을 감싸고 있는 몸이 넋을 늘 성가시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깨달음을 참말로 애타게 바라는 사람은 진짜로 죽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깨달음을 뜨겁게 바라고 또한 좋아하는 사람인데 바로 이 깨달음은 우리가 죽게 되었을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 것이 되지 살아 있는 동안엔 아닌 것 같아.” 그렇다고 스스로 죽을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죽는 것은 자기를 아끼는 이에게 할 짓이 못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나라에서 나서서 죽게 만들어 준다니 그는 이를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여겼다. 이제 진짜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배움 동무들은 마음이 개운치 않다. 넋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남게 되면 넋은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죽으면 몸과 함께 넋도 마치 숨과 김과 바람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넋이 제 홀로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들은 왠지 스승의 죽음이 억울하고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독미나리 즙을 마시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진다. 소크라테스는 벗들의 마음을 달래고 보듬어 안아야 한다. 몸이 죽은 뒤에도 넋은 한결같이 살아 있다는 것을 벗들이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그는 넋이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 있다고 믿는 까닭을 배움 동무들에게 풀어 놓는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태어나기에 앞서서 우리 넋이 살아 있었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뭔가를 배울 수도 알 수도 없다. 그것이 참된지 거짓된지, 그것들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아무 것도 따질 수 없는 사람은 배울 수도 알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먹을 수도 없는 이는 아예 배울 수조차 없다. 그런데 사람은 참된 뭔가를 배우고 가끔 알 수도 있다. 이것은 사람이 처음부터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말귀와 말뜻과 말길을 알고 태어난다. 이것들은 배움과 앎의 씨앗이다. 배움과 앎이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보았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뭔가를 보려면,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살아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태어나기 전에도 살아 있었던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태어나기 전에 살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몸을 뺀 나머지, 바로 우리의 넋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살아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의 넋이 말뜻과 말길을 품고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 셈이다. 말뜻과 말길은 참된 말과 거짓된 말은 가려내는 힘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배우기 전에 이런 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면 배움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이 말은 들은 배움 동무들은 아직도 걱정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스승의 말은 넋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있었다는 말이지 죽은 다음에도 줄곧 살아있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입던 옷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지만, 이것으로부터 그 옷이 언제까지라도 닳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는 믿음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더구나 넋이 몸과 따로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몹시 어렵다. 이를 걱정하며 한 배움 동무가 말한다. “우리 몸은 뜨거움과 차가움, 메마름과 젖음 따위의 것들로 팽팽하게 서로 얽혀 있는데, 우리의 넋이란 바로 이런 것들의 섞임과 어울림이라고 생각해요. 넋이라는 것이 이 따위의 어울림이라면, 우리 몸이 아프거나 다른 나쁜 것들 때문에 축 늘어지거나 너무 당겨지면 우리의 넋도 바로 깨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넋이란 몸에 있는 여러 것들의 어울림이어서 사람이 죽으면 맨 먼저 사라지는 게 넋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뭐라고 대꾸해야 할까요?” 그는 넋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스승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스승은 “배움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꺼내는 것이고 넋이 이미 보았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라는 믿음과 “넋은 몸의 이런 저런 것들의 섞임과 어울림이다”라는 믿음 가운데서 무엇이 더 참에 가까울 것 같은지 묻는다. 올바른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처음 믿음이 되도록 참에 가까워야 한다고 말한다. 참에 더 가까운 믿음으로부터 믿기 어려운 믿음으로 조금씩 나아가야 하지, 믿기 어려운 믿음에서 참된 믿음을 이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다음 소크라테스는 넋을 한낱 몸속의 어울림으로 볼 수 없는 까닭을 말한다. 몸에 있는 것들의 어울림이 깨어질 때 이것을 고치려 하는 것은 넋이다. 넋은 우리 몸이 아프거나 슬프거나 들떠 있을 때 이를 다시 낫게 하고 감싸고 가라앉힌다. 넋이 몸의 어울림이라면, 어울림이 깨어졌을 때 넋은 이를 다시 고치고 바로 잡는 일을 할 수 없다. 넋은 몸에서 일어난 것들을 다스리며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한낱 그것들의 어울림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벗들에게 우리를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잘 몰라서 잘못 내린 벌을 피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서 죽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이것을 피하지 않게 한 것은 자신의 힘줄과 뼈들이 아니다. 죽으려고 여기에 갇혀 있고 도망가지 않는 것은 몸이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시킨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옳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넋이자 그의 마음이다. 그의 넋이 말길을 따라 옳은 것을 좇을 때 그 옳은 생각에 이를 수 있고 바로 이 생각이 그의 몸을 거슬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소크라테스답게 살게 한 것이다. 나무를 나무답게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무이다. 플라톤은 이를 나무의 이데아라 불렀다.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넋이란 바로 삶의 이데아이다. 이런 저런 꼴로 살아 움직이는 소크라테스를 소크라테스답게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소크라테스이다. 그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넋이다.
넋이란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게 만드는 무엇이다. 넋은 몸을 이루는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모으고 고르고 어울리게 해서 마침내 몸에게 삶을 부어준다. 몸은 오직 넋과 단단히 붙어 있을 때만 살아 있다. 그래서 넋이 몸과 떨어질 때 진짜로 죽는 것은 오직 몸뿐이다. 넋은 삶을 만들어내는 무엇이기 때문에 이것은 죽음과 어울릴 수가 없다. 이런 뜻에서 넋은 언제나 살아 있다. 소크라테스는 말뜻과 말길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그가 독으로 몸이 굳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다른 무엇보다 돌보고 보살피고 아끼고 다듬어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넋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넋을 더럽히지 않기를 바랐다. 이렇게 하여 소크라테스의 벗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알게 된 사람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슬기롭고 가장 올바른 사람이 이 땅을 떠나가는 모습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고 참으면서 지켜보았다. 아름답고 착하고 참된 그의 넋과 얼은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 한결같이 살아 숨쉬고 있다.


2010/02/25 17:17
2010/02/26 11:13
저의 글은 고대철학 연구자로서 쓴 것이 아니라 심리철학 연구자로서 쓴 글입니다. 스크라테스-플라톤의 심리철학을 요약 또는 해설한 짧은 글입니다. 이것은 제가 그의 이론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넋이 불멸하는지 좀 더 면밀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인식 능력이 사회적으로 주어진다"는 가정을 받아들일 때, 플라톤의 이론이 여전히 유효할까, 질문하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은 좀 더 분석이 필요한 말입니다. 사회는 이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플라톤은 사람들 속에 불멸하는 영혼이 들어 있다고 말하겠죠.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은, 이미 존재하는 영혼들에 의해 주어진다, 또는 만들어진다고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생기기 위해서 다른 영혼들을 필요로 합니다.
역시 지적했다시피 개별 영혼이 불멸하는가, 아니면 영혼 일반이 불멸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나아가는군요. 영혼이 복수인지 단수인지 하는 문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하나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영혼이 단수이고, 다른 개별 영혼은 단지 그 하나의 영혼의 부분이라고 해석할 경우, 플라톤은 여전히 그 하나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식 능력이 사회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말이죠.
플라톤은 심리철학을 개척한 인물로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론을 보다 다듬습니다. 그리고 근대철학으로 와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에 가면 이론적 복잡성이 심화됩니다.
이 논의들이 현대에서 한편에서는 현상학에서, 다른 한편에서 분석철학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탐구됩니다. 현대적 논의와 플라톤의 논의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면, 플라톤이 단순하게 보이고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2500년 전 이야기 방식과 오늘날 이야기 방식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500년 전에 플라톤이 가졌던 배경 이론을 우리가 모두 아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훨씬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이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레게 같은 플라톤주의자들이 현대 언어철학과 심리철학에 기여한 바는 매우 강력합니다. 영혼 불멸에 관한 그의 논의는 바로 이데아에 대한 그의 확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플라톤 심리철학의 가치는 마음과 물질 사이 근본적인 존재론적 간격 최소한 개념적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간격이 있기에 사람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고, 그리고 인식론과 윤리학과 미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