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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지각, 2011, X-RAY필름에 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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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지각_부분1, 2011, X-RAY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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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지각_부분2, 2011, X-RAY필름에 펜






  연구자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작은 것들의 모습맺음바뀜에 대해 연구한다. 단백질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는 단백질을 전기적 성질에 의해 크기별로 분리한다. 그리고 어떤 보이지 않는 작은 단백질이 있음을 확인하고 그것의 위치를 보이기 위해 항체를 사용하여 단백질의 모습을 X-RAY 필름에 현상한다. (western blotting)

  <상상의 지각_부분1>에 보이는 필름은 단백질의 모습과 위치가 깔끔하게 나오지 않아 버려진 필름 중 하나이다. 이처럼 연구자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단백질의 있음과 위치에 대한 깔끔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실험과 연구들은 과학에서 한알과 세계의 잔주름을 펼쳐 지각하는 방식(공식)이자 약속이다.

  나는 번지고 얼룩진 단백질의 모습이 그 자체로써 선명한 모습과는 다른 정도의 속힘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지각했다) 그리고 그것의 속힘을 물리적인 방식으로 분석해내는 연구자와 다르게 시각적인 상상력으로 바라보고 그려보았다. 나는 내 상상의 지각이 가지는 힘, 엔텔레키가 작품으로 표현되어 다른 사람에게 지각되기를 바라면서 시행착오를 겪는다. 이 노력의 공식이나 약속은 무엇일까? 한알이 내부의 능동적인 힘을 가지고 많은 모습들과 맺음을 가지듯 작품도 내부에 시각적으로 능동적인 힘과 모습, 맺음들을 가진다. 또 작품에 대한 지각에는 여러 주름이 잡혀있어서 어떤 주름은 펼쳐지고 어떤 주름은 그대로 남아있다.

  라이프니츠는 한알을 지각되는 어떤 것으로 설명하면서 사람의 마음, 짐승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과 짐승은 을 가지며, 사물이나 세계 전체는 넋은 아니지만 넋보다 조금 덜떨어진 온힘(엔텔레키)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는 작품의 엔텔레키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다가 처음의 상상력, 생각과 느낌과 시각적인 모습들이 순서 없이 뒤섞인 처음의 상상력이 작품의 엔텔레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품이 작품이 되는 과정은 상상으로,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지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했다. 이 과정은 위에 비교했듯 과학의 과정과 다르다. (미술의 상상의 지각이라면 과학은 이성의 지각이다) 결국 한알의 주름을 펼치는 방식, 지각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한알이 하나의 실체, 밑바탕이라고 하더라도 지각되는 밑바탕은 각기 다른 것이다. 과학과 미술이 모습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진정한 한알, 밑바탕이 아닌 겉모습, 속성을 다루는 것 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밑바탕과 겉모습의 구분을 거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밑바탕이든 겉모습이든 과학과 미술은 세계를 지각하고 있다.

  과학이 객관적인 소통을, 미술이 보다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소통을 목표로 삼듯 어떤 지각이든 공감되고 소통되어야 한다. 한알의 주름이 너무 여러 겹이라서 서로 다른 주름을 펼쳐놓고 서로 자신의 지각이 맞는 지각이라고 말하게 되는 외로운 상황이 더 많지는 않을까? 라이프니츠가 한알을 통해 바라보고 지각하는 세계는 소통되는 한알들의 세계일지 궁금하다.

2011/07/11 12:56 2011/07/11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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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드문] 라이프니츠 읽기: 7월 11일 오후 5시 생각실험실 Thinking Lab. 2011/07/11 16:40 Delete
  1. 큐리아
    2011/07/18 12:08
    Western blotting이라, 과학실험기법인지 작품제작기법인지 분간이 안되는 멋진 이름인데. 언니는 x-ray에 현상한 걸 이용했으니 radioactive detection으로 분석하는 걸 택한건가. (진짜 실험실에서 버려진 거 주워온거야? ㅋㅋ)
    지루함에 숨이 막힐 것 같았던 고등학교 화학시간, 주희가 교재에 나온 분자 모형에 뭘 끼적거리더니 체조선수들로 만들어버린 기억이 난다. ㅋㄷ
    그럼 질문들!
    1. 밑바탕과 겉모습의 구분을 거부하는게 낫다고 했는데 과학과 미술이 지각하는 겉모습은 분명 다르잖아. 언니는 밑바탕도 지각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언니의 밑과 겉에 대한 다른 글에서도 밑바탕을 작품을 가능하게 했던 생각, 느낌, 지각이라고 했는데 밑바탕을 지각이나 겉모습과 구분하지 않을 경우 원래 라이프니츠가 의도했던 개념이 모호해지는 것 아닐까? 나에겐 과학과 미술이 같은 밑바탕을 대상으로 하되 다른 겉모습을 지각한다고 말하는 게 더 명료하게 들려서.
    2. 과학은 이성의 지각인 반면 미술은 상상의 지각이라 한 점이 재미있는데. 이성과 상상은 어떻게 다를까? 마지막에 지적한 것처럼 과학은 객관적인 소통을 목표로 삼으며 과학자들 사이에 약속된 지각방식이 확고한데(적어도 저 x-ray에 현상된 단백질에 대한 해석 방식은.), 상상의 지각은 사람들마다 제각기 다르잖아. 어쨌든 미술도 소통을 목표로 삼는다면 상상의 지각이 가지는 약속이나 공식이 있을텐데 그게 뭘까? (그러고보니 언니가 질문한 거군.) 조화, 균형, 선의 율동감 같은 것들? 까만 얼룩에 불과한 버려진 필름을 가지고 산과 도로를 표현하려고 한 엉뚱함 또는 참신함? 사실 난 과학실험을 하면서 한 번도 저런 상상을 해 본적이 없어서 언니의 창작의도가 잘 이해된다기보단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와. ㅋㅋ 어쨌든, 언니는 작품의 소통을 주름이 펼쳐지는 것에 비유했는데 '외로운 상황'이 수많은 겹들이 접혀있는데 펼쳐지지 않은 것 뿐이라면 작품을 이해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듯. 접힌 주름들은 어떤 계기에 의해 펼쳐질 수 있을까?
    • 노소영
      2011/08/05 13:09
      1. 라이프니츠는 한알이 밑바탕, 영혼적 실체 자체라고 하잖아. 내가 궁금해하는 건 밑바탕(실체, 본질, 영혼?)이 겉모습(속성, 특히 물질적 속성)을 가졌을 때(한알의 더미일 때만 겉모습을 가지지) 다른 한알들과 얼마나 소통될 수 있는지야. 그 답은 이 글 쓴 담에 배운 부분에서 예정조화만이 유일한 의사소통이라는 답이 있었고. 암튼 너 말대로 하자면 과학과 미술이 세계, 물질적 대상을 바라볼 때 겉모습, 속성만을 지각하고 소통하는 거라는 말이 되는데... 난 그걸 거부하고 싶은거야. 과학이 이성을, 미술이 상상을 가지고 물질을 다루면서 실험하고 작업하는 데에는 분명 실체에 대한 목적이 있을거라구~ 그리고 라이프니츠의 말로도 나오지만 속성이 실체로부터 떨어져서 둥둥 떠다니는 것은 아니니까 너 말대로 속성만 지각하고 소통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밑바탕, 실체가 숨어있겠지 라는 생각... 그래서 밑바탕과 겉모습의 구분을 안하는게 낫겠다고 한겨
    • 노소영
      2011/08/05 13:17
      아 그리고 1. 과학과 미술이 같은 밑바탕을 대상으로 하되 다른 겉모습을 지각한다고 말하는 것도 맞는데 거기에서 밑바탕과 겉모습이라는 단어를 나누는 기준이 뭘까 그게 궁금했던거고 그 기준이 내가볼 땐 좀 애매해
      그래서 그냥 밑바탕과 겉모습 구분 안하고 지각에 임하는 태도나 방법? 에 집중해서 쓰다보니 과학은 이성으로 지각하고 미술은 상상으로 지각한다는 이분법이...ㅋㅋㅋㅋㅋㅋㅋㅋ 다시보니 이 글 진짜 별로다..ㅋㅋㅋㅋㅋ
    • 노소영
      2011/08/05 13:19
      2번 질문은 별로 라이프니츠랑 상관 없이 과학과 미술에 대한 문제니까..ㅋㅋㅋ 글고 넘 복잡해서... 휴 내가 왜 과학 미술 이성 상상 어쩌구하면서 거대한 개념들을 관념적으로 썼는지..ㅉㅉ
      그냥 둘다 이성이고 상상이고 나눌 거 없이 그런 능력을 다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한알이 열심히 완전성에 이르려고 하는 노력이다 라고 생각하면 될거같아~~ 글고 소통은 되고 있잖아ㅋㅋㅋ 과학과 미술은 친하다고...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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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각은, 그것이 긍정적 생각이든 회의적 생각이든, 내부에 관한 생각이든 외부에 관한 생각이든, 객관적 진리 개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개념은 오직 타자와 의사소통 중에 있는 피조물들만 접근할 수 있다. 앎의 획득은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에 기초해 있지 않다. 앎의 획득은 전체론적으로 생기며, 그것은 처음부터 상호인간적이다. 데이빗슨의 <외부주의 인식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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