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앎'을 위한 몸부림 1

토대주의자들의 야심찬 시도는 하고..

대체 우리가 뭘 알 수 있기는 한 거야??

주의사항: 논리학의 타당성, 건전함, 연역의 개념을 알지 못한다면 일부분은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토대주의 : 사이비 앎말고 진짜 앎을 위하여 자명한 내용을 담은 토대에 논리학의 튼튼한 뼈대 버무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앎의 체계를 건설하자.

자명한 논제는 그 자체로 참이라 이를 입증하기 위한 증거를 다른 곳에서 찾지 않아도 되는 명제이다. 즉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입증하는 명증한 논제가 자명한 논제이다. 자명한 논제의 예로는 항진명제(반드시 참말)가 있다. 어떤 곳에서, 어떤 때에도, 어떤 상황에도 반드시 참인 명제가 항진 명제이다. '지구는 둥글거나 둥글지 않다.', '만일 지구가 둥글다면 지구는 둥글다.' 등은 논리적으로 결코 거짓일 수 없으며 반드시 참이 되는 항진 명제이다.

하지만 이렇게 논리적으로 100프로 참인 항진명제로부터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는, 즉 어떤 내용을 담은 새로운 명제를 연역할 수는 있을까? 여기서 연역이란 전제에 있는 것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 것은 지금까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럼 항진 명제 이외에 세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주면서 자명한 명제가 있을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나 기독교의 은혜와 같이 종교에서 이런 명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듯 보인다. 여하튼 학문적으로 이야기했을 때 순도 100%의 논리는 내용에 대해 말해줄 수 없고 오직 타당한 뼈대만을 제공해줄 뿐이다.(논리학의 타당성 개념 알아서 검색해 참조)

그리하여 머리가 좀 좋은 사람들이 진짜 앎을 위한 야심찬 기획을 하는데 그 것이 바로 토대주의이다. 토대주의(foundationalism)란 자명한 명제로부터 참된 명제를 논리적으로 연역해서 새로운 앎을 얻고자 하는 시도이다. 즉 명백한 내용이 담긴 명제로부터 참된 명제를 논리적으로 연역함으로써 우리가 정말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명제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시도이다. 논리만으로는 아무 내용도 말할 수 없으니 자명한 명제를 첫 내용으로 삼은 다음에 여기서 논리적으로 연역을 해서 진짜 앎을 추구해보려는 참으로 기발한 시도이다! 역사적으로 학자들 중에 이런 방식으로 확실한 앎, 진리를 얻고자 한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한다"라는 토대에서 모든 앎을 튼튼하게 쌓아가고자 했던 데카르트가 했다. 이 토대로부터 앎, 과학을 세우려는 인식이론이 이성주의(rationalism)이다.  또 다른 시도는 "나는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것을 보고 있다." 즉 내게 어떤 감각 경험, 감각 자료가 주어지는 데 그 것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것이 주어지고 있다, 즉 내가 뭔가를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 토대로부터 앎을 세우려는 인식 이론을 경험주의(empiricism)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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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이성주의는 모든 것을 의심하다가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토대를 찾은 건데 그 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이다. 아무리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고, 심지어 1+1이 2라는 것을 아는 것도 내가 악마에 의해 속고 있을지 모른다고까지 의심해봐도 생각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도무지 의심할 수가 없다. 그는 이 명백한 내용을 담은 명제를 제 1원리로 삼고 나머지 원리들을 밝게 연역해내고자 한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만큼 확실하게 파악한 것도 참이다.'를 다음에 이끌어낸다. 이 두개의 원리가 형이상학에 대해서 사용한 원리다. 그 다음에 이 두 원리들에서 물질적인 것 즉, 사물의 원리를 이끌어낸다. 데카르트에게 이는 곧 수학적인 길이, 넓이, 깊이인데 3차원 좌표계에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좌표계는 데카르트가 개발했다.- 영혼은 3차원 좌표계에 놓을 수 없지만 물질은 놓을 수 있다.  데카르트의 토대는 탄탄해보이지만 이 토대에서 이끌어내는 이야기들은 지금 보면 첫 토대만큼 명확하지 못하다.


토대주의는 결국 실패 뭐가 문제였을까? 토대로 삼았던 자명한 명제가 틀려서 망한 건가? 논리학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게 잘못인가?

토대주의는 실패했다. 둘 중에 하나 이상이 문제였을 것이다. 토대로 삼았던 자명한 명제 자체가 문제였거나 논리학에 큰 기대를 걸지 말았어야 했거나. 그 야심찬 기획은 역사적으로 의미야 있겠지만 그 내용을 지금 보면 신이니 영혼이니 이상한 내용들로 가득 차있고 틀린 것도 너무 많다.

일단 토대로 삼은 명제 자체에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전통 토대주의는 나의 생각이나 나에게 주어지는 감각자료를 자명한 토대로 삼았는데 이는 주관증거이다. 외부의 것을 말하는 것은 이미 여러 비약이 있기 때문에 철저히 나로부터 자명한 명제를 찾으려는 시도는 그럴듯해보이지만 전통 토대주의는 일종의 주관주의이거나 일인칭주의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 논리학의 한계에 대한 여러 논쟁들도 거세진다. 첫째, 논리학이 세계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즉 논리학은 앎을 줄 수 없다는 의견이다. 토대주의자들의 시도에서 보았듯이 세상에 대해 무언가 내용이 있는 것을 말하려면 논리를 벗어나서 이성이든, 경험이든 뭔가 자명한 명제를 하나 이상 받아들여야 하는데 바로 여기서 논리적 비약이 생긴다. 비약이 생기니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이 시작된다. 데카르트가 한 번 비약을 하니까 영혼, 신 이야기를 하고 또 다시 입증하기 위해 논리로 왔다가 하는데 비약을 하는 순간 우리의 앎은 튼튼해지는 게 아니라 마구 날라다니기 시작한다. 그래서 현대 20세기에 나온 입장이 있다. 논리경험주의논리실증주의가 그 것이다. 이 입장은 철저히 논리의 도약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실증이라는 말은 주어진 경험 즉 데이터로부터 증명하자는 말이다. 출발점은 주어진 감각자료, 즉 경험으로 삼고 그 다음부터 철저하게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과학을 만들어내자는 입장인데 1920년대에 나온 입장이다. 하지만 이 입장 또한 1950년대가 되면 파국을 맞는다.

둘째,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안 맞는 게 있다는 의견이다. 다음과 같은 추론을 보자. 이 추론은 논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킨 유명한 추론이라고 한다.

'모래알 1000조개가 모인 것은 모래더미이다. 모래더미에서 모래 한 알 뺀 것은 여전히 모래더미이다. 다시 말해 모래알 n개 모인 것이 모래더미라면 모래알 n-1개 모인 것도 모래더미이다. 따라서 모래 두 알은 모래더미이다.'

이 추론은 타당하다. 즉 논리적으로 도출하는 과정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결론은 상식적으로 거짓이 나온다. 모래알 두 알이 모래더미라니 진짜 누가봐도 말이 안 되는 결론이 나왔다. 따라서 나는 이 추론이 건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두번째 전제인 '모래더미에서 모래 한 알 뺀 것은 여전히 모래더미이다'가 거짓이라고 본다. '더미'의 사전적 정의는 높이 많이 쌓여 있는 덩어리인데 높고 많음의 기준 자체가 너무 주관적이며 애매하다. 솔직히 어떤 사람한테는 모래알 두 알도 많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사람한테는 모래알 1000조개도 적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모래더미에서 한 알 빼면 모래더미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고.. 조원들과 이 추론이 논리학에 대해 뭘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 논쟁을 해보았다. 모래더미란 말 자체가 우리가 매우 비논리적으로 생각한다는 걸 보여주는 개념이므로 이제 진짜 뭘 안다고 주장하려면 이런 모호한 비논리적인 정신상태를 반영하는 개념들을 싸그리 논리적으로 다듬어야 한다라는 의견이 있었다.(내 의견이었다) 또 다른 의견은 논리학은 아름다운, 선함, 많음 등의 주관적인 느낌의 영역을 묘사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으며 이야말로 논리가 세상에 대해 많은 걸 설명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는 의견도 있었다.  

셋째, 논리 자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논리도 경험에 의해 바꾸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논리는 단순히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을 우연하게 잘 설명해줬던 것 뿐이고 새로운 경험이 나오면 논리도 바꿔야한다는 게 이 의견이다. 논리의 절대성, 보편성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다.

2012/03/24 16:05 2012/03/2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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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2/03/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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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각은, 그것이 긍정적 생각이든 회의적 생각이든, 내부에 관한 생각이든 외부에 관한 생각이든, 객관적 진리 개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개념은 오직 타자와 의사소통 중에 있는 피조물들만 접근할 수 있다. 앎의 획득은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에 기초해 있지 않다. 앎의 획득은 전체론적으로 생기며, 그것은 처음부터 상호인간적이다. 데이빗슨의 <외부주의 인식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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