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데브라 그래닉 감독의 영화 <윈터스 본Winter's Bone>(2010)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론」 및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이론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였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양해를 구합니다. 설명이 꼭 필요한 곳에는 간단히 주석을 달아두었습니다.
이제까지 타인에게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나를 아프게 했던 말은 “너는 네가 자아비판도 할 줄 알고 좀 나은 인간인 줄로 아는가본데, 너는 너무도 일반적인 사람이고 넌 그 지겨운 자기동일적 자아의 반복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야.”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너무도 파괴적인 것이어서, 나는 오랫동안 먹고 자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할 정도로 앓았다. 처음에는 그 말을 부정해보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으나, 이후 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견고한 자아의 틀 안에서 살고 있었는가를 조금씩 느끼게 됐다. 몇 년 전 나를 산산조각 냈던 그 말을, 그가 얼마나 큰 절망 속에서 했었는지 짐작했던 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났을 때였다. 이미 체계에 대한 비판까지 자신 안에 담고 있는 문화산업의 체계는 그 닫힌 구조가 나의 ‘지겨운 자기동일적 자아’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비추론일지도 모른다.(자아와 문화산업 체계가 모두 총체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려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봤다.) 그러나 나는 살기 위해서 나를 부정했던 것과 똑같이(주 1.) 문화산업의 산물들을 혹독하게 부정했다. “일반적인 것 어느 하나라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그랬었다. 리사 오노의 보사노바곡이나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물론이고,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나 카프카의 소설도 버렸다-버려야할 것만 같았다. 당연하게도 이런 ‘순수’에 대한 강박은 무無로 귀결됐다. 정말 하나도 남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나 베토벤 같은 거장의 작품 하나만은 남겨둘 수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겨두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유행하는 대중가요는 들을 수 없고, folk나 jazz 장르는 더더욱 들을 수 없고(아도르노에 따르면 그것들은 후크 송보다도 더 악랄하니까(주 2.)), 그렇다고 클래식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귀도 못됐다. 너무 외로웠다. 그리고 견디다 못해 언제부터인가 다시 문학을 읽고 음악도 다시 듣기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봤던 <윈터스 본(Winter's Bone)>이라는 영화는 문화산업의 일반성을 빗겨나감으로써 나를 잡아끌었는데, 이 영화는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이 냉소적으로 논증해놓은 수많은 명제를 스쳐 지난다. 영화는 미국영화가 좀처럼 그리지 않는 빈민층의 모습을 다룬다. 물론 헐리웃 영화에도 빈민이 등장하긴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빈민은 유색인종, 즉 할렘가의 흑인이나 중국인(또는 한국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시아의 무슬림이라는 스트레오타입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처사로, 많은 자유주의자들 또한 이러한 편견에 반기를 든다. 그런데 더 문제인 것은 이러한 관점이 타자의 문제를 단순한 외부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헐리웃 영화에 등장하는 미국식의 ‘정의’론이 그다지 마음을 끌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늘 자아 밖의 타자를 상정하고 타자를 처단하거나, 환대하거나, 혹은 무한정 사랑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윤리를 호명하는 이러한 영화들은 감동은 줄지 몰라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현실의 부조리 그 자체에 대해 침묵한다는 점에서 정의롭지 못하다.(주. 3) 어쨌든 <윈터스 본>은 이러한 이분법을 벗어던지고 미국 자신 안에 분열돼 있는 틈으로서의 타자를 그렸다는 점에서 일단 마음에 들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다람쥐를 잡아먹어야 하고, 병든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하는 현실 속에서 군대에 지원하는 것을 꿈으로 여기는 어린 소녀. 영화에는 너무도 낯선 미국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윈터스 본>의 주인공, 리 돌리.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이미 박탈당한 채 앙상한 가지만 내놓고 있는 겨울(Winter's Bone) 촌락을 배경으로 나보다 훨씬 어린 소녀 리 돌리가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다니는데, 주변은 온통 그런 자신을 위협하는 마약쟁이 천지고 비참할 만치 가난한 상황은 바닥을 모르고 악화된다. 그런데 리가 아버지를 찾는 이유는 죽은 아버지를 찾아 애도함으로써 따뜻한 가족애를 확인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아버지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마약업에 종사하는 아버지가 실종되기 전 스스로(아버지)의 보석금으로서 담보 잡히게 한 집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가난하고 돌봐주는 이도 없는 소녀는 삶의 마지막 보루인 이 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죽은 아버지를 찾으러 다닌다. 영화 초반, 이정도의 골격이 제시됐을 때 관객은 더 이상 이 영화가 가벼운 소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문화산업은 끈질기게 예술에서 표절을 해오”(주. 4)고 있다지만, <윈터스 본>의 비극성은 “깊이(=심오함)의 대용품”(주. 5)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문화산업의 정규 고객들에게 “교양의 찌꺼기”(주. 6)를 제공해주기엔 이미 도를 지나쳤기 때문이다. 주인공 리가 결코 시민-즉 "경쟁사회 속 자잘한 편차만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 존재"-이 될 수 없다는 점이 먼저 그것을 말해준다. ‘풍요로운 나라’ 미국에서 정부의 지원 같은 것을 받고 있다고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리는 학교에도 다니지 못한다. 리는 동생을 데려다주러 학교에 갔다가 학생들이 제식 훈련하는 모습을 엿본다. 그녀의 것이 아닌 행운들. 영화에서 리의 고통은 관객의 환상적인 만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밥을 굶고 피를 철철 흘리는 진짜 고통이다. 이쯤 되면 문화산업이 주는 달콤한 비극성을 즐기려던 사람들은 하나 둘 극장을 나가고 영화는 고조된다.
리의 여정 도처에는 폭력이 있고, 마약 냄새가 진동하고, 심지어 시신훼손이라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등장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장면들을 자극적으로 연출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은 오로지 효과에만 매달림으로써 원래 그 효과가 지녔던 반항적 성격을 꺾어버리고 작품을 대체하는 공식에 종속시켜버린다”(주. 7)고 했는데, 감독은 효과를 아예 꺼버림으로써 이러한 논란을 피해간다. 영화는 긴장감 속에서도 극적인 효과를 최대한 억제하고 고통스러운 소녀의 모습을 가만히 비춘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리가 자신을 죽일 듯 구타하기도 했던 친척 여성들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차가운 호수 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꺼내 그의 손목을 자를 때, 그녀는 숨이 끊어지듯 억억 운다. 아무래도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 억척스런 소녀가 울 때, 비극은 미화됨 없이 참담하게 관객에게 전해져온다. 관객들은 모두 숨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봤다. 나 또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틈 없이 발만 동동 굴렀다. 눈물이 흐르지 않고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그 장면은 문화산업이 나의 사회적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신호’가 아니었다. 부조리한 체계를 그대로 살아감으로써 그 체계를 유지시키고 있는 나는 차마 그 고통을 제대로 마주하기 어려웠고, 편히 자고, 먹고, 입으면서도 노동과 빈곤에 대해서 쉽게 입을 나불대는 나의 안이함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가 사유하(는 척이라도 하)기를 멈추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임을 예감했다.
“문화산업은 비극성에 상투적인 궤도에서 그것이 위치할 고정된 자리를 지정해준다. 처방이 명백하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비극이 제어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무마하기에 충분하다.”(주. 8) <윈터스 본>에서는 어땠을까. 고생 끝에 아버지의 잘린 팔을 경찰서에 들고 가 드디어 집을 지킬 수 있게 된 리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돌본다. 리는 어린 동생들에게 현실을 사는 법을 가르쳐준다. 총 쏘는 법을 가르치고, 밥 짓는 법을 가르치고, “하기 싫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해준다. 비록 가까스로 보금자리는 지켜냈지만 궁핍하고 위태로운 삶은 계속 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일말의 애정으로 리를 돕던 마약쟁이 삼촌은 그녀에게 마약이나 권하던 평소와는 달리 작은 병아리를 사다 주고, 기타를 연주해주고, 노래를 들려준다. 그렇다면 이제 비극은 끝났을까? 겉으로 보기에 이런 마무리는 해피엔딩으로 보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 삼촌은 리의 아버지를 죽인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떠나기 직전이다. 그는 아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그것은, 리에게는 그나마도 의지할 사람이 없어지는 일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황상 그 일로 리와 그 가족들까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남은 자들의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 여기서 비극은 제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점에서 엔딩 전 미풍처럼 잠깐 스치는 따스함은 더욱 더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세계는 변한 것이 없고, 여전히 소녀는 삶으로부터 혜택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에게 나긋이 내일을 이야기하는 소녀, 그 소녀를 두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극장을 나서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윈터스 본>은 휴머니즘에 기대어 도덕을 선전하는 영화라고는 보기 어렵다. 영화는 관객에게 값싼 동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을 둘러싼 현실을 다시 한 번 둘러보라고 말하고, 우리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단지 소외된 이웃을 살피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영화는 지금 무언가가 잘못돼 있다는 것을 고발한다. <윈터스 본>에서 공권력이 묘사되는 것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법적 절차만을 강조하면서 리를 압박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경찰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리의 아버지에게 내부고발을 유도해내고 자신의 이익만 챙긴 뒤 그가 죽도록 무책임하게 방치한 것도 경찰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불법이며 강력한 범죄이기도 한 마약거래를 보는 영화의 시선이다. 리는 가끔씩 매서운 눈을 하고서 “나는 죽을 때까지 마약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을 정상적이고 건전한 시민이 되어 체제의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의지로 보기는 어렵다. 내게는 그것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스스로를, 그 연약하고 단수적인 삶을 지켜내려는 소녀의 의지로 읽혔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삶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편 영화는 마약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처단하지 않으며, 그들의 룰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보기에 따라선, 기회주의적이고 몰인정한 경찰들보다 마을 사람들의 납득할 만한 원칙주의와, (예외적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베푸는 인정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선악 구도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서 문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후기자유주의적 취미의 규범화된, 강요된 평균치”(주. 9), 그 동일성 논리를 근거로 ‘마약쟁이들은 절대악이야!’ 라고 논평하는 것을 영화는 허용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러한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가난한 자의 삶 자체를 조심스럽게 조명한다.
나는 '휴머니즘'이 싫다. 스스로가 몰인정한 사람이라며 위악을 떨치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맥락을 뛰어 넘어, 늘 사유에 훨씬 앞서서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오는 휴머니즘이 불편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지하철에서 무례하게 내 무릎에 껌을 던지는 할머니에게 인정을 베풀기 위해 그 껌을 사게 만들고, (자기 아들 때 맞춰 밥 해주는) 착한 며느리를 착취하는 촌로의 이기심을 ‘소박한’ 마음이라는 이유로 긍정하게 만들고,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으면 그의 아기 사진을 볼 때 덮어놓고 “너무 예쁘다” 말하라 강요하는 그 맹목적인 공리를 받아들여야한다는 것, 아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못난 인간,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힌다는 것이 싫다.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의 일상은 아름답고 밭에서 일하는 동안 묻은 바지의 흙은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니듯, 농촌의 단순한 삶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가난한 자의 삶이 언제나 긍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아이도 언제나 선을 표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자의 삶이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삶이 어떠할 때 아름다운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즉 미를 어떤 대상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고, 대상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미적 작용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현상을 아주 세분화해서 보고, 그것을 다시 종합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활동은 다시 말해서 ‘사유’다.
「문화산업론」은 문화산업의 본질인 총체성을 지적하고 있고, 나는 ‘휴머니즘’이라는 코드가 문화산업의 총체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유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을 덮고 우리를 ‘휴머니티’라는 모호한 평균성 안으로 구겨 넣는다. ‘무엇이 휴머니즘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공통감 삼아 ‘거짓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문화산업의 산물들은 우리에게서 사유의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이 사회에서 눈물의 막강한 영향력을 생각해보자. 왜 그렇게 많은 연예인과 정치인들이 TV쇼에 나와 눈물을 흘리는 것이며, 왜 그렇게 많은 드라마에서 자식에게 헌신한 부모가 그들을 기념품 취급하는 것을 긍정하는가.) 이것이 정말 휴머니즘인가? 나는 그것이 거짓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문화산업에 의해 승인된 고통의 '평균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거짓 휴머니즘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그런데 문화산업에 대한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분석이 탁월하다고 하여 만약 「문화산업론」의 전체를 받아들이게 되면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문화산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되면, 아도르노의 명제 각각을 모두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우리들은 분명 어떤 작용을 발견하고 경험해야하며, 그것은 늘 대상을 통해 매개되므로 우리는 결코 무無에서부터 시작할 수 없다. 따라서 「문화산업론」의 논의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이제부터 우리는 어떤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주체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현 시점에서 문화산업의 산물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낼 수는 없다. 오늘날엔 이미 자본주의적 총체성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술활동이나 예술작품, 예술적 경험의 물질적 토대만을 근거로 그것을 미적 대상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순수한 무無를 추구하는 것과 같다.
나는 얼마나 공고한 체계 안에서 살고 있는 걸까. 『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나는 나에게 ‘과연 내게 체계 밖을 사유할 능력이 있는 걸까’라고 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문화산업에 대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정밀한 논증을 접하고 나서부터, 나는 더 열심히 문화산업을 부정했었다. 그러나 자기동일적 자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을 죽이지는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문화산업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이 주체로 새로 태어난 게 아니라, 기존의 자기동일적 자아가 더 음흉한 모습으로 변신한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어 자주 갑갑해진다. 더 많이 인정받고 싶고, 더 많은 영예를 누리고 싶어서 좀 더 복잡하게 내 자아가 진화한 것은 아닐까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가 자신의 총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고집스럽게 새로운 것들을 자의식으로 포섭해버리듯이, 문화산업에 대한 나의 비판도 때때로 체제 안으로 다시 포섭될 것이다. 아니, 사실은 늘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러나 내 자신이 더 이상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듯이, 아무런 비판 없이 문화산업을 수용하는 원초적 상태에 다시 놓이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은 부족한대로 늘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무언가 잉여의 것을 발견해내는 것뿐이다. 예각을 유지하면서, 언제든 독설을 내뱉을 준비를 하고서.
<윈터스 본>과 같은 영화는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영화다. 물론 이 영화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자크 랑시에르가 역설하는 ‘이질적인 감각적인’ 것(주. 10)의 경험을 이 영화에서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동시대 미국의 황량한 모습, 리와 동성 친구와의 우정,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고 때로는 서로를 돕는 친척 여성들 간의 복잡한 관계 등에서 이질적인 감각을 잠시 엿볼 수는 있었지만, 나는 이 영화가 기존의 문화산업 산물들이 가지는 속성들을 부정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본다. 기존 체제의 모순을 고발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삶의 에토스’를 형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체제는 지양돼야 한다. ‘이질적인 감각적인’ 것의 경험이란 우리에게 체제 유지자라는 원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 자체로 새로운 공간의 탄생인 그런 경험일 것이다. 한편 어떤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가난을 포르노처럼 전시한다”고 혹평했는데, 나는 (여기에 동의하느냐와는 별론으로) 그것이 가치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삶을 대상화하는 일은 늘 시작부터가 잘못이다. 그들에게 ‘성가심’을 유발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그것이 정작 타인의 삶에로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튕겨 나간 관심은 늘 소비 속에서 용해된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며, 공동의 삶을 전혀 바꾸지도 못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연민의 입장에서, 외적 타자의 입장에서 타인을 그리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삶으로서, 그들 삶의 보다 내밀한 곳에까지 깊숙히 들어가 입술을 더욱 앙다물고서 만들고 경험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미적 경험에 미리 정해진 어떤 의미나 이념, 혹은 공중도덕적 가치판단이 전제돼서도 안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윈터스 본>, 앙상하게 뼈만 남은 겨울의 풍경은 정직하게 비워진 사유의 틈, 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왔다. 모든 것을 박탈당한 소녀의 씩씩한 삶을 긍정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발가벗겨진다는 것, 사상의 가난은 이질적인 감각적인 것을 경험하기 위한 조건, 주체로 태어나기 위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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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부정하기 위한 힘, 끊임없이 변하고 새로와지고 죽어버리고도 다시 살아나는 인간의 투쟁자 기질의 지극히 자연적인 발로라고 볼 수 있는 부정하는 힘을 우리들은 항상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다만 부정하는 용기를 갖고 있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 「그 사람: 1920년의 기록」
주 2. “모든 사람은 자신을 때리고 있는 힘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비틀거리는 것을 조롱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규범으로까지 격상시키는 재즈의 절분음 원칙에서 볼 수 있다.” 「문화산업 ― 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 막스 호르크하이머/테오도르 아도르노, 최성만 번역, p27
주 3.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산업은 관리되는 자들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보살핌을 유능한 자들의 세계에서의 사람들의 직접적 연대로서 반영한다.” 위의 글, p25
주 4. 위의 글, p26
주 5. 위의 글, p26
주 6. 위의 글, p26
주 7. 위의 글, p5
주 8. 위의 글, p26
주 9. 위의 글, p12
주 10. "랑시에르에 따르면 미학적 체제의 정치적 전체 모토는 ‘감각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구원하자’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미학 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 발제문 中, 김동규)" 우리 몸에 이미 기입돼 있는 어떤 (정치적인) 감각들을 재분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랑시에르는 역설한다.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감각적인 것들-예를 들면 이주노동자들을 배척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고, 혹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어떤 감각틀, 여성을 피지배성, 종속성, 수동성과 같은 속성들로 인식하는 감각틀 등-은 그러한 기존의 감각과는 다른 전혀 이질적인 어떤 것과 마주칠 때 지양될 수 있다. '감각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구원하'는 것은 곧 감각틀을 새로 짜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미학에 관련해서는 홍익대 강연문 「감성적/미학적 전복」(2008)과 논문 「미학 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뉴레프트리뷰』), 그리고 단행본 『미학 안의 불편함』, 『감성의 분할』을 참조.




2011/08/13 07:16
저는 결국 삶의 문제로 보고 싶어요.
나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아도르노의 삶과 영화 속 리의 삶까지. 그 모습.
삶은 사랑이고 사름.
본문에 "나는 휴머니즘이 싫다"고 하셨을 때
선생님의 그 모습까지 휴머니티라고 봐요^^
휴머니즘에 대한 휴머니즘이라고나 할까요? 하하하
2011/08/15 02:28
맞아요. 사는 게 사랑하는 것이기 마련인 것 같네요.
전 거기에 대해 열심히 고민해보자는 거였지요.
"휴머니즘이 싫다"고 무리하게 썼는데,
제 생각을 훤히 알아주시니 멋쩍고도 기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