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데브라 그래닉 감독의 영화 <윈터스 본Winter's Bone>(2010)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문화산업론」 및 자크 랑시에르의 미학이론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하였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양해를 구합니다. 설명이 꼭 필요한 곳에는 간단히 주석을 달아두었습니다.



이제까지 타인에게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나를 아프게 했던 말은 “너는 네가 자아비판도 할 줄 알고 좀 나은 인간인 줄로 아는가본데, 너는 너무도 일반적인 사람이고 넌 그 지겨운 자기동일적 자아의 반복 속에서 살고 있을 뿐이야.”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너무도 파괴적인 것이어서, 나는 오랫동안 먹고 자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할 정도로 앓았다. 처음에는 그 말을 부정해보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으나, 이후 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나는 내가 얼마나 견고한 자아의 틀 안에서 살고 있었는가를 조금씩 느끼게 됐다. 몇 년 전 나를 산산조각 냈던 그 말을, 그가 얼마나 큰 절망 속에서 했었는지 짐작했던 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났을 때였다. 이미 체계에 대한 비판까지 자신 안에 담고 있는 문화산업의 체계는 그 닫힌 구조가 나의 ‘지겨운 자기동일적 자아’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유비추론일지도 모른다.(자아와 문화산업 체계가 모두 총체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려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봤다.) 그러나 나는 살기 위해서 나를 부정했던 것과 똑같이(주 1.) 문화산업의 산물들을 혹독하게 부정했다. “일반적인 것 어느 하나라도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으로 그랬었다. 리사 오노의 보사노바곡이나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물론이고,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나 카프카의 소설도 버렸다-버려야할 것만 같았다. 당연하게도 이런 ‘순수’에 대한 강박은 무無로 귀결됐다. 정말 하나도 남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나 베토벤 같은 거장의 작품 하나만은 남겨둘 수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겨두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유행하는 대중가요는 들을 수 없고, folk나 jazz 장르는 더더욱 들을 수 없고(아도르노에 따르면 그것들은 후크 송보다도 더 악랄하니까(주 2.)), 그렇다고 클래식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귀도 못됐다. 너무 외로웠다. 그리고 견디다 못해 언제부터인가 다시 문학을 읽고 음악도 다시 듣기 시작했다.

지난 겨울에 봤던 <윈터스 본(Winter's Bone)>이라는 영화는 문화산업의 일반성을 빗겨나감으로써 나를 잡아끌었는데, 이 영화는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이 냉소적으로 논증해놓은 수많은 명제를 스쳐 지난다. 영화는 미국영화가 좀처럼 그리지 않는 빈민층의 모습을 다룬다. 물론 헐리웃 영화에도 빈민이 등장하긴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빈민은 유색인종, 즉 할렘가의 흑인이나 중국인(또는 한국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아시아의 무슬림이라는 스트레오타입으로 등장한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한 처사로, 많은 자유주의자들 또한 이러한 편견에 반기를 든다. 그런데 더 문제인 것은 이러한 관점이 타자의 문제를 단순한 외부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헐리웃 영화에 등장하는 미국식의 ‘정의’론이 그다지 마음을 끌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늘 자아 밖의 타자를 상정하고 타자를 처단하거나, 환대하거나, 혹은 무한정 사랑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윤리를 호명하는 이러한 영화들은 감동은 줄지 몰라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현실의 부조리 그 자체에 대해 침묵한다는 점에서 정의롭지 못하다.(주. 3) 어쨌든 <윈터스 본>은 이러한 이분법을 벗어던지고 미국 자신 안에 분열돼 있는 틈으로서의 타자를 그렸다는 점에서 일단 마음에 들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다람쥐를 잡아먹어야 하고, 병든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하는 현실 속에서 군대에 지원하는 것을 꿈으로 여기는 어린 소녀. 영화에는 너무도 낯선 미국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윈터스 본>의 주인공, 리 돌리.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이미 박탈당한 채 앙상한 가지만 내놓고 있는 겨울(Winter's Bone) 촌락을 배경으로 나보다 훨씬 어린 소녀 리 돌리가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다니는데, 주변은 온통 그런 자신을 위협하는 마약쟁이 천지고 비참할 만치 가난한 상황은 바닥을 모르고 악화된다. 그런데 리가 아버지를 찾는 이유는 죽은 아버지를 찾아 애도함으로써 따뜻한 가족애를 확인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아버지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마약업에 종사하는 아버지가 실종되기 전 스스로(아버지)의 보석금으로서 담보 잡히게 한 집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가난하고 돌봐주는 이도 없는 소녀는 삶의 마지막 보루인 이 집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죽은 아버지를 찾으러 다닌다. 영화 초반, 이정도의 골격이 제시됐을 때 관객은 더 이상 이 영화가 가벼운 소비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문화산업은 끈질기게 예술에서 표절을 해오”(주. 4)고 있다지만, <윈터스 본>의 비극성은 “깊이(=심오함)의 대용품”(주. 5)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문화산업의 정규 고객들에게 “교양의 찌꺼기”(주. 6)를 제공해주기엔 이미 도를 지나쳤기 때문이다. 주인공 리가 결코 시민-즉 "경쟁사회 속 자잘한 편차만을 간직하고 있는 유적 존재"-이 될 수 없다는 점이 먼저 그것을 말해준다. ‘풍요로운 나라’ 미국에서 정부의 지원 같은 것을 받고 있다고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리는 학교에도 다니지 못한다. 리는 동생을 데려다주러 학교에 갔다가 학생들이 제식 훈련하는 모습을 엿본다. 그녀의 것이 아닌 행운들. 영화에서 리의 고통은 관객의 환상적인 만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밥을 굶고 피를 철철 흘리는 진짜 고통이다. 이쯤 되면 문화산업이 주는 달콤한 비극성을 즐기려던 사람들은 하나 둘 극장을 나가고 영화는 고조된다.

리의 여정 도처에는 폭력이 있고, 마약 냄새가 진동하고, 심지어 시신훼손이라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등장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장면들을 자극적으로 연출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은 오로지 효과에만 매달림으로써 원래 그 효과가 지녔던 반항적 성격을 꺾어버리고 작품을 대체하는 공식에 종속시켜버린다”(주. 7)고 했는데, 감독은 효과를 아예 꺼버림으로써 이러한 논란을 피해간다. 영화는 긴장감 속에서도 극적인 효과를 최대한 억제하고 고통스러운 소녀의 모습을 가만히 비춘다. 영화의 클라이막스, 리가 자신을 죽일 듯 구타하기도 했던 친척 여성들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차가운 호수 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꺼내 그의 손목을 자를 때, 그녀는 숨이 끊어지듯 억억 운다. 아무래도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 억척스런 소녀가 울 때, 비극은 미화됨 없이 참담하게 관객에게 전해져온다. 관객들은 모두 숨 죽이고 그 장면을 지켜봤다. 나 또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틈 없이 발만 동동 굴렀다. 눈물이 흐르지 않고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그 장면은 문화산업이 나의 사회적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신호’가 아니었다. 부조리한 체계를 그대로 살아감으로써 그 체계를 유지시키고 있는 나는 차마 그 고통을 제대로 마주하기 어려웠고, 편히 자고, 먹고, 입으면서도 노동과 빈곤에 대해서 쉽게 입을 나불대는 나의 안이함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가 사유하(는 척이라도 하)기를 멈추는 순간까지 지속될 것임을 예감했다.

“문화산업은 비극성에 상투적인 궤도에서 그것이 위치할 고정된 자리를 지정해준다. 처방이 명백하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비극이 제어할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무마하기에 충분하다.”(주. 8) <윈터스 본>에서는 어땠을까. 고생 끝에 아버지의 잘린 팔을 경찰서에 들고 가 드디어 집을 지킬 수 있게 된 리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돌본다. 리는 어린 동생들에게 현실을 사는 법을 가르쳐준다. 총 쏘는 법을 가르치고, 밥 짓는 법을 가르치고, “하기 싫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말해준다. 비록 가까스로 보금자리는 지켜냈지만 궁핍하고 위태로운 삶은 계속 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일말의 애정으로 리를 돕던 마약쟁이 삼촌은 그녀에게 마약이나 권하던 평소와는 달리 작은 병아리를 사다 주고, 기타를 연주해주고, 노래를 들려준다. 그렇다면 이제 비극은 끝났을까? 겉으로 보기에 이런 마무리는 해피엔딩으로 보기에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 삼촌은 리의 아버지를 죽인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떠나기 직전이다. 그는 아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그것은, 리에게는 그나마도 의지할 사람이 없어지는 일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황상 그 일로 리와 그 가족들까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남은 자들의 행복은 보장되지 않는다. 여기서 비극은 제어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 점에서 엔딩 전 미풍처럼 잠깐 스치는 따스함은 더욱 더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세계는 변한 것이 없고, 여전히 소녀는 삶으로부터 혜택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들에게 나긋이 내일을 이야기하는 소녀, 그 소녀를 두고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극장을 나서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윈터스 본>은 휴머니즘에 기대어 도덕을 선전하는 영화라고는 보기 어렵다. 영화는 관객에게 값싼 동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관객을 둘러싼 현실을 다시 한 번 둘러보라고 말하고, 우리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단지 소외된 이웃을 살피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영화는 지금 무언가가 잘못돼 있다는 것을 고발한다. <윈터스 본>에서 공권력이 묘사되는 것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법적 절차만을 강조하면서 리를 압박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경찰이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리의 아버지에게 내부고발을 유도해내고 자신의 이익만 챙긴 뒤 그가 죽도록 무책임하게 방치한 것도 경찰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불법이며 강력한 범죄이기도 한 마약거래를 보는 영화의 시선이다. 리는 가끔씩 매서운 눈을 하고서 “나는 죽을 때까지 마약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을 정상적이고 건전한 시민이 되어 체제의 질서에 순응하겠다는 의지로 보기는 어렵다. 내게는 그것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스스로를, 그 연약하고 단수적인 삶을 지켜내려는 소녀의 의지로 읽혔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삶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편 영화는 마약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처단하지 않으며, 그들의 룰에 개입하지도 않는다. 보기에 따라선, 기회주의적이고 몰인정한 경찰들보다 마을 사람들의 납득할 만한 원칙주의와, (예외적이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베푸는 인정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선악 구도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서 문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후기자유주의적 취미의 규범화된, 강요된 평균치”(주. 9), 그 동일성 논리를 근거로 ‘마약쟁이들은 절대악이야!’ 라고 논평하는 것을 영화는 허용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러한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가난한 자의 삶 자체를 조심스럽게 조명한다.

나는 '휴머니즘'이 싫다. 스스로가 몰인정한 사람이라며 위악을 떨치고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맥락을 뛰어 넘어, 늘 사유에 훨씬 앞서서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오는 휴머니즘이 불편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지하철에서 무례하게 내 무릎에 껌을 던지는 할머니에게 인정을 베풀기 위해 그 껌을 사게 만들고, (자기 아들 때 맞춰 밥 해주는) 착한 며느리를 착취하는 촌로의 이기심을 ‘소박한’ 마음이라는 이유로 긍정하게 만들고, 누군가와 사이가 틀어지고 싶지 않으면 그의 아기 사진을 볼 때 덮어놓고 “너무 예쁘다” 말하라 강요하는 그 맹목적인 공리를 받아들여야한다는 것, 아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못난 인간, 아웃사이더로 낙인찍힌다는 것이 싫다. ‘화려하고 세련된 궁정의 일상은 아름답고 밭에서 일하는 동안 묻은 바지의 흙은 더럽고 추한 것’이 아니듯, 농촌의 단순한 삶이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고, 가난한 자의 삶이 언제나 긍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아이도 언제나 선을 표상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자의 삶이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삶이 어떠할 때 아름다운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즉 미를 어떤 대상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고, 대상을 통해 드러나는 어떤 미적 작용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현상을 아주 세분화해서 보고, 그것을 다시 종합해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활동은 다시 말해서 ‘사유’다.

「문화산업론」은 문화산업의 본질인 총체성을 지적하고 있고, 나는 ‘휴머니즘’이라는 코드가 문화산업의 총체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유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을 덮고 우리를 ‘휴머니티’라는 모호한 평균성 안으로 구겨 넣는다. ‘무엇이 휴머니즘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공통감 삼아 ‘거짓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문화산업의 산물들은 우리에게서 사유의 기회를 앗아가 버린다.(이 사회에서 눈물의 막강한 영향력을 생각해보자. 왜 그렇게 많은 연예인과 정치인들이 TV쇼에 나와 눈물을 흘리는 것이며, 왜 그렇게 많은 드라마에서 자식에게 헌신한 부모가 그들을 기념품 취급하는 것을 긍정하는가.) 이것이 정말 휴머니즘인가? 나는 그것이 거짓 휴머니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문화산업에 의해 승인된 고통의 '평균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거짓 휴머니즘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그런데 문화산업에 대한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분석이 탁월하다고 하여 만약 「문화산업론」의 전체를 받아들이게 되면 대단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문화산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게 되면, 아도르노의 명제 각각을 모두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우리들은 분명 어떤 작용을 발견하고 경험해야하며, 그것은 늘 대상을 통해 매개되므로 우리는 결코 무無에서부터 시작할 수 없다. 따라서 「문화산업론」의 논의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이제부터 우리는 어떤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주체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현 시점에서 문화산업의 산물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낼 수는 없다. 오늘날엔 이미 자본주의적 총체성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술활동이나 예술작품, 예술적 경험의 물질적 토대만을 근거로 그것을 미적 대상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순수한 무無를 추구하는 것과 같다.

나는 얼마나 공고한 체계 안에서 살고 있는 걸까. 『계몽의 변증법』을 읽고 나는 나에게 ‘과연 내게 체계 밖을 사유할 능력이 있는 걸까’라고 물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문화산업에 대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정밀한 논증을 접하고 나서부터, 나는 더 열심히 문화산업을 부정했었다. 그러나 자기동일적 자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자신을 죽이지는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문화산업 전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이 주체로 새로 태어난 게 아니라, 기존의 자기동일적 자아가 더 음흉한 모습으로 변신한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어 자주 갑갑해진다. 더 많이 인정받고 싶고, 더 많은 영예를 누리고 싶어서 좀 더 복잡하게 내 자아가 진화한 것은 아닐까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아가 자신의 총체성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고집스럽게 새로운 것들을 자의식으로 포섭해버리듯이, 문화산업에 대한 나의 비판도 때때로 체제 안으로 다시 포섭될 것이다. 아니, 사실은 늘 그렇게 될 것 같다. 그러나 내 자신이 더 이상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듯이, 아무런 비판 없이 문화산업을 수용하는 원초적 상태에 다시 놓이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은 부족한대로 늘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무언가 잉여의 것을 발견해내는 것뿐이다. 예각을 유지하면서, 언제든 독설을 내뱉을 준비를 하고서.

<윈터스 본>과 같은 영화는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영화다. 물론 이 영화 역시 완벽하지는 않다. 자크 랑시에르가 역설하는 ‘이질적인 감각적인’ 것(주. 10)의 경험을 이 영화에서 찾아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동시대 미국의 황량한 모습, 리와 동성 친구와의 우정,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고 때로는 서로를 돕는 친척 여성들 간의 복잡한 관계 등에서 이질적인 감각을 잠시 엿볼 수는 있었지만, 나는 이 영화가 기존의 문화산업 산물들이 가지는 속성들을 부정하는 데에 주력했다고 본다. 기존 체제의 모순을 고발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삶의 에토스’를 형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체제는 지양돼야 한다. ‘이질적인 감각적인’ 것의 경험이란 우리에게 체제 유지자라는 원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 자체로 새로운 공간의 탄생인 그런 경험일 것이다. 한편 어떤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가난을 포르노처럼 전시한다”고 혹평했는데, 나는 (여기에 동의하느냐와는 별론으로) 그것이 가치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삶을 대상화하는 일은 늘 시작부터가 잘못이다. 그들에게 ‘성가심’을 유발해서가 아니라, 대개는 그것이 정작 타인의 삶에로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튕겨 나간 관심은 늘 소비 속에서 용해된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며, 공동의 삶을 전혀 바꾸지도 못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연민의 입장에서, 외적 타자의 입장에서 타인을 그리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삶으로서, 그들 삶의 보다 내밀한 곳에까지 깊숙히 들어가 입술을 더욱 앙다물고서 만들고 경험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미적 경험에 미리 정해진 어떤 의미나 이념, 혹은 공중도덕적 가치판단이 전제돼서도 안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윈터스 본>, 앙상하게 뼈만 남은 겨울의 풍경은 정직하게 비워진 사유의 틈, 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왔다. 모든 것을 박탈당한 소녀의 씩씩한 삶을 긍정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발가벗겨진다는 것, 사상의 가난은 이질적인 감각적인 것을 경험하기 위한 조건, 주체로 태어나기 위한 조건이다.

 
 
 
 
* * * 

주 1.  "부정하기 위한 힘, 끊임없이 변하고 새로와지고 죽어버리고도 다시 살아나는 인간의 투쟁자 기질의 지극히 자연적인 발로라고 볼 수 있는 부정하는 힘을 우리들은 항상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다만 부정하는 용기를 갖고 있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산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고, 따라서 부정은 긍정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 「그 사람: 1920년의 기록」

주 2. “모든 사람은 자신을 때리고 있는 힘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비틀거리는 것을 조롱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규범으로까지 격상시키는 재즈의 절분음 원칙에서 볼 수 있다.” 「문화산업 ― 대중기만으로서의 계몽」, 막스 호르크하이머/테오도르 아도르노, 최성만 번역, p27

주 3.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산업은 관리되는 자들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보살핌을 유능한 자들의 세계에서의 사람들의 직접적 연대로서 반영한다.” 위의 글, p25

주 4. 위의 글, p26

주 5. 위의 글, p26

주 6. 위의 글, p26

주 7. 위의 글, p5

주 8. 위의 글, p26

주 9. 위의 글, p12

주 10. "랑시에르에 따르면 미학적 체제의 정치적 전체 모토는 ‘감각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구원하자’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미학 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 발제문 中, 김동규)" 우리 몸에 이미 기입돼 있는 어떤 (정치적인) 감각들을 재분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랑시에르는 역설한다.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감각적인 것들-예를 들면 이주노동자들을 배척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고, 혹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어떤 감각틀, 여성을 피지배성, 종속성, 수동성과 같은 속성들로 인식하는 감각틀 등-은 그러한 기존의 감각과는 다른 전혀 이질적인 어떤 것과 마주칠 때 지양될 수 있다. '감각적으로 이질적인 것을 구원하'는 것은 곧 감각틀을 새로 짜는 것이다. 랑시에르의 미학에 관련해서는 홍익대 강연문 「감성적/미학적 전복」(2008)과 논문 「미학 혁명과 그 결과: 자율성과 타율성의 서사 만들기」(『뉴레프트리뷰』), 그리고 단행본 『미학 안의 불편함』, 『감성의 분할』을 참조.

 

2011/08/01 16:28 2011/08/01 16:28
  1. 성재
    2011/08/13 07:16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결국 삶의 문제로 보고 싶어요.
    나의 삶은 물론이거니와 아도르노의 삶과 영화 속 리의 삶까지. 그 모습.
    삶은 사랑이고 사름.

    본문에 "나는 휴머니즘이 싫다"고 하셨을 때
    선생님의 그 모습까지 휴머니티라고 봐요^^
    휴머니즘에 대한 휴머니즘이라고나 할까요? 하하하
    • Plutonian
      2011/08/15 02:28
      사름, 좋네요.
      맞아요. 사는 게 사랑하는 것이기 마련인 것 같네요.
      전 거기에 대해 열심히 고민해보자는 거였지요.

      "휴머니즘이 싫다"고 무리하게 썼는데,
      제 생각을 훤히 알아주시니 멋쩍고도 기쁩니다. ^^
Leave a Comment
 

 

흄을 소개한 여러 저서와 그의 대표적인 저작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탐구>(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의 일부분을 읽은 후, 흄을 한 마디로 평가해보려 할 때 나는 주저 없이 그를 자연주의자라고 했다. 이것은 흄에 대한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인식, 즉 그가 회의주의자라는 인식 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평가일 것 같다. 흄은 근대 합리론자들의 토대주의에 적극적으로 맞섰던 철학자다. 그는 데카르트가 발견해낸 “Cogito, ergo sum”과 같은 그 어떤 명석판명한 제1원리도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러한 단단한 토대 위에 학문을 세우겠다는 합리론자들의 의지를 꺾어 내렸다. 흄은 인과성, 물리적 대상, 자아라는 기초 신념들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전통적 인식론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감각의 명증성에 반대하는 다른 평범한 회의주의자들과 같이 피론주의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흄은 인과성, 물리적 대상, 자아와 같은 기초 신념의 정당화에는 반대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러한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다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자신의 인간학을 정립하는데, 그러면서 그는 인과성, 물리적 대상, 자아라는 기초 신념들을 가지는 것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사람들이 타고난 본능이나 선입견에 의해 자신들이 갖는 감각을 믿으려는 경항을 가진다고 설명하면서, “추론이 없어도, 또는 거의 이성을 사용하기도 전에 우리는 항상 외적인 세계, 즉 우리의 지각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나 다른 감각 동물들이 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혹은 다 사라져버린다고 하더라도 존재할, 그런 외적인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고 힘주어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전제된 세계가 바로 자연이다
.

이 글에서는 흄의 자연주의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여 그가 바라보는 존재의 세계를 기술하되
, 흄의 자연주의적 입장을 견지할 때 제기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해보고, 현재적 의미에서 그러한 문제들이 가지는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 자아동일성을 부정한 흄의 철학

요즈음 철학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사상은 개인주의회의주의같다. 근대에 와서 의식 주체로서의 개인이 탄생한 이래 우리는 개인주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교황으로부터, 사제로부터, 그리고 신의 항시적인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주체로서 사유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의 해방이자 계몽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근대의 주체개념이 오늘날에는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인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와 결합하여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치닫게 된 것이다. 전통 형이상학의 독단성과 절대적인 가치를 해체·재결합하는 포스트모던의 이념은 보편가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파악하면서 극단적 상대주의로 나아갔고 그것은 불행하게도 모든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본주의적 분산성으로 귀결되었다. 보편적인 앎, 진리에 대한 회의에 의해 타자의 이해가능성도 쉽게 포기된다. 결국 개인은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으로 남고, 모든 가치는 다양성의 추구라는 또 다른 이념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도록 강제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흄의 회의주의를 굳이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흄은 인과관계의 필연성을 부정하면서 근대과학의 업적을 붕괴시키는 한편, 자아동일성 또한 부정한다. 그는 영혼 혹은 자아가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논제를 검토한다. 그는 우리는 자아라고 불리는 것을 매 순간마다 직접 의식하며, 그 존재와 존재의 지속성을 느낀다고 생각하며, 그것의 동일성과 단일성에 관해 증명의 명증성 이상으로 확신하는 몇몇 철학자들이 있다”, “만일 어떤 인상이 자아의 관념을 일으킨다면, 그 인상은 우리 삶의 전 과정을 통해서 동일한 것으로 불변적으로 지속되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아란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고 상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항시적이고 불변하는 인상이란 없다고 하면서 자아 관념이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물론, 연장을 가지고 지각하는 존재인 자신조차 지속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라는 관념을 단지 시시각각의 지각다발로 간주하는 이러한 주장은 상식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들 뿐만 아니라 실재론자들, 그리고 형이상학의 문제를 존재의 차원에서 인식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 온 근대의 철학자들, 나아가 모든 과학자들에게는 받아들여서는 안 될 위험한 주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앎의 확실성을 자신의 주관적 의식에서 찾았던 데카르트의 유아론적 철학이 서양 역사에서 타자에 대한 지배와 정복으로 이어졌던 점을 상기해보면, 그러한 데카르트적 자아의 부정이 의미를 갖는 지점이 있지는 않을까?

* 흄 철학에서의 (가정된) 개체들 간 소통 가능성에 관하여

그러나 흄의 이론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그러한 전망이 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먼저 그의 자연주의에 기인한다. 흄이 볼 때 인간은 경험을 넘어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어떤 공간 속에서 물리적 대상들 사이를 오가며 그것들과 더불어 사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우리의 감각기관에 의해 표상된 사물들의 지각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여기에서 표상되는 사물은 존재한다고 가정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의 실존에 대해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흄은 물리적 대상이 존재한다는 우리의 신념을 인정한다. 흄에 따르면, 그러한 신념은 자연이 사전에 (우리의) 마음에 심어놓은것이다. , 그는 자연은 이것-물체의 존재에 관한 원리를 승인하는 것-을 그-인간-의 선택에 맡겨놓지 않았으며, 이것을 의심할 바 없이 너무도 중대한 일로 간주하여, 우리의 불확실한 추론과 사유에 맡겨놓지 않았다고 하면서 우리가 근본 신념들을 믿는 데에는 회피 불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쉽게 말해, 물체의 존재에 관한 원리를 승인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에 달려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러한 점에서 흄은 일면 자연이라는 회피 불가능한 것을 지각의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우리들의 지각활동에 보편성을 부여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실제로 그의 회의주의를 완화시킨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여기서 흄이 말하는 자연은 존재라고 할 수는 없다. 흄은 자신의 여러 저작에서 물체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물음은 헛되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이 헛되다는 근거로서 자연을 제시하는 것은, 차마 물리적 실체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의 본성에 내재된 자연적 상상력을 설명하기 위해서이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연(nature)’이 물리적으로 실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다시 인간의 지각활동이 주관에 머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자연이 실재하지 않으며 단지 지각활동의 조건일 뿐이라면, 인간들은 서로 같은 대상을 보고 지각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60억여 개의 세계가 존재하게 된다. 이점은 근본적으로 주체간의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문제된다. 가령, 나와 나의 친구가 나란히 앉아 하나의 사과를 놓고 그것을 빨갛다라고 지각할 때에, 나는 나의 눈을 통해 사과의 빨간¹’ 인상에서 빨갛다¹’는 관념으로 이동하고, 나의 친구는 그 친구의 눈을 통해 사과의 빨간²’ 인상에서 빨갛다²’는 관념으로 이동한다. 이 때, 우리가 동시에 이 사과는 빨갛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의사소통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의 눈을 통해 표상된 빨간¹’이라는 인상과 친구의 눈을 통해 표상된 빨간²’이라는 인상이 다르기 때문에, 나의 빨갛다¹’는 관념과 친구의 빨갛다²’라는 관념 또한 완전히 다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만 빨갛다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단지 의사소통을 위한 약속으로서 전제될 뿐이며, 여기의 빨갛다라는 두 발화가 동일한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물리적 실체 관념을 인정하지 않는 흄은 지각활동에 대해서 지각을 단순히 개인의 감관에 표상되는 것이라는 현상적 측면에서만 이해하도록 제한하면서, 인간의 인식(흄에서는 지각)을 개인의 주관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여기에서, 근대 합리론에서 문제됐던 유아론의 극복 가능성은 좌절된다.
 

* 흄의 인간철학에서의 신

신에 대한 학문이었던 중세철학을 극복하려고 하면서 등장했던 여러 근대철학에서 신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흄만은 진정으로 중세의 신 중심 철학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실증주의를 조금도 버리지 않고, 순수한 사실성만을 아무런 제한도 없이 인정한다. 즉 감각적인 지각·쾌감·이익, 간단히 말해서 인간만을, 그것도 공간-시간의 관점에서 본 인간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흄의 철학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한정되어 있다.[footnote]서양 철학사(),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2010, p301 참고, 인용.[/footnote] 앞 장에서 살펴봤듯이 흄은 그의 독특한 자연주의에서 파생되었을 (지각에 대한) 심리주의적 설명을 포기하지 않는데, 신이 없는 흄의 철학에서 신에 비견될 만한 개념을 자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로 하여금 인과성, 물리적 대상, 자아와 같은 근본 신념을 갖게 만든 자연은, 그것이 만약 존재라고 상정된다면 신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가 근본 신념을 갖게 된 것은 라이프니츠식의 언어로 말하면 자연의 예정조화라할 수 있지 않을까? 흄은 의식 내용의 중력 같은 것을 설정하려고 했다. 흄은 천체의 운동이 오로지 그 물체적인 질량에 의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념의 운동도 이와 비슷한 법칙, 즉 그렇게 말해도 좋다면, 심리적인 질량의 법칙에 바탕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footnote]서양 철학사(),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2010, p308 참고, 인용.[/footnote] 고대 철학자들이 자연을 능산적 존재로 인식했던 것과 비슷하게 흄의 지각을 도식화한다면(물론 이것은 무리이다), 고대 철학자들의 퓌지스는 흄의 관념의 연합이라는 심리 법칙에 대응될 수 있을 것이고 흄의 심리 법칙은 지각작용의 중핵을 차지하는 절대법칙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 자연주의의 문제의 현재성: 콰인의 이론에서

흄의 자연주의는 현대의 온건한 물리주의에서 그 맥을 이어나간다. 나는 콰인의 평행론에서 흄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흄의 관점에서 추적해보았다. 콰인은 현대 자연주의의 대표자로 일컬어진다. 그는 주체 간의 정신적인 교류라는 의식을 전제하지 않은 채,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해명하려는 언어철학자이다. 콰인은 문장이라는 언어와 신경유입이라는 물질 간의 거리를 의식하면서, 신경유입이라는 물질적 조건에서 언어가 어떻게 창출하는지 설명하였다. 콰인이 흄과 구별되는 지점은, 흄에 의해 그 가능성조차 제거되었던 자연과학의 가능성-물론 학문으로서의 가능성-을 콰인은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 자연과학의 산물들(신경과학, 유전과학 등의 성과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인식의 출발점을 개별 인간의 신경유입’(neural intake)에서 찾음으로써 주관주의에 머무르게 된다. 즉 콰인에게 있어서도 언어의 화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사물은 화자의 세계관 또는 세계구성이론에 의존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세계이론 및 존재론과 동일하거나 비슷하다고 미리 가정할 수 없다.[footnote]콰인의 평행론, 김명석, 한국분석철학회,철학적 분석5, 20026, p95[/footnote] 콰인은 인간들이 신경유입으로부터 학문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공유된 계통과 공유된 환경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콰인이 말하는 환경은 아직 개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막연하고 흐릿한, 무질서한 세계[footnote]콰인의 평행론, 김명석, 한국분석철학회,철학적 분석5, 20026, p105 참고, 인용[/footnote]로서, 흄의 철학에 있어서의 자연의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콰인에게도 그러한 환경이 개인에게 촉발시키는 인상들이 존재로 불리울 뿐이지, 카오스적 세계를 넘어서는 실재란 없어 보인다. 콰인의 이러한 입장은, 이미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흄이 존재의 문제를 자신의 학문에서 제외시켰던 것과 흡사하다. 흄과 콰인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소통의 불가능성은 물리적 대상을 인정하지 않는 둘의 공통된 입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주체가 반응하는 바로 그 원인이 고정되지 못하는 한, 그의 반응은 아무런 [특정한] 내용(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 주체가 타자와 공동으로 반응하는 바로 그 공통원인을 감지하고, ‘그 자극이 공통 공간 내 객관적 위치를 가”[footnote]콰인의 평행론, 김명석, 한국분석철학회,철학적 분석5, 20026, p108[/footnote]질 때, 즉 선형 인식론에서 벗어날 때만이 진정한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이라는 언어철학적인 입장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흄의 자연주의에는 세계 안에서의 소통을 위해, 물리적 실재와 자아에 대한 최소한의 논의와, 그러한 기초 관념에 대한 인정이 요구된다할 수 있을 것 같다.

 

* 맺으며

많은 논자들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자명한 것을 지식의 토대로 하고 그 위에 학문을 세우려는 근대 인식론의 기본 틀은, 토대가 되는 자명한 것을 개인의 주관적인 요소에서 찾음으로써 맹목적인 자기중심주의로 빠져들었다. 신으로 대표되는, 참과 거짓 모두 가정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지식을 좇던 인간을 미몽에서 깨게 하고 오로지 개연성으로서의 학문만을 인정했던 흄의 심리주의적 기획도, 그의 자연주의적 회의주의(내가 그렇게 이름붙였다)와 더불어 현대의 고질적인 개인주의적 병폐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흄은 피론주의와 같이 극단적인 회의주의로 나아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탐구를 행할 때 어느 정도의 의심과 조심, 그리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사려 깊은 철학자였다. 그는 단지 우리의 탐구를 인간 이해력의 좁은 능력에 적절히 들어맞는 주제들에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흄의 회의주의는 아주 건실한 것으로서 그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학문의 기초적인 태도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신에게서 해방되어야 했던, 혹은 이성적 환상에서 해방되어야했던 중세 말근대와 현재의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 현대의 모든 분야에 깊숙이 스며든 회의주의는 극단적인 유물론과 나란히 붙어 냉소주의를 야기하였다.(어차피, 인생은 별 거 없다.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 네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다 네 몸의 신진대사의 일일 뿐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즐겨라! /또는, 인간은 원래 생식을 통해 후세에 자기 유전자를 전달하는 데 목매는 존재일 뿐이다. 더 나은 유전자를 위해 더 우월한 수컷 혹은 암컷을 차지하려는 경쟁에 뛰어들어라. 그것은 죄가 아니다.) 회의주의가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라는 근대의 우려는, 냉소주의가 세계를 파국으로 몰 것이라는 현대 철학자들의 비판의 목소리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 가열 차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고무적이다. 타성에 의지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사유했던 흄의 회의주의 정신을 보존하면서, 실체와 주체를 새로 고민하는 일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줄을 나는 믿는다.




* 참고문헌
- 단행본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 서양근대철학회, 창비
『서양 철학사(下)』,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2010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D. 흄/  옮김, 출판사,
『형이상학』, W.H. 월쉬/ 이한우 옮김, 문예출판사, 1990
『흄』(누구나철학총서 004), 최희봉, 이룸, 2004
『흄』(철학의샘을만든사람들 7), A. 플류/ 최희봉 옮김, 지성의 샘, 1996
『흄의 철학』, A.J. 에이어/서정선 옮김, 서광사, 1987

- 논문
<콰인의 평행론>, 김명석, 한국분석철학회,『철학적 분석』제5호, 2002년 6월

2011/04/10 22:04 2011/04/10 22:04
  1. Plutonian
    2011/04/10 22:25
    지난 해 <뜻깊은>에서 클라라 선생님의 논문을 읽고 흄과 연관해서 썼던 글입니다.
    제가 흄은 물론이고 선생님의 논문을 곡해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_-;
    그러나 우선 올려요. 그 어느 때보다도 지적을 환영합니다. ㅠㅠ
Leave a Comment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벽에 아무렇게나 붙여졌다가 떨어진 광고 조각들.
(출처는 http://www.flickr.com/photos/48553010@N00/373118872/.
구글에서 "Randomness is hard to achieve“로 검색해 찾았다.)



   『미학의 기본개념사』에서 타타르키비츠는 “예술이 속한 일반적인 범주는 한 번도 의문시된 적이 없었는데, 그 범주는 예술이 하나의 의식적인 인간 활동이라는 것이다”(44페이지)라거나, “예술이…인간의 행위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더구나 예술은 우연한 반영이거나 우연한 소산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이다. (다 빈치의 예를 들면) 젖은 스폰지를 벽에 던져서 생기는 아름다운 모양은 분명히 예술작품이 아니다.”(55페이지)라고 말한다. 타타르키비츠의 말대로 우연의 소산을 예술‘작품’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우연성을 표현하려는 예술가조차 그것을 계획하거나, 최소한 우연의 소산을 특정한 방식으로 내보이기는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혼돈chaos 속의 질서-조화-cosmos’를 나타내는 카오스모스chaosmos라는 표현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의식적인 행위만이 미‘적的’일까? 여기에서 특히 내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무작위(randomness)’ 그 자체다.

    무의식을 드러내는 꿈에 대해 그린 영화 <수면의 과학>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 모형을 장식하면서 물결 모양을 만드는 동안 주인공은 “Randomness is hard to achieve."라고 말한다. 아, 어찌나 공감했던지! 어떠한 규칙도 배제하려는 몸부림은 종종 어떤 규칙성에 압도되고 마는 것 같다. 위의 사진과 같은 광경을 생각해보라. 저런 임의성은 두 번 다시 재현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저 아름답지 못한 모습에 쉽게 매혹된다. CD 플레이어를 무작위 모드로 맞춰놓고 음악을 듣다가 같은 곡이 연속해서 재생될 때-그건 몇 년에 한 번 정도 경험하는 일이지만-나는 전율한다.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듯한 모양으로 머리를 묶었을 때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고 아름답지만, 좀처럼 그 모양을 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기존의 규칙을 벗어나는 것들, 그러면서도 순간적인 것들에 대해 전율하고 아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작년에 프랑스 68혁명에 대해 공부하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우연히 나타나 모두를 놀라게 하고는 순간적으로 폭발해 사라졌던 68혁명의 공동체. 모두가 그 혁명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때 그것이 다시는 그대로 재현될 수 없다는 사실, 그것이 똑같이 의도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멜랑콜리한 기분에 젖어들었던 기억이 난다. 의도되지 않지만 돌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거기에는 어떤 예술적 기분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데 얼마 전, "세계의 총체성이 이미 의식 속에서조차, 다시 말해 인식의 재구성 작업에서조차 허상일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시대에 존재의 우연성을 극복하고 그 단단한 실재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형이상학적 이념과 총체성에의 추구는 바로 허위의식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다"[footnote]김영옥, <해체적 글쓰기의 실천적 한계―최수철論>, 1994[/footnote]는 벤야민의 진단을 설명하면서 한 선생님께서는 “총체성을 추구할 수 없는 지금의 시대에 우연성을, 우연성이라도 잡아보려는 그 시도가 서글픈 것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곱씹어본 후에 나는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쩌면 질서를 미끄러져 내리는 순간 그 자체가 비극인 게 아니라, 그것이 미끄러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질서가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 억압적이고 반인간적인 것이라는 상황이 비극적인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섬멸해버린 68혁명의 공동체이든, 그 자체로 파편인 채로 여기저기 흩날리고 있는 예술표현들이든, 민주화를 열망하여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봉기이든 그것들을 재사유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것. 우연히, 단발적으로 찍힌 점들을 지속으로서 잇는 것, 즉 사건 후(後)를 살아내는 것이다. 기계가 만들어내는 불완전한 무작위에 전율해도 좋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빗어 올린 머리 모양에 탄성을 질러도 좋고, 아무래도 좋다. 피해야만 하는 것은 단 한 가지, 그대로 두는 것이다. 과거를 몽땅 지워버리거나 너무도 드라이하게 '현재'의 쾌락에 젖어드는 것은 분명 좀 더 쉬운 선택일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2011/04/04 00:23 2011/04/04 00:23
  1. 노소영
    2011/04/07 10:15
    호!
  2. redshad
    2011/04/26 20:47
    재사유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것. 우연히, 단발적으로 찍힌 점들을 지속으로서 잇는 것, 즉 사건 후(後)를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뭐라고 생각하세요?
    • Plutonian
      2011/04/27 00:33
      68혁명이나, 예술작품의 탄생이나, 봉기들이 사건이라면 재사유는 잊혀져가거나, 충분히 인식되지 못한 사건들의 가치에 대해 다시금 조사enqu te하고 그 가치가 현실 상황에 충분히 반영되고 있는가(이를테면 4.19 혁명이라는 사건은 헌법 전문에 기입되어 헌법의 이념적 기초가 되었지요.) 살펴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신문의 언어로 대표되는 정보 전달을 넘어서 화자의 흔적을 남기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은 벤야민의 모티프를 인용한 거예요.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가 하는 것처럼, 일어난 사건의 순수한 내용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이야기는 사건을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보고자의 삶 속으로 침투시키는데, 그것은 그 사건을 듣는 청중에게 경험으로 함께 전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도자기에 도공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게 된다."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대중매체에 의해 사건의 전달을 들을 때 그것이 나와 멀리 떨어진 어떤 곳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여겨지고 통계나 수치를 통해 인식되는 것처럼 파편적으로 내게 다가오더라도 그러한 전달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도공의 손자국을 찾는 작업과 같이]사건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사유하려는 노력 정도로, 저는 생각했어요. ("이슬람 세력이 테러를 자행했다"라는 보도를 접하면, 그 이면의 권력관계, 충돌하는 두 집단간의 내력, '테러'라는 용어가 선택된 이유 등을 생각해보는 것이 아주 거친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우연히, 단발적으로 찍힌 점들을 지속으로서 잇는 것'은 사실 바디우의 "주체의 후사건적 실천"을 이야기한 건데요, 바디우가 억압적인 진리를 거부하려는 노력으로 진리의 우연성, 도래함을 강조했기 때문에 벤야민이 지적한대로 총체성을 추구하지 못하고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는 지금 상황과, 사건을 통해 우연하게 다가오는 진리, 그리고 그 진리를 위해 헌신하는 주체의 노력이 애석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많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둘을 같이 이어봤습니다. 고전시대에서처럼 진리를 신, 교회, 국가와 같은 '중심'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단발적인 사건(예를 들어, 민주주의 혁명이라든지 노동자 봉기라든지 그런 사건이요)을 통해 진리를 인식하게 되는데, 사건은 일회적이기 때문에 그 사건이 보여주었던 진리가 체계에 수용될 수 있도록 부단히 애써야하고(자꾸 사건을 주위에 알리고, 캠페인을 벌이고, 법 같은 체계가 변화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겠죠), 그렇지 않으면 진리는 힘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신이나 국가라는 실체가 먼저 존재하고, 내가 그들에 따르기만하면 진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은 더 고단하고 힘들 수밖에 없다고 전 봤어요.

      설명이 더 장황한 것 같아 미안해지네요.
Leave a Comment

사진, 얼굴.

2011/03/28 02:01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필자의 사적인 사연이 다량 포함돼있는 글이니, 이런 글이 불편하신 분들은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엄마가 섧게 회상하시기를 아버지는 그의 할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우리 자매들을 엄마에게 떠넘기고 주말마다 사진기를 달랑 매고 이곳저곳으로 유랑을 다니셨단다. 그래서 엄마는 아버지의 그 '고상한' 취미생활에 늘 반감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 불안이기도 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공백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중매로 엄마를 만나 30년 가까이를 살아오면서도 한 번도 엄마에게 잡히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만 아는 깊은 서랍 속까지 샅샅이 뒤져봤던 것도 아니지만 내 기억에 아버지의 필름 안에 현상된 것은 꽃, 꽃, 꽃, 그리고 산뿐이었다. 아버지는 그 때 무엇으로부터인지 도망치고 싶었던 게 분명하나, 적어도 완전히 어디론가 떠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 여행길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야말로 '무진霧津'과 같은 데라도 들러, 게서 만난 작부와 진탕 마시고 즐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럴 위인이 못 돼서 라기보다는 집을 떠났어도 완전한 밤이 되기 전에는 돌아와야 할 운명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그 때 많은 여자들의 보호자였다.) 아버지의 사진에는 끔찍하리만큼 접사돼있는 할미꽃이라거나 부슬부슬 비 내리는 언덕 위의 무성한 풀들 따위의 소박한 자연이 담겨있었다. 그가 그것들을 보고 혼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가 수줍고 상념 많은 사내였고 그에게 사진이란 갑갑한 현실 속에서 구하려 들었던 자기 혼자의 자리였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의 취미생활은 그의 필름이 점점 나와 내 동생들의 얼굴로 가득 채워지게 되면서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아갔다.

왜 그러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스무살 무렵에 나도 역시 아버지처럼 사진기를 손에 들고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사진은 아버지의 그것과는 아주 달랐다. 나는 처음부터 사람들과 함께했다. 모 문화센터서 만난 '어른들'과 함께 밤 늦도록 술을 마시고, 사람들이 흔히 '세상 돌아가는 얘기'라고 하는 이야기도 나누고, 그들 각색의 직업들과 그 숱한 에피소드에 대해 들으면서, 젊음을 담보로 무수한 응원과 넘치는 격려를 받으며 삶에 취해드는 것도 같았다. 그네들의 남편과, 아내와, 아이와, 형형한 세상살이가 사진에 담겨 쏟아져 나왔고 늘 같을 수밖에 없는 일상에 대해 푸념하다가도 결국은 삶의 소소한 행복에 경탄해마지않는 분위기 가운데, 나 또한 어지간히 거기에 동의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시기에 나는 유럽의 어느 도시와 서울 각각의 여러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같은 주제로 쌍쌍이 묶어 인간 삶의 보편성과 소박한 일상에의 만족이라는, 프로파간다 쩌는 작품을 내걸고 학점을 받아가는 선량한 학생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랜 사진 강좌가 끝나고 그제서야 홀로 뭘 찍어보겠다고 나갔을 때, 나는 내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 하나도 찍을 수 없다는 불편한 현실과 마주하고 말았다. 불편한 것은 분명 얼굴이었다. 유행하는 비슷한 옷을 입고, 나이에 맞는 말투를 쓰면 서로 간에 엇비슷해 보이는 그런 '서울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정말 마주치기 불편한 누군가의 얼굴. 맞다. 타인의 얼굴은 불편하다. 운이 좋아 지하철 좌석에 앉으면 어쩔 수 없이 이따금씩 상대편에 앉은 타인의 얼굴을 마주쳐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잠깐의 마주침에도 쉽게 불쾌해지는 판에, 사진 속에 우연히 기입돼 버린 타인의 얼굴을 참아내는 일은 그야말로 곤욕이었다. 왜 불편한 것일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얼굴들이라서? 글쎄, 문제는 그리 단순한 것 같지 않다. 나는 표정 넘치는 타인의 얼굴, 거기에 서려 있는 그들의 모든 역사와 사연들을 다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고작 프레임을 구성하고, 조리개를 열고, 셔터를 누르는 작은 수고로움으로 타인의 모든 것을 훔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면 그건 좀 망상 같다고 말할 줄을 안다. 그러나 얼굴이 그냥 얼굴이기만 한 것일까. 나는 흡사 너무 많은 걸 입에 넣어서 볼이 불룩해진 다람쥐처럼 감당하지도 못할 것들을 죄다 집어들고 겁을 내고 있었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타인의 허락 없이 그들의 생활을 내 사진에 담아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도시인들의 합의가 나를 불편했을 뿐이라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딱히 반박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그런 합리성에 너무나도 길들여 있는 도시여자라서;; 내 고민이 실은 이기주의나 아니면 조금 양보해서 개인주의의 발로일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엔 단순한 합의나 규칙의 문제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나는 항변하고 싶다.

단지 사진의 결과물들을 보는 것에서만 문제가 발생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얼굴의 문제는 사진의 중요한 화두, '무엇을 찍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돼 있었다. 내가 사진을 배우던 때에 사람들이 찍은 사진에 자주 등장했던 소재가 있었는데, 바로 낡은 건물과 지긋한 나이를 자랑하기라도 하듯 주름투성이인 노인의 얼굴이었다. 이제 곧 철거될 예정이라는 옛날식 아파트가 사진에 기입될 때에 그곳에서 살고 있는 구체적인 개인들의 삶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분리돼 나가고, 사진은 기껏해야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비슷한 무언가를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중요한 점은 노인의 얼굴마저도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사진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자신의 사진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지만 그 누구도 감상주의에서 벗어날 만한 작품의 설명을 해내지는 못했다. 이런 식으로 타인의 삶, 기쁨 뿐 아니라 절망과 슬픔, 더 나아가서는 가난까지도 대상화됐다. 예술 사진가들 역시 똑같이 그런 활동들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분명히 그것은 소비의 징조- 혹은 징후-이기도 했다. 알량한 휴머니즘이 소비와 자아내는 불협화현不協和絃. 나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사진 찍는 취미를 그만 둔 것은 결국 얼굴 때문이었다.

나는 어쩌면 명백한 아버지의 딸로서, 처음부터 아버지가 사진에서 기대했던 것과 같은 것을 찾았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 나는 사진에 기대를 걸었었다. 산에 핀 야생화들을 살펴보는 방식이 아니라, 수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살피면서도 홀로 생각하는 자리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타인의 얼굴을 포착해버리는 사진에서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지금은 그저 한 발 뒤로 물러나, 사람들의 정체성이 사진에 결핍되거나 아예 결여돼버리는 지점까지 가서 셔터를 누르곤 한다. 그러나 '찍는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내 사진도 산이나 계곡, 돌, 결국은 꽃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혹시, 가족이나 지인을 지속적으로 찍는 것으로 개인적인 기록을 넘어서는 어떤 중요한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걸까? 모르겠다. 사진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2011/03/28 02:01 2011/03/28 02:01
  1. 지나가던 울렁각시
    2011/06/26 16:58
    고등학교때 퓰리쳐상 수상사진을 봤던 기억이 나네요. 아사 직전의 기아아동과 그를 노리는 독수리 사진이라던가 내전에서 핏발선 눈으로 서로를 겨누고 있는 초등학생 또래의 소년병들 사진들이었는데, 깊은 울림을 받으면서도 피사체를 발견하고는 "안돼~ 아가야!" 달려가기 앞서 셔터를 눌렀을 사진작가들이 너무 혐오스러웠어요. 아마 세상에 측은지심이 가득한 작가들만 있다면 우리 절대 저런 작품들을 못볼텐데도 말이죠.
    사진 강좌가 남긴 비슷비슷한 감상주의의 사진들은 "영원속에 소박한 저항을 새기기엔" 너무 소심하고 순박한 소시민들의 작품이었기에 그럴꺼라고 생각해요. (기성작가의 상당수도 여전히 저런 감성을 지니고 있구요) 감정을 죽이고 모델을 대상화하기 앞서 죄책감과 불편함이 먼저 발동해버리는 보통 사람들의 감성을 알량한 휴머니즘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순간을 믿고 싶은 욕망과 '찍는다'는 죄의식 사이에서 어렵게 도출한 타협점이라는 점에서, 알량하다기보다는 현실적인-가장 보통의- 휴머니즘은 아닐까해요. 프로작가처럼 모델을 완전 대상화할만큼 뻔뻔하지도 못하면서, 사진기를 던져버리고 타인의 서글픈 삶에 헌신할만큼 휴머니스트도 아니면서, 부양에 대한 책임감, 생계에 대한 걱정, 안정적 삶에 대한 욕망을 떨쳐버릴만큼 부유하지도 못하면서 작품은 남기고 싶은,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지 못한체 갈팡질팡 아등바등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그저그런 휴머니즘이니까요. 거기에 사치스런 취미로 소문난 "사진"을 찍기위한 소비가 만나니 불편한건 당연한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만은 피해야하는" 우리들이기에 조심스럽게 담아낸 플루토니안 님의 사진도 이런 글만큼이나 기대가 되네요.>_<
Leave a Comment

* ‘같음’의 여성주의, 그리고 ‘다름’의 여성주의. 그 경계에는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 그리고 정신분석가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서 있다. 이 글에서는『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노엘 맥아피 지음)의 내용을 기초로 하여 여성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고민해보려고 한다.

   여성주의가 이른바 패션(fashion)화 된 지는 이미 오래다. 많은 사람들이 소수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분배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치장하려는 목적으로 여성주의를 사용한다. 대부분 자유주의적 여성주의의 노선에 서 있는 이들은 단순히 성별 지위의 우열을 전복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위계질서를 재평가하거나 변화시키지 않고, 단지 여성이 그 질서에 편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이 1세대 여성주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노선에 따르면 소수의 특권 받은 여성만이 자신의 위치를 옮겨갈 수 있을 뿐 억압적인 구조는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같음’을 강조하는 1세대 여성주의자들의 노력은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나는 여성의 ‘가능성’의 범위를 넓혔다는 점에서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권력 질서 안으로 들어간 여성이 이미 억압받고 있는 여성들의 처우를 고려하지 않고 그 체계를 더욱 공고화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 질서 내에 여성이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여성이 한 가지 모습-수동적, 피지배적, 순종적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1세대 여성주의인 무비판적 전도의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2세대 여성주의자들은 "권력과 언어, 의미 등에 남녀 각자가 맺는 관계와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명백하게 하(Kristeva)”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성차별적인 구조 그 자체에 저항하며 남성/여성, 이성/감정, 문명/자연과 같은 이분법적 구도를 타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른바 ‘시원적 여성’이라는 힘을 강조하면서 역시 성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논리로 나아가거나(붉은 여단에 가담한 경우), 모성을 신화화하고 여성들에게 욕망의 승화, 금욕을 요구함으로써 마조히즘적인 여성주의로 치달아갔다(‘어머니의 희생은 위대하다!’). 여성성을 온화함, 조화, 평화로움 등으로 환원하는 에코페미니즘의 입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여기에서 1세대의 ‘같음’의 여성주의, 2세대의 ‘다름’의 여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여성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려한다. 크리스테바는 여성을 불침번 서는 국외자로 보는 관점을 옹호한다.

권력과 언어에서 배제되었다고 해도, 그녀는 그것들을 작동하게 하는 숨겨진, 보이지 않는 요소를 소유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부정성과 공격성의 원천이 되고, 그 권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그것과 싸울 수 있다.(Kristeva)

나는 여성을 회복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보는 관점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을 원하는 미국의 어떤 여성주의자들은 그러한 관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변화의 동력인 이 영원한 주변성으로 시작하여 긍정적인 개념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성성이란, 달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태양의 반대라는 점에서 바로 이 달의 형태와 같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 여성이 남성보다 주변성을 더 많이 소유할지는 몰라도, 남성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화해시킬 수 없는 이 부분을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우리는 아마도 항상 헤겔이 말한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일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공동체가 폐쇄적이지 않도록 하고, 동질적이고 그래서 억압적이지 않도록 하는 불침번일 수 있다. 즉, 나는 여성의 역할을 일종의 불침번, 이질성, 그래서 항상 감시하고 경쟁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Kristeva)

그는 ‘정체성’ 자체가 도전받는 요즈음의 철학적 흐름 속에서 성적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정체성' 개념 자체가 도전받는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공간에서 '정체성', 특히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단지 양성성bisexuality을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양성성은 가장 자주 전체성에 대한 욕망, 차이의 근절 욕망을 드러낸다. 나는 더 특수하게 경쟁 집단 사이에 '종결되어야 할 싸움'을 완화시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화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여성주의가 사회적 계약에서 변형될 수 없고 치명적인 것을 폭로한다고 칭송받을 수 있기 때문에, 폭력이 타자의 거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이고 성적인 정체성 내부에 있는 최대한의 운동성으로 발생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Kristeva)

크리스테바는 특히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통해 자신 안의 타자인 아이, 즉 내부의 이질성을 포옹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고 설명한다.

임신과 진통이 여성의 상징적 위치를 불안정하게 한다고 해도, 그 경험은 여성에게 "사회가 재생산되고 안정된 가족의 항구성이 유지되도록 하는 사회의 궁극적인 보증"이 되는 길을 제공하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것이 된다.(Kristeva)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어려움은 모성성을 마조히즘적이지 않으면서 만족스러운 것으로 재현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서 커다란 의문이 내게 일었다. 임신을 통해 여성이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여성의 육체와 출산의 생물학적 기능을 동일시하는 근본주의적인 입장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회의 재생산’과 ‘안정된 가족의 항구성’을 핑계로 여성을 다시 가정, 양육, 희생에 옭아매는 보수주의의 입장과는 어떤 점에서 차별화되는가? 이러한 입장은 또 다시 ‘시원적 여성’을 낭만화하는 것이 아닌가? 특정 단어에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크리스테바의 방법으로 '모성성을 마조히즘적이지 않으면서 만족스러운 것으로 재현'할 수 있는가? 크리스테바는 정치적인 문제를 일반적인 담론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보고 미시적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는데, 이 방법은 확실히 신화화되지 않은 모성적 경험을 강조하는 크리스테바의 입장을 커버하는 데 좋은 전략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의 입장에 따를 때에 미시적 접근만이 허용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크리스테바는 구조를 회피하는 대신에 그것을 내면화하고 자신의 내부에서 ‘사회심리적인 계약의 근본적인 분리’를 보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처음에는 참으로 모욕적인 "해답", 구조의 경쟁자들을 내면화하는 것이 어떻게 구조를 변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란 물음에 대한 해답인 것처럼 보인다. 크리스테바는 이 과정이 먼저 각 사람의 '정체성'이 다양한 민족적·종교적·성적·직업적·정치적인 동일시들을 짜깁기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이 과정은 각 사람에게 책임을 지울 것이다. '나는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의 지지할 수 없는 정체성의 토대가 되는 분리를 계속 분석해야 한다.'(Kristeva) 우리는 우리 각자가 사회상징적인 계약 '덕분에' 정체성(자아의 의미)을 가지는 한, 우리 각자는 그 모든 비열한 행위들에 연루된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상상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희생적 질서를 지각하고, 그리하여 그 질서의 추종자들 각자에게 지워진 짐의 일부를 보유한 윤리학을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상상계는 그 질서의 추종자들에게 그들이 죄를 짓고 있으며 책임을 져야 한다고 판결 내린다. (Kristeva)

그러나 책의 저자 노엘 맥아피가 지적하듯이, 크리스테바는 새로운 여성주의적 대안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만 암시한다. 그것은 “두 성의 차이를 인정하고, 각자의, 그리고 결국엔 여성의 진정한 만족을 추구하며 두 성의 양립할 수 없는 이해관계와, 환원될 수 없는 것을 승인하는 데로 이끌어갈(Kristeva)” 분석과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선택이다. 두 성의 차이를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선택 말이다. 만약 두 성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크리스테바의 입장을 따라서 논의를 더 전개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와 반대라면 크리스테바에 대항하게 될 것이다.

   성적 행위에 대한 반응에는 상대성이 있기에 성범죄의 성립 여부를 가리는 데엔 난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성희롱을 “당하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면 성희롱”이라고 정의하려는 안이함과 상대주의적 사고에 나는 늘 불편했다. 스스로를 항구적인 희생자의 자리에 앉혀놓는 이런 태도는 어떤 소통도 없이 내면으로 침잠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이런 고민 속에서 크리스테바의 기획은 사실 매우 매력적이게 보인다. 그는 우리가 구조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만 없이 응시하고 ‘타자는 나에게 낯선 악도 아니고 외부의 희생양, 즉 또 다른 성, 계급, 인종이나 국가 등이 아니’며, ‘나는 ‘공격자인 동시에 희생자’이고, 동일자이자 타자이고, 자기동일적 존재이자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크리스테바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더 천천히 고민해 봐야할 것이지만 여성주의가 다시 한 번 도전받게 된 지금의 상황에서 성차, 주변성, 타자의 문제를 새로 생각하기 위해 선입견 없이 그의 의견에 주목해보는 일은 유익한 일일 것 같다.

2011/03/14 01:52 2011/03/14 01:52
Leave a Comment


   “자연 현상은 존재 법칙에 따르며, 몰가치적이다. 그러나 사회·문화 현상은 당위 법칙이 지배하며, 가치 함축적이다.” 고등학교 사회·문화 시간에 반복되고 또 반복됐던 말이다. 이 얼마나 납득이 가는 설명인가. (사실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의심해 봐야 할 명제라고 생각했다.) 소심한 인문계 학생이었던 나는 일찍이 어깨가 무겁다는 것을 느꼈다. ‘당위? 가치? 나는 그런 것들을 판단할 능력이 있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인권’, ‘정의’, ‘더 나은 세상’과 같은 단어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전공과목 시간에 ‘맥브라이드 기준표(주 1.)’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기함을 치며 쓸쓸히 강의실을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 때에 나는 법과 관련된 많은 것들 중에 나를 만족시켜줄 만한 것들만 꼽아 법에 관한 관념을 만들어냈던 것 같고, 아마 그런 관념을 가지고 공상만 하다가 호되게 당했던 것이리라. 물론 맥브라이드 기준표에 남은 것은 수(數)였다. 나는 그 때 팔이 절단된 노동자의 고통과 상실감, 그 사건을 통해 변하게 될 그의 삶-여기서 변하는 삶이란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삶의 외형이 아니라, 그런 상황들로 구성되는 실제 삶이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런 상황을 자대고 자르듯 재단하는 것이 법의 일인가? 재단자들은 그 과정에서 가치를 고려하기는 하는가? 나는 인문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법학이 사회‘과학’으로 전환하려하는 몸짓을 목도하고 적잖이 당황했었다. 그러나 뒤늦게 내가 깨달은 것은 기준표를 훨씬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상, 가치를 떠나서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가치를 향한 일이기도 하다. 법이 단지 효율성만을 위해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려할 때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고통 받는 그의 삶을 회복시키고 다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불편한 마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그 때 내가 보다 의연하고 현명한 학생이었더라면 금세 마음을 추스르고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금은 이따금씩 든다.

   그러나 법은 수와 형식적 논리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하다. 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법학자는 ‘법은 스스로의 체계와 논리로서 존재한다.’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러나 자연법주의(주 2.)자이든, 법현실주의(주 3.)자이든, 사회학적 법학(주 4.)을 지지하는 사람이든 간에 대부분은 실정법이 그 스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있는 법(실정법)을 주어진 문언적 체계로 보고, 그 한계 내에서만 엄격하게 법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덫에 걸리게 된다. 법이긴 법이되, 법이 아닌 법이라는 덫. 여기에서 프레게의 논의를 상기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프레게는 ‘기호는 대상을 지시할 뿐 아니라, 의미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언어가 단순히 사물을 가리키기만 할 뿐 아니라, 물자체를 불러낸다는 뜻이다. 그는 의미를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모두 동일한 지시물(즉, 금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둘은 의미가 다르다. “샛별”은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을 가리키는 말인 반면, “개밥바라기”는 저녁, 서쪽 하늘에 나타나는 주위 다른 별들보다 밝은 물체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둘은 단순히 태양계의 한 행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프레게는 '한 표현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그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을 인식하는 한 방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법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작년에 나는 한 언론의 보도를 보고 소위 말하듯 ‘빵 터져’버렸다. 그 보도에서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 어린이 두 명이 과자 한 개를 훔쳐 먹은 것에 ‘특수절도’라는 죄명을 붙여 경찰서에 인계한 경찰에 대한 제보가 소개됐다. 물론 너무도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라 ‘초등학생들을 인계한 그 치는 특수절도죄의 의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어!’ 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러한 폐단을 야기한 부당한 실적주의를 용인하는 데엔 법 문언을 문언 그대로 취급하려는 사법부의 법실증주의적 태도가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초대형 기업의 수뇌부나 정치인이 거액의 뇌물을 수수하고도 대가성이 없었다고 무죄로 풀려나고, 노동운동에 참여한 시민이 체포에 저항하며 했던 몸부림 때문에 상해죄로 처벌받는 것은 모두 법실증주의의 비호 아래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실증주의는 나쁜 것은 아니다. 각종 비릿한 유대들, 신화적·환상적 관계들이 인간을 억압할 때, 실증주의는 해방의 유용한 통로가 되어줄 수 있다. (가령, 법을 주권자의 명령으로 보는 법명령설에 따를 때 인민이 겪을 고통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실증주의를 재-신화화할 때 생겨난다. 혹은, 그것을 신화화하고 싶은 누군가에 의해 생겨난다. 법과 정의 사이에서,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언어와 대상 사이에서 우리가 늘 고민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주 1. 맥브라이드 기준표란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고로 인해 상실된 노동능력에 비례해 손해배상액을 책정하기 위해 만든 표로, 부위별(?)로 신체 능력이 상실된 정도를 구체화·수치화해놓고 있다. 미국의 정형외과의사인 맥브라이드가 1936년에 만들었다.

주 2. 인위적인 실정법(實定法) 외에, 또는 그 위에 입법자의 의사를 초월하는 가치기준으로서의 자연법을 생각하는 법사상.

주 3. 법실증주의가 법이 사회현상의 하나이며 전체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만 그 본질과 기능이 제대로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도외시한다는 비난을 면하지 못하자, 법실증주의가 법체계를 다른 사회적 요소와 분리하여 독자적인 체계로 이해하는 것을 반대하여 법사회학, 사회학적 법학과 법현실주의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법현실주의는 법률실증주의의 공식적인 법체계에 대한 회의주의를 표명하고 법의 실제에 대한 리얼리즘을 강조한다.
[출처: 사회학적 법학과 법현실주의의 의의와 내용 |작성자 제3노총 (
http://blog.naver.com/cadline)]

주 4. 사회학적 법학에서는 공식적인 법규범에 구애되지 않고 사회현실 속에 살아 있는 규범(사회적 유동성)을 중시하며 사회의 필요와 사회적 맥락에 맞는 법을 발견하기 위해 사회학적 법학방법론을 취한다. [출처는 주 3.과 같음.]

2011/03/06 18:47 2011/03/06 18:47
  1. Plutonian
    2011/03/06 19:35
    헛소리한 것들 지적해주세요. 특히 프레게 얘기한 부분(..)
    참, 참고문헌으로 클라라 선생님 <뜻깊은> 강의록 활용했음을 밝힙니다.
Leave a Comment
블로그이미지
About
생각실험실

모든 생각은, 그것이 긍정적 생각이든 회의적 생각이든, 내부에 관한 생각이든 외부에 관한 생각이든, 객관적 진리 개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개념은 오직 타자와 의사소통 중에 있는 피조물들만 접근할 수 있다. 앎의 획득은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에 기초해 있지 않다. 앎의 획득은 전체론적으로 생기며, 그것은 처음부터 상호인간적이다. 데이빗슨의 <외부주의 인식론>에서.

Recent Trackback

244039
Today : 168   Yesterday : 86
rss 구독하기
Textc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