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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수꾼"은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으로 2011년 3월 발표되었다. 10대 소년들의 우정이 사소한 엇나감으로 틀어지게 되고 종국에는 한 친구의 자살로까지 치닫게 되는 스토리를 갖는다. 영화는 초반에 죽은 아이의 아버지를 등장시켜 아무런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의 원인을 밝혀나가는 역시간의 구조를 취한다. 관객은 감독의 계획된 의도에 따라 어째서 한 친구가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를 탐정 노릇을 하며 재구성해 나가게 된다. 이 영화는 상처를 딛고 그를 통해 성장해 나간다는 전형적인 청춘영화와는 다르다. 인물들의 고정되지 않은 캐릭터, 대사, 장면의 전환, 프레임의 구성, 내러티브 방식에서 전형적인 장르 영화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파수꾼의 주제를 '소통의 부재'로 꼽을 것이다. 이것은 비단 미성숙한 고등학생의 문제일 뿐 아니라 파편화된 현대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인간관계에서 관철되는 양상이다. 필자는 이 주제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의 독특한 플롯의 구조와 특유의 미감을 유발시키는 씬의 연출방법에 집중할 것이다. 이 글에서 파수꾼의 연출기법과 내러티브 방식에 착안하여 영화의 주제와 얼마나 조응하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롱샷은 감독이 장소를 설정해서 관객에게 배경을 확인시키고 그 배경 속에서 등장인물들간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카메라 쇼트이다. 이 영화에서 롱샷은 주로 아파트, 학교, 기찻길 등 영화의 주된 공간적 배경을 보여주는 데 쓰였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의문의 한 인물이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는 장면이다. 그 후 이어지는 장면은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아파트의 외관을 해질녘 우울한 빛으로 제시된다. 아파트는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거주 형태로 '고립된 공간'을 표상한다. 영화 초반부터 롱샷으로 제시된 배경은 전반적인 분위기와 상황을 효율적으로 관객에게 노출시킨다. 학교는 세 주인공의 주된 활동 장소이며, 기찻길은 그들의 우정을 표상하는 공간이다.

반면,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이 영화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클로즈업을 남발한다. 카메라는 배우들의 미세한 안면 근육과 눈빛을 확대하여 보여주고, 보는 이로 하여금 섬세한 표정 변화, 머뭇거리는 입술, 폭발하기 직전의 불안함 등을 포착하도록 유도한다. 관객은 인물의 동작, 사물 등이 크게 나타나면 즉각 화면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 동기가 강력하면 할수록 클로즈업은 놀라움과 충격으로 다가온다. 클로즈업은 인물들의 감정 위주로 구성된 씬에서 내용에 하이라이트를 마련한다. 주인공인 기태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드러낼 때 얼마나 서투른지를, 상대방에게 의사를 전달할 때 소통할 언어를 잃어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한다는 것을 관객은 클로즈업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기태가 무섭게 폭발하기 전에 보이는 미세한 안면근육의 떨림은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다. 그에 반해 대체적으로 안정된 표정을 보이는 동윤은 성숙한 내면의 소유자임을 암시한다. 기태와 희준 사이에 생긴 갈등을 중재하려고 친구들에게 대화를 시도할 때, 소통의 손길을 내미는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친구를 걱정하는 표정이 담겨있다. 희준은 보경의 문제로 기태에게 꽁할 때부터 소통을 거부하는 그의 태도와 함께 안색까지도 카메라는 밀착해서 포착한다.

저예산으로 제작되었기에 세트를 제작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실제 아파트의 내부공간을 촬영할 때에는 핸드 헬드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대부분이 핸드 헬드로 촬영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히 감독이 특수한 의도를 가지고 촬영한 기법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핸드 헬드 쇼트란 카메라를 삼각대 등에 고정시키지 않고 촬영한 화면을 가리킨다. 상대적으로 불안정하나 삼각대 촬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생생한 감정과 친밀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기법은 1960년대 누벨 바그 이후 본격적으로 감독의 지휘 하에 의도적으로, 또 미학적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공간에 대한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서 핸드 헬드 쇼트는 인물의 꾸밈 없는 감정과 교감을 이루어 보다 사실적이면서도 자유분방한 화면을 창조하여 과거 도식적이던 연기와 화면 구성을 혁신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 인물의 후면과 측면에서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트래블링 숏도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는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극의 마지막 무렵 기태의 아버지와 만난 후 슬픔과 자책으로 괴로워하는 동윤이 밤거리를 헤매는 장면에서 트래블링 숏은 동윤의 괴로운 몸부림을 따라가면서 동윤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현장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수꾼은 비선형적인 복합 내러티브의 방식을 취한다. 기태의 죽음을 둘러싼 다중 플롯 구조를 갖고, 중심 화자의 이동을 따라 서사가 작동된다. 기태의 죽음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기태 아버지서부터 희준, 동윤을 통해 내레이션이 조직되고, 세 인물이 각자의 기억과 인식에 의존해서 기태를 구성해낸다. 그들이 알고 있는 기태에 관한 정보의 질과 깊이는 차이를 보인다. 기태가 절망하게 된 계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아버지, 한때 친했지만 기태의 속내를 알지 못하고 화해의 손길을 뿌리쳤던 희준, 기태를 가장 잘 이해하면서도 여자친구 세정의 문제로 순간 홧김에 기태에게서 등을 돌렸던 동윤. 세 인물 각각은 서사의 엉클어진 조각을 맞추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품고 실제 일어난 사건을 연대기 순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받는다.

다수의 인물이 특정한 논리에 따라 교대로 파편화된 플롯을 끌고 가는 과정에서 연대기적인 선형성은 의도적으로 도외시된다. 다중 플롯 양식은 파편화된 비선형 내러티브를 통해 전통적인 인과성을 철저히 해체한다. 이 같은 양식은 어떤 사고나 언행을 낳는 인과의 논리나 작중 인물의 관계를 탐색하여 드러내는 전통적인 고전적 내러티브 양식에 대해 회의를 갖게 한다. 극 중 드러난 세 친구 사이에 있었던 균열의 계기는 매우 사소하다. 영화는 우리에게 수면 위로 올라온 양상만을 일부 보여줄 뿐이다. 관객은 그들이 왜 파국에 이를 수 밖에 없었는지 충분히 설득되지 못한다. 납득할 수 있을만한 직접적인 계기를 제시하지 않고 끝내는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가 고전적 내러티브를 따랐다면, 우연성은 철저히 배제되어 이야기는 인과관계를 동력으로 전진하고, 선형성과 안정성을 기반으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구성해냈을 것이다. 하지만 파수꾼은 표준적인 시퀀스를 거스름으로써 고전적 내러티브를 전복시켰고 관객에게 혼란을 야기한다.

이야기의 줄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갈린다. 아버지가 기태의 죽음의 원인을 알아가는 과정(현재로 설정된 시점)과 희준과의 갈등이 시작된 시점, 즉 세 친구 사이에 조그만 균열이 일어난 시점과 세 친구가 우정으로 한데 뭉쳤던 행복했던 시절로 나눌 수 있다. 그마저도 현재의 시점을 제외하고는 뒤죽박죽 시간을 거슬러 교차된다. 영화의 내레이션은 현재의 사건이 진행되는 도중에 과거의 사건이 끼어 들어와서 현재의 사건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플래시백의 구조를 중심으로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를 잘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시간변조(Anachrony)는 필수적이다. 영화는 플롯을 시간의 순차적 질서에 어긋나게 진행시켜 나간다. 따라서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서 제시하는 사건들의 시퀀스를 재구성하여 과거와 현재가 순서대로 정렬된, 인과의 고리로 연결되어 하나의 완결된 스토리로 만들도록 요청한다. 다중 캐릭터의 관점에 따라 파편화된 플롯의 제시로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를 뒤로 미룬 채, 관객의 반복되는 오해와 질문 속에서 진상에 가까이 접근해가는 구성이 파수꾼의 특기할만한 점이다. 감독은 관객의 기대심리를 유발하고 배반하면서 서사를 조율해간다. 플래시백은 과거 사건의 충격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기 위한 의도로 쓰였으며 이 영화의 내러티브와 긴밀하게 통합되었다.

또한 감독은 파편화된 내러티브로 시간을 자유롭게 변조하면서 영화 특유의 심미성을 추구한다. 플래시백, 몽타주 기법의 주된 사용, 극히 제한되어 쓰이는 음향 효과, 유의미한 플래시 프레임이 자아내는 미감 등 스타일 상의 요소들이 한데 모여 파수꾼만의 짙고 음울한 색채를 자아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플래시 프레임이 등장하는데, 한밤중 길거리를 뛰는 동윤의 옆얼굴을 트래블링 숏으로 따라가다가 장면이 급격히 전환되는 것이다. 고층의 아파트들이 우뚝 솟아있는 정적인 컷을 몇 초간 보여준 뒤 세 친구의 우정의 공간이었던 기찻길로 씬이 옮겨간다. 쇼트를 점프 컷으로 연결할 때 쇼트와 쇼트 사이에 이같은 플래시 프레임을 삽입하여 화면이 편집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는 것과 동시에 이웃에게서 분리된 현대인의 생활 양식의 단면을 표상하는 이미지를 삽입하여 일순간 보였던 이미지가 갖는 함축된 의미를 고양시켰다. 이것은 단순한 쇼트의 결합이 아니라 쇼트와 쇼트가 충돌하여 제 3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은 이러한 몽타주에 대해 "독립된 두 컷의 상극과 충돌에 의해 일어나는 아이디어"라고 말한 바가 있다.


영화 파수꾼은 다중의 인물을 통해 파편화된 내레이션이 퍼즐을 맞추어가는 과정에서, 일면 만으로 그려지지 않는 인간의 특성과 사회의 본질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끝내 깨닫지 못하는 세 친구들처럼 우리네 소통 양식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알지 못하는 사이 서로에게 상처를 내어주고는 그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또다시 상처를 후벼파는 잘못을 저지르곤 하는 미성숙한 태도를 돌아보게 하는 이 영화가 '불통의 사회'라 일컬어지는 현 시점에 대해 미치는 파급 효과는 크다. 이야기를 조직하고 전개하기 위해 동원되는 다양한 전략, 내러티브, 배우, 대사, 카메라워킹 등 스타일 상의 모든 요소들은 주제와 함께 양성 피드백을 일으켜 영화 파수꾼의 표현과 내용은 상호 침투한다.
2012/08/06 22:03 2012/08/06 22:03
  1. 비밀방문자
    2013/02/07 17:17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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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

2011/09/18 17:35
잠이 안온다. 억지로 잠을 청하다 못견뎌 토해내련다. 목 너머까지 올라오니 구토할 수밖에.
한동안 몽롱하고 무기력한 표류상태에, 복잡한 상념과 결단성 없는 의지에서 오는 마비상태에 봉착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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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학이 땡긴다. 한동안은 시간낭비라 여겼는데. 좀더 정교하게 기술할 수 있는 내용을 뻥튀기해서 에둘러 표현한다고 간주했다. (하루는 벤야민의 보들레르 비평을 읽다 거슬리는게 너무 많아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어버림) 내가 다시 이렇게 찾게 되는 건, 대상과의 새로운, 더 가까운 만남을 기대하기 때문이겠지. 바슐라르는 시적 상상력은 우주에 대한 긍정적인 원초적 순수 경험을 지향한다 했다
.
예술가가 미분적 차이에 얼마나 민감한가. 반면. 몇달간 관념의 비대화(이성의 극히 제한적인 부분만을 단련시키는 사고적응)로 둔감해진 나. 평소 노래를 즐겨 부르고 춤을 즐기던 나는 어디로 갔는지? 감성적 인식, 최초의 느낌에 충실해 눈물 주룩 흘리던 나는? 촉지적 감각. 내 고유의 풍부함. 되찾고 싶었는지
.

... 무엇부터 써야 할까. 시간 순으로? 역으로? 주제별로
?
몰라, 지그재그로


감성적 확신의 풍부함. 나는 여기에 주목하고 싶다. '무엇이다' 규정하는 순간 깊이가 사라져. 최초에 주어지는 감각질의 특수함. 구체성. 직접성. 존재와 깊이 만난다. 반면, 이성의 활동으로 얻게되는 정보는 고도로 추상화된 것. 일반적. 보편성을 띠고 인식론적으로 가까운 반면 존재와 거리가 생긴다. 이론으로 구현된 사실들은 체계 내에서 정합적으로 (최소한 모순을 갖지 않는, 모순율을 배제하는) 설명하려다 존재론적으로 멀어져 버렸어. 무의식적 인식은 지성적 인식에 의해 퇴화됐다.
자연과학은 실태의 규명을 추구한다. 실태를 구성하는 내용은 상황정보들의 총체로 엮어진 한 묶음의 상황체계인데 이때, 이미 파악된 양태에 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즉 새로운 정보의 해석은 이미 공인된 학문의 구성의 기반 위에서 시작된다. 피설명명제는 여러단계의 상황조건들에 의해 적용범위가 제한된, 구체화된 하위법칙에 의해 도출되는 것. 보편법칙은 이성의 활동으로 얻게되는 추상화(abstract; 분리,제거 과정)를 비껴갈 수 없다
.
모든 물리학은 법칙 개념에, 우리가 합리적인 추론을 적용하여 이해할 수 있는 질서정연한 우주 속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성의 활동이! 공통적인 부분을 추려내어 외양의 차이들은 사상해서! 통일성을 부여하는 작업인데. 실제로 우주가 코스모스 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해가능한 방식이 코스모스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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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론? 추론~ 이성을 대표하는 능력이지. 에너지 보존법칙은 방대한 양의 경험을 요약한 것이라고. 추론을 통한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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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가 무얼까? 에너지야말로  경험 가능한 영역과의 간접적인 대응으로 이론화된 산물인것 같은데. 변화를 일으킬 capacity를 수량화하는 게 즉물적으로 파악되는 수준을 넘어 우리의 지각 영역을 확장해주기도 하지만. 파인만도 현대 물리학에서 우리가 에너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라 했거든. 라이프니츠가 vis viva로 제안한 최초의 에너지의 형태는 모호한 형이상학적 망상으로 간주되었는데. 기계론과의 대립으로, 직접적인 작용인이 되지 않는 새로운 물리량을 인정하지 않았던 당시 학문적 풍토 때문. 시간이 흘러 에너지가 정량화되기 시작한 건, 즉 물리량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계기는 로베르트 마이어부터. '열의 일 해당량'은 일정한 열을 만들기 위해 내야하는 일의 양이다. 운동에너지와 열에너지의 상호전환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열역학이 태동하게 되는거지. 암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의 시간의 화살을 결정하는 열역학 법칙이 슈뢰딩거 방정식보다 더 근본적인 물리법칙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 있는데 처음 접했을땐 매우 솔깃했쪄. 아인슈타인도 "열역학은 자연 일반에 대한 물리이론 중에서 절대로 뒤집힐 일이 없는 유일한 이론이다"고 말했다
.
자연계에 대한 정연한 접근과 안정적 이해를 얻는다는 것은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의 변화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 방법은 당연히 정량적이어야 한다고. 특히 운동법칙은 자연변화를 시간의 틀 안에서 바라보는 발상인데.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사고방식을 성공적으로 정량화시킨 대표적 예이다. 그러므로 미분방정식은 자연변화를 정량화하는 기본적 수단이 된다. 갈릴레이와 뉴턴의 과학을 구분짓는 결정적 눈금도 바로 미분방정식의 도입 여부에서 찾는다. 그런데. 물리학이 왜 정량화되어야 하는지? 정성적인 기술만으로는 왜 안되는지? 자연존재론보다 더 실재에 근접한 서술일까 과연? 과학의 발전으로 현대의 많은 기술들이 가능케된건 우리의 자연에 대한 예측이 실재에 부합하기 때문일텐데. 자연과학의 예측이 성공적이었다는걸 입증해 주는거지
.
물리학에서 정량화가 갖는 중요한 위치. 마찬가지로 수학에서도 수량화는 매우 중요하다. 집합론에서도 propositional function을 양화(quantification)함으로써 참 또는 거짓 중 하나인 값을 갖는 (모순율이 배제된) 명제로 취급할 수 있다. 양화된 statement를 부정할때도 단순히 quantifier를 부정함으로써 universal existential, 또는 역으로 바꾸어 줌으로써 모호함을 피하고 명료함을 즉시 명시해준다. 이같은 논리적 등가처리는 닫힌 공리집합 체계인 수학 내부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풍부한 함의를 갖는 여타의 담론에까지 모두 적용할 수 없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어법도 참거짓중 단 하나의 값을 갖는 명제로, 그리고 domain을 양화시킴으로써 기호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논리의 영역에 포섭시킬 수 있다. 하지만 복잡한 채널을 갖지 않는 극히 제한된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수량화 이야기 하나 더. 수학의 기원은 셈하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먼저 탄생한 이진법. 셋은 둘과 하나로. 여러 고대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셈 법칙은 오진법, 십진법, 이십진법. 한 손에 손가락이 다섯개. 양손은 열개. 양손과 양발을 합하면 스무개. 그렇게 신체에 기반해서, 경험 가능한 셈하기에서부터 지금의 엄밀한 추상적 사유의 거대한 첨탑에 이르기까지. , 맨처음 불어 배울 때 얘네들 숫자명명이 이상하다 했는데 알고 보니 프랑스어에 이십진법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였어. 예를 들어 90 quatre-vingt-dix인데 4 X 20 + 10 으로 센 것. 영어는 십진법에 기반한 셈을 하는 거고. . 지성사의 연대기에 내용을 하나씩 더해가는 것. 쏠쏠한 재미를 가져다 주는 일
^^
자꾸만 가지치기해서 뻗어나가는 온갖 잡다 이야기들
.

진화론적 인식론. 지금까지 인류 진화의 역사 속에서 이성이 퇴화하지 않고 진화해왔다는건 이성이 우리를 크게 오도하지 않았음을 입증해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적응 형태에는 final이 없다는 것. 우리의 지각이 확장되면, 환경이 변화하면 새로이 적응-진화형태를 요구한다) 그간 나는 흔히 일컬어지는 이성이(이성의 범위는 보다 넓을 수 있어) 질곡으로 작용할 때가 많다고 느꼈거든. 주체의 historical spring에 따라, 여타 개입되는 역사적, 사회적 요소에 따라 앎의 빛에 심각한 굴절을 일으킨다고 보았는데
..
진리 대응론자들은 진리를 인식과 대상의 일치로 보았다. 이름 뿐인 진리 정의. 개념과 지시체의 미끄러짐을 피할 수 없겠지.  truth를 알면 된다고? 사태 자체를 알 수 있어야! 담론의 장 내 당시 구성원들의 믿음체계, 인식구조, 사용하는 언어에 의해서 규정되는 걸. 완전한 correspond는 불가능하다. 정합론자들은 지식기반 내에서의 coherence에 의해서 진리가 된다고 본다. 그 기반을 구성하는 데엔 일종의 권력구조가 작동한다. 그 시대와 그 지역의 거대한 패러다임을 견주어 보아야 한다.  truth or false의 판단에서조차 가치가 개입된다. 플라톤의 gnoston doxaston의 명확한 이분법 구도는 허상이다. 다만. 연속적인 정도의 차이, 비율 분포차가 있을 뿐. 하지만 매 순간 현상학적 판단 중지를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모든 견해나 고정관념, 가치 체계를 괄호 속에 넣어 배제한 채 대상과 마주하는것. 존재론적 소여 없이 blank로만 남겨둔다는 게 알고자 하는 이가 도대체가 견딜 수 있는 태도일까? 우리의 이성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텐데? 이성의 폭력 ㅋㅋ


요즘 아도르노 개설서를 읽고 있는데 영감의 샘물이다+_+ 꺄앗
나는 논리적 글쓰기라는 것에 의문을 품고 있다. 체계적 구성, 논리적 전개라는 게 곧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정당성을 확보해주는가? 지극히 선형적인 글쓰기로, 1차원적 text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아도르노의 글쓰기에는 어떠한 존재론적 확실성에 대한 여지도 허락하지 않은 채 끝없는 변증법적 산출작업만이 퍼져있다. 체계화하는 것은 비동일적인 것에 동일한 것을 강제하는 것. 곧 등가성과 교환가능성을 위하여 차이를 거부하는 거짓된 총체성을 강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나는 매끈한 유클리드기하학, 뉴턴 물리학의 결정적 인공물의 세계, 개념의 고체화 과정을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
아도르노의 구도 constellations (벤야민에게서는 '성좌적 배치'라 번역되는)는 개념들이 유동적이며,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획득하며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그래, '구도'였어
!
아도르노는 개념을 변증법적 사유의 결과로 파악했다. 정의는 모순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결정적 언술ㅋ.ㅋ인데. 정의로부터 펼치는 사유는 왜곡을 낳는다. 추상적 보편성도 아니고 구체적인 개별자도 아니며 오히려 양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일으켜내는 것으로서 부분과 전체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순간적으로 드러내고자했다.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구도! 그렇게 함으로써, 외부적인 개념을 강제함으로써 개별적인 것에 폭력을 가하게 되는 방식을 피하고자 했다. 파편화된 세상에서 전체적인 것이 진실을 드러내준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허위라며. 큭큭. '총체화된 체계'에 의해 얻게 되는 의미는 전통적인 형식이라는 측면에서도 역시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모범적 규범들은, 학문의 참된 기술은 오직 파편화된 상태로 해결 곤란한 여러 상황들을 통해 논의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
, 아도르노의 글쓰기에서! 세밀한 동기적 처리를 문자적으로 수행하고 전이와 역행(대위 기법)을 등가로 처리하는 식의 방법까지 동원하여 텍스트 그 자체를 실제로 작곡하듯이(낭만주의 전통을 잇는 기법) 구성해냈다. >_<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
!

도대체가 나를 온전히 끌어당기는 설명이 보이지가 않는데. 부정변증법!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 사이의 유동적인 긴장
!
일관되고 온전한 체계를 용인할 수 있는 현재의 이론이나 주의는 없지만, 대가들의 작업에서 이것 부정하고 저것 부정하다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positive system을 세울 수 있을지도. 아니, 한사코 긍정을 거부하며 역동적인 개체로 남아있기를 고집할지
.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념을 대변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다. 어떠한 국부적인 사회적 삶의 국면이나 고립된 현상들도 그것이 역사적 전체와의 관련이나 포괄적인 본체로서 인식되는 사회적 구조와의 관련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인정해. 그치만 여기서 사회라는 게 정치경제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동의할 수 없어. 우리의 믿음 체계를 구성하는 시대와 지역의 특수성을 띤 문화권력적 측면에서라면 다만 간접적으로 매개될 뿐인데. 얘네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편향됐어
.

코펜하겐 해석의 두 기둥,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collapse를 전제한다. 그런데 두사람이 collapse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입장이 갈린다. 보어는 철학적 insight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난해한 물리적 상황을 체계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용어와 개념을 확립하는 것을 보다 중요시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물리학을 수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보른의 날카로운 식견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후에 매우 추상적인 행렬역학을 창안했는데, 아니 세상에 operator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니, 물리 현상과 어떻게 매치가 돼? 그만큼 재밌는 발상. 보어는 입자의 측정전 상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고, 하이젠베르크는 상태는 잠정적으로 갖고 있는데(전자구름처럼) 측정에 의해 확정된다고 했다. 측정 전의 명확한 속성을 알 수 없다는 것과, 어렴풋한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 혹은 말할 수 없다는 유보적 태도 등의 견해에는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발생적 차이를 낳는다. 잘 보면 고전적인 현상에도 측정전 상태에 대해 알수 있는 건 아냐. 측정 전 상태에 definite한 값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지. 양자현상엔 부여할 수 없는 거고
.
불확정성에도 두 갈래가 있는데, 인식론적 불확정성과 존재론적 그것 이다. 인식론적 불확정성은 위치와 운동량, 시간과 에너지 사이에 불확정성 원리가 성립하는데 이것은 측정에 의해 인식주체가 개입됨에 따라 불가피하게 성립되는 관계라는 것. 존재론적 불확정성은 측정 대상과 장치가 존재론적으로 얽혀있는 것을 말한다. 지금의 양자이론은 존재론적 불확정성의 입장을 따르는 것 같은데. 입자의 존재, 속성과 입자의 활동, 현상, 물리법칙은 얽혀있다고 보는 것으로 양자이론은 기묘하다며 찬미하니
.

거대한 우주의 크기부터(10^26m) 극히 작은 이론적인 플랑크길이까지(10^-35m). 우주의 역사 137억년부터(10^18s) 소립자가 광속에 가깝게 움직이는 극히 짧은 시간까지(10^-23s). 일상적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매우 거대한 세계와 긴 시간, 매우 작은 세계와 짧은 시간을 해석된 정보를 토대로 간접적으로 두루 지각한다
.
물리학을 공부하다보면 존재의 다양한 양상들을 만날 수 있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줄기들을 뻗어가는 아주 섬세하고 정교한 철학적 가설들도 함께 만나게 된다. 그 짜릿함 *.* 내가 물리학을 공부하는 이유를
..
모든 앎은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앎이라는 것! 그게 물질로 구현되는 것이든 정신의 현현이든. 존재의 다양함이 앎에 풍성함을 가져온다
.

내 지향점은 크게 보아 나만의 cognitive mapping을 그려나가는 것. 개념을 mapping할 때 여러 개의 축들이 필요하다. 각 개념들의 위상을 code가 다른 축을 세우고 미분적으로 세분화시켜 파악 하는 것. 디테일과 형상간의 상관관계. fuzzy logic에 따라, 축은 유한하나 중간계는 무한하다. 무수히 다양한 미분적 차이들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학문들 간의 상호 관계에 각 분과학문의 전문적 깊이를 더하면서 그 사이에서 역동적 균형을 사유할 것! 구도를 다각적으로, n차원의 형태로 층위를 확장시켜 나갈 것
!
주체적인 학문 활동은 새로운 것을 내 안의 것과 절합(articulation)해서 창조적 생산을 하는 것
!
시대마다 부여된 특정분야 전문인의 모델. 현재 구획된 체계 내에 안주하지 않겠어. 학자이자 예술가. 수렴적 사고와 발산적 사고를 무한히 반복하며, 창조적 진화의 기본 원리를 체화하며, 세계의 거울을 내 안에 비추며, 최대한 다양한 창발적 삶의 형태들을 수용하며
,

인간은 이성적 사유를 하기 전에 감각적 사유를 한다. 육체는 그 나름의 탁월한 이성을 가지고 있다고 니체는 말했다. 물질적 상상력은 관념적 상상력에 앞선다.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에 속하고 있음은 관념의 세계에 속하고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며 우리의 존재를 더 많이 구성한다."(바슐라르
)
감성적 인식 이전의 최초의 감각적 만남, 미세지각을 집요하게 포착할것. 그리고 지금 이끌리는 대로 문학을 접하면서 문자화된 개념을 환기 시키고 그를 통해 감정에 작용하고 최후에 감각적인 것의 감응에 이르기까지의 역과정의 적극적인 몰입 또한
!
2011/09/18 17:35 2011/09/18 17:35
  1. 이정민
    2011/09/27 22:32
    보미는 내 이해를 넘어선 천재다! 온갖 이질적 사유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뒤섞여 있으니. 자신만의 positive system을 구축하고 싶다면 칸트 나이에 [순수 보미 비판]을 써보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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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i-Academism

2011/03/06 16:43

음악대학 작곡과에 입학하여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쇤베르크의 12음열 기법이다. 평균율 체계에서 한 옥타브를 12개의 반음으로 (평균적으로) 나누는데, 음열이란 그 각각의 음을 작곡가가 선택하여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이 음열은 곡 전체에 쓰인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음열의 12음이 모두 나오기 전까지 절대로 같은 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조성음악에서 가장 막강한 권위를 부여했던 Tonic, 그리고 그에 가장 가까운 Dominant. 이 두 음의 관계 D-T Cadence라 부르고 이것이 조성음악의 형식을 결정짓는다. (어느 음악형식에서건 section을 나눌 때 Strong Perfect Authentic Cadence를 먼저 찾는다.) Major or minor Scale내에서의 불균등한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자 쇤베르크가 창안해낸 기법인데, 과연 독일다운 발상이다. (독일에서의 음악, 무용은 형식, 규격에 맞게 잘 정돈된 양상을 보인다.) 이 당시 모든 유럽의 작곡가들은 한번쯤은 음열기법에 손을 대봤을 정도로 작곡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1950년대를 전후로 하여 Total Serialism(총렬주의 -주: 서구의 합리화된 음악의 종결자)의 거대한 물결이 이는데, 이는 음열의 규칙을 음고, 음가, 강도, 어택에 모두 적용한 음악이다. 4개의 parameter serial()을 부여하면 12 by 12 square matrix를 설계할 수 있고, 곡 전체는 이 matrix의 규칙을 따른다. 곡 전체의 구조 및 전개가 matrix에 모두 담겨 있다. 작곡가가 각 parameter에 수학적 질서를 세우고 곡 전체를 총괄한다.

이 때, 곡은 작곡가의 통제를 받을까, 수학의 통제를 받을까? 곡이 연주되었을 때, 우리의 귀는 이 수많은 규칙들을 일일이 따라가지 못한다. 기보 상의 세밀하고 정교한 건축이 실 공간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우리의 인식영역 너머 저편에 서게 된다.) 이제 작곡가는 간단한 12개의 serial로 부터 무수히 파생된, 간단한 공리로부터 무한히 연역된 해독되지 못한 symbol의 세계에서 허우적댄다. 답답한 부지의 표징들이 숨막히도록 공간 안에 가득 차오른다. 연주가 행해지는 순간, 청자는 물론이요, 작곡가 자신조차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 행해지는 제도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카데미즘에 의한 강요로 자신이 감각으로 전혀 컨트롤할 수 없는 음악을 쓰고 그것으로 레슨을 받는다. 작곡가들의 의식은 서구화, 현대화의 물결과 함께 서구의 세계관이 창조해 놓은 미학적 절대 공간에 의해 지배 받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공인된 예술 제도권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현실적인 욕구들, 권력 지향적 가치관이 개입된다. 때문에 현대음악은 우리에게 아주 조금의 감동도 주지 못하게 된다. 이해는커녕 아무런 자극도 받지 못한다.
독일 낭만을 주축으로 형성된 지나친 형식주의, 그 이전에 Bach가 집대성한 대위와 푸가 기법, 더 거슬러 올라가 중세의 선법(mode) 으로 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온 합리화 전통의 무게. (Rationalism의 대마왕 라이프니츠는 음악을 귀로 듣는 수학이라 했다.) 서구의 고도로 합리화된 예술의 전통이, 그 가운데 형성된 미학적 절대 공간(우리는 이데아의 완벽한 형상을 소리라는 질료로 불완전하게나마 구현할 뿐인 기술공에 불과하다.)이 '작곡가의 능력 = 정교하고 복잡한 소리의 구조를 구축하는 능력' 이란 등식의 성립에 기여했다. 현재 많은 작곡가들은 여전히 곡을 단순하게 쓰는데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다.


음악의 의미를 구성하는 데 있어 나는 1차적으로 청각 감관의 경험에 바탕을 둔 감성적 직관이 우선한다고 본다. 감성적 직관. 외부의 정보를 일차적으로 감지하는, 감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는 형식이 그 이면에 드리워진 수학적 질서에 우선한다. "Music is not Logic but Impression."

 




참고: 음악에 적용된 matrix

 

사용자 삽입 이미지

 

P: 원형

I: inversion. 대위(Counterpoint)에서부터 적용된 기법상의 규칙인데, 같은 음정의 성질을 유지한 채 방향을 달리하여 진행시킨 것. (; 원형이 단3도 위로 진행했다면, I는 단3도 아래로 진행) 1번째 원형(P0) 1번째 I(I0)을 나란히 열거해보면 그 합이 12가 된다. (음정에서 단3도와 장6도를 합하면 완전8도를 이루는 것과 같은 원리)

R: retrograde. 순서를 거꾸로.

RI: retrograde inversion. I를 먼저 적용하나 R을 먼저 하나 결과는 같다. n번째 R RI의 합도 12가 되는 관계가 성립한다.

 


2011/03/06 16:43 2011/03/06 16:43
  1. 성재
    2011/03/07 09:1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처음으로 total serialism을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코멘트 남겨봐요.

    1. V - I 진행은 고전화성에서 왜 널리 쓰이게 되었을까요?
    형식과 내용은 물과 기름처럼 나누어 보아야 할까요?

    (1번을 생각하며)
    2. 쇤베르크가 12음열을 늘어 놓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 스스로 그것더러 '어떤 기법' 이라고 부르기를 싫어했다고 하지요.
    쇤베르크는 소리들을 떠오르는대로 던지려고 한 것처럼 보여요.



    이런 면에서라면, 쇤베르크의 음악을 logic 보다는 impression 에 무게를 두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만약 그렇게 볼 수 있다면, 현대음악도 logic 보다는 impression 에 무게를 두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오히려 바흐의 多作 푸가들과 브람스 4번 교향곡은 logic 에 무게를 둔 작곡기법 같고요.
    (여기서 '무게를 두었다', 작곡'기법' 이라는 말에 힘주고 싶어요.)



    만약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오히려 현대음악 또한 anti-academic 한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ps. matrix 설명 부분에서 I에 대한 설명 가운데,
    P + I = 12 일 때, P의 값 + I의 값=12가 되는 것처럼 보여요.

    e.g.) P2 + I10 일 때,
    2 ;P2열의 첫 값
    +
    10 ;I10열의 첫 값
    =
    12
    • 이보미
      2011/03/09 23:27
      V-I 진행은 조성이 확립되기 이전부터 꽤 오랜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중세의 선법에서도 끝마치는 음과, 그 다음으로 자주 출현하는 음으로 긴장을 주는 음을 각기 finalis(조성의 tonic), dominant라 부르고 각 mode마다 다른 기능을 가진 음이 있었습니다. 어느 이론가나 작곡가가 단독으로 규칙으로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축적된 경향이었죠. 그 당시 곡의 마지막에서 finalis로 끝맺을 때 단2도로 상행하기 위해 Doria, Mixolydia, Aeolia선법의 경우 그 제7음에 반올림을 했던 관습이 생겼습니다. 2성부만 놓고 보자면 장6도->완전8도 진행이 됩니다.

      또, Circle of Fifth(5도권 순환)에 따르면 C에서 가장 가까운 음은 G음이고, 가장 먼 음은 F#음이에요. 이건 배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C음을 밑음으로 했을 때 2번째 배음이 한옥타브 위인 c가 되고, 3번째 배음이 g가 되는데요. 밑음:2nd배음:3rd배음 사이에 1:2:3 의 진동수 비율이 성립합니다. 피타고라스가 완전8도의 비율이 1:2, 완전5도는 2:3임을 발견했다는건 잘 알려져있죠. 두 음이 동시에 울렸을 때, 음의 진동수(=주파수) 비율이 간단히 작은 소수(prime number)의 비율로 나타내어 지는것은 협화음정, 비교적 큰 수의 비율로 나타내어 지면 불협화음정으로 분류하죠.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쇤베르크가 어떤 언급을 했는지 잘 모르지만^^; 조성음악에서 탈피하기 위한 방법에 반영된 사고 틀이 '합리주의적'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현대음악은 엄청 다양해서 특정 양식의 변화로 설명하기 어려운데요. 서구에서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합리주의의 전통이 아직까지도 아카데미의 영역에서는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Bach의 푸가로부터도 이어져 오고요. Brahms는 곡 전개에서의 타당성을 뒷받침해주는 대위기법을 잘 구사한 작곡가입니다.)

      물론 작곡(composition: 구성)을 할 때, 제시된 소재들을 섬세하고 짜임새있게 잘 다듬고 밀도있는 텍스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교한 세공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공의 과정이 우선으로 삼아야할 과제는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가 가능해야한다는 겁니다. 우리의 귀를 매혹시킬수 있다면 가장 좋겠죠. 음악작품은 기보된 악보에 있지 않고, 연주가 행해지는 그 순간에 있게 됩니다.

      아, matrix의 설명을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n = m
      12 - n = m 둘 중 하나의 관계를 만족할 때,
      n-th P(or R) 와 m-th I(or RI)의 합은 12가 되는 관계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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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각은, 그것이 긍정적 생각이든 회의적 생각이든, 내부에 관한 생각이든 외부에 관한 생각이든, 객관적 진리 개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개념은 오직 타자와 의사소통 중에 있는 피조물들만 접근할 수 있다. 앎의 획득은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에 기초해 있지 않다. 앎의 획득은 전체론적으로 생기며, 그것은 처음부터 상호인간적이다. 데이빗슨의 <외부주의 인식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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