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목
+ 1641년 라틴어 초판 제목: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여기서 신이 바깥에 계시다는 것과 사람의 영혼이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보인다.
+ 1642년 라틴어 2판 제목: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여기서 신이 바깥에 계시다는 것과 사람의 영혼과 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혀 보인다.
+ 1647년 불어판 제목: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여기서 신이 바깥에 계시다는 것과 사람의 영혼과 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밝혀 보인다.


1.2. 번역에 참고한 번역본들
+ 이현복, 문예출판사 1997.
+ 양진호, 책세상 2011.
+ J. Bennett 2007
+ J. Cottingha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 M. Moriarty, Ox
+ ford University Press 2008.


1.3. 일러두기
+ 제6성찰의옮김을 제외하고, 군데군데 문장들을 건너뜀으로써 원문의 일부만을 옮겼다.
+ 맥락을 살리고 설명하기 위해 [  ] 속에 옮긴이가 새로운 구절들을 넣었다. [  ] 속의 구절은 옮긴이가 원문을 요약하거나 덧붙여 쓴 것이다.



2.1.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요약

하느님과 영혼이라는 두 주제는 신학의 도움보다는 철학의 도움으로 논증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도 자연 이성을 통해 하느님이 저기 계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이성활동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바깥에 계신다는 것, 사람의 영혼이 몸과 아예 다르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나는 단지 가장 우선하면서 가장 중요한 논증만을 취하여 이를 발전시켜, 감히 매우 확실하고 분명한 논증을 제안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내가 여기서 사용한 논증은, 내 생각에, 설사 기하학의 논증보다 더 낫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만큼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논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입니다. 이는 내 논증들이 다소 길고 일부 논증들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내 논증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입견으로부터 아예 벗어난 마음이 필요하며, 감각들과 한 무리를 이루고 있는 데서 기꺼이 빠져나올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논증을 차근차근 따져본다면,] 마침내 하느님이 저기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거나, 사람의 영혼과 몸이 참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2.2. 독자를 위한 서문 요약

사람의 마음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때, 스스로를 오직 생각하는 사물로만 본다. [이로부터 나는] 마음의 본성 또는 본모습은 순전히 마음이 생각하는 사물이라는 데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부 독자는 마음이 스스로를 오직 생각하는 사물로만 본다는 사실이 내 주장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마음이 생각함 이외에 다른 본성을 가질 수도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은] 내 마음의 본모습에 속한다고 내 마음이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내 마음이 생각하는 사물이라는 사실뿐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은 내 마음이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물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으며 그 밖에 다른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제2성찰에서는] 내가 내 마음의 본모습에 속하는 그 어떤 다른 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그 어떤 다른 것도 실제로 내 마음의 본모습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내 마음보다 더 완전한 사물에 대한 관념을 내 마음 안에 갖고 있다. [일부 독자는] 이 사실로부터 그 관념 자체가 내 마음보다 더 완전하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그 관념이 나타내주는 것이 저기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 더더욱 따라 나오지 않는다고 [반론할 것이다.] 나는 "관념"이라는 낱말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답하고자 한다. [첫째] "관념"은 [지성의] 재료와 관계된 것으로, 즉 지성의 작용을 뜻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이 경우에 [나보다 더 완전한 사물에 대한 관념뿐만 아니라] 관념이 내 마음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둘째] "관념"은 [지성의] 대상과 관계된 것으로서, 즉 앞의 지성 작용을 통해 나타난 사물을 뜻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설사 지성 작용을 통해 나타난 사물이 지성 바깥에 존재한다고 우리가 [굳이] 가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물은 자신의 본모습 때문에 내 마음보다 더 완전할 수 있다. [제3성찰에서는] 내 마음보다 더 완전한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이 내 마음 안에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로부터 이 사물 자체가 실제로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는 것을 길게 설명할 것이다.


2.3. 여섯 성찰 개관 요약

+ 제1성찰: 우리가 학문의 토대로서 여태까지 갖고 있었던 것들 외에 다른 토대가 없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특히 물질에 관한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우리가 의심하는 까닭은, 우리가 의심한 것이 마침내 참말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 제2성찰: 마음은 조금이라도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기 마음대로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이를] 가정하는 동안에 마음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이로써 마음은 자기에게 속하는 것들이 물체에 속하는 것들과 다르다는 것을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우리가 밝고 뚜렷하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그대로 참이다. 그래서 두 실체가 서로 구별되는 실체라고 우리가 밝고 뚜렷하게 이해한다면, 그 둘은 실제로 서로 구별되는 실체이다. 만일 우리가 정신과 물체에 대해 각각 밝은 개념을 형성한다면, 우리는 정신과 물체가 서로 구별되는 실체라는 것을 밝고 뚜렷하게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정신과 물체는 실제로 구별되는 실체이다. 이 점은 영혼의 불멸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

+ 제3성찰: [하느님은 저기 바깥에 계신다.] 우리는 가장 완전한 이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 이 관념이 나타내는 대상 자체가 매우 큰 실재성을 갖고 있어서 이런 관념은 오직 가장 완전한 원인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한 기술자의 마음 안에 몹시 완전한 기계에 대한 관념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관념에 나타난 객관적 정교함이 어떤 원인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관념도 오직 하느님 자신만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 제4성찰: 우리가 밝고 뚜렷하게 아는 것들은 모두 참말이다. [참말을 거짓말로 여기고, 거짓말을 참말로 여기는] 거짓됨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 제5성찰: 물체의 일반 본성은 무엇인가? 하느님이 저기 바깥에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논증이 있다. 기하학 증명의 확실성조차도 하느님에 대한 앎에 의존한다.

+ 제6성찰: 지성활동과 상상활동은 구별되어야 한다. 마음은 실제로 몸과 구별되지만, 마음은 몸과 가깝게 결합되어 단일성을 이룬다. 끝으로 나는 물질 사물들이 존재한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주는 모든 논증들을 제시했다. [내가 이런 논증들을 제시한 것은 이 논증들이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며 사람이 몸을 갖고 있다는 것 따위를 증명하는 데 쓸모 있기 때문이 아니다.] 제 정신인 사람은 아무도 이런 것을 진지하게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물질 사물이 저기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증들을 고찰함으로써, 이 논증들이 우리 마음과 하느님의 존재를 보여주는 논증들에 비해 덜 튼튼하고 덜 밝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을 알려주는 데 쓸모 있기 때문에 나는 저 논증들을 제시했다. 따라서] 우리 마음과 하느님에 대한 앎에 이르게 해 주는 논증은 사람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논증들 가운데 가장 확실하고 가장 분명하다. 내가 이 <성찰>에서 증명하려 했던 모든 것은 바로 이것이다.
2012/08/06 21:24 2012/08/06 21:24
  1. 이보미
    2012/09/21 21:11
    '사물'은 라틴어의 causa, 불어의 chose를 번역하신 건가요? '사물'보다 그냥 '것'이 어떤지요? 사'물'이라고 하면 물질이나 체를 가진 것처럼 여겨지는데.. 철저하게 몸과 마음의 이원론을 주장했던 데카르트의 견해를 이야기하는데 "마음의 본성을 (생각하는) 사물로만 본다"는 명제로 표명한다면 어폐가 있는 것 같아요. '것'은 보다 추상적인 의미, 무형의 것 까지도 함축할 수 있는 반면, '사물'은 구체를 가진것으로 의미가 한정되는 듯 보여서요.
  2. 이보미
    2012/09/21 21:36
    그리고 참고한 번역본들 목록 중 마지막 책은 반토막이 났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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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질문. 선생님께서는 물리학을 탐구하는데 필요한 선험적 인식이 있다면, 그것은 충족이유율 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원초적으로 말하는 존재, 원초적으로 생각하는 존재. 즉 초월자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 그와 같은 절대자, 무제약자, 전체 혹은 신을 생각할때는 추론의 도약, 생각의 단계에 불가피한 불연속성이 일어날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친숙한 common-sense, good-sense만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문제인듯. 그와 같은 문제를 생각할때는 연역, 귀납의 매 단계마다 촘촘이 생각의 고리를 연결시켜 연속적으로 추론을 전개해나가는것이 불가능해 보여요. 분석적인 틀로 과연 형이상학적 주제에 접근이 가능할지? 저는 의문이에요. 자유의지를 긍정하는 철학적 모형을 세우려고 할때, 유물론자들에게 반박되기 쉬운 이유가 바로 이것에 있는 것 같은데요. 근거에 집착하는 추론의 방식으로, 근거를 실증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려 하니까요. 하나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 인풋-아웃풋의 확정적인 인과관계의 틀인 알고리즘이 가능하겠죠. 제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유는 추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전제로부터 출발해 일의적으로 결론에 이르는 것이 반드시 실제적이지만은 않은 문제들이 훨씬 많을거에요. 저는 이성적 판단이라고 우리가 여기는 것이 -선생님께선 '지성적 잡음'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차근차근 추론을 통해 이르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보다 원초적인 거대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지만, 이성적 판단이라 오인하게 되는 불안정한 믿음이 형성되고, 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논증을 제시하는 거라 봐요. 또 선생님께선 지성을 너무 좁은 의미로 제한하시는건 아닌지.. 피융피융ㅠ_ㅠ 과제하려는데 자꾸만 생각이 뻗치네요.

너의 두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첫째 물음. 물리학을 탐구하는 데 필요한 원리는, 내 생각에, 측정하는 사람에 상대적이지 않은 경험 사실이 있다는 원리. 내가 자연의 원리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것이 선험 원리인지 경험의 산물인지는 모르겠다. 경험을 통해 획득한 것들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연의 원리는 단순한 형이상학 원리는 아니야. 왜냐하면 그런 경험 사실이 실제로 있거든. 가장 훌륭한 예로는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km라는 것는 경험 사실이 있지. 이것은 관측하는 사람에 상대적이지 않아. 자연의 원리와 충족이유율 사이의 관계는 아직 잘 모르겠다.

둘째 물음. 당연히 추론의 도약이 있겠지. 내 논증의 비판자들은 그 도약의 지점을 정확히 지적해야 할 거야. 아마도 내 논증의 비판자들은 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 내 전제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니까. 하지만 내 전제를 뒷받침해주는 많은 논증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해. 가령 나 이외에, 특히 내 존재 이전에 다른 생각하는, 인식하는 자아가 존재한다, 라는 나의 전제는 매우 강력한 논증을 갖고 있어. 경험과 부합하기도 하고.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고 인식하는 자아였다는 것을 지지할 만한 강력한 논증도 갖고 있어. 내 어머니가 내 이전에 존재했다는 주장 조차도, 네 말처럼 추론의 도약이 있을 거야. 추론의 도약에도 불구하고 우리 이성은 그 주장을 논증하는 추론이 합당하다고 판단할 만큼 건전하다고 생각해. 극단 회의주의자가 아니라면 말이야.

만일 내 어머니가 나 이전에 존재했다는 주장이 형이상학 주장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그런 형이상학 주장을 받아들이는 형이상학자로 계속 남을 생각이란다. 하지만 나는 논증의 힘을 믿는 사람이야. 내 어머니가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그는 생각하고 인식하는 존재였다는 것, 하지만 그는 다른 생각하고 인식하는 존재 없이 생각하고 인식하는 존재일 수 없었다는 것을 나는 논증하고 있어. 이 논증을 유물론자가 반박할 수 있을까? 내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을까? 오히려 많은 인간 실험은 내 주장이 옳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나는 믿어.

내 생각에 보미는 형이상학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외부 사물"이라는 개념 자체가 형이상학 개념이라고 주장했어. "원인"은 형이상학의 대표 개념이지. 물리학에서 이런 개념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계속 있었어. 양자역학 해석 논쟁에서 "형이상학"이라고 칭할 때는 외부 사물의 존재를 가정할 때, 조롱하는 낱말이기도 했어. 하지만 나는 원인, 사물, 진실 등은 물리학에서 결코 제거할 수 없는 형이상학 요소라고 생각해. 형이상학은 단순히 경험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식을, 우리 경험을 해명하는 필수불가결한 가정이야. 외부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실증해 줄 수 있을까? 실증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면, 아니 의미 있다면, 그래서 실증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우리의 감각자료나 자극작용밖에 없다면, 물리학은 실증 학문이 결코 될 수 없단다. 나는 카르납이 초기에 실증주의자에서 차츰 물리주의자로 개종한 것이 큰 "진보"라고 믿는다. 다만 나는 물리주의 그 이상으로 "진보"하고 싶은 형이상학자야. 물론 "진보"라는 단어는 나의 가치평가가 담긴 것인데 실증주의자나 회의주의자 눈에는 "퇴보"나 "퇴락"이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형이상학자이면서 여전히 추론의 힘을 신뢰하는 사람이란다. 이것이 내가 신비주의자가 설교가나 정치인이나 예술가나 칼럼니스트가 아니라 철학자인 이유가 아니겠니? 나도 도약, 비약, 직관, 통찰을 중요시하지만 이 모든 것을 타인에게 표현하는 가장 철학적인 방법은 논증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이 내 논증을 조롱해도, 그런 논증 없는 조롱은 나를 흔들지 못한단다. 오직 경험과 반론만이 내 논증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 거야. 논증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결코 내 논증에 대해 반대 논증을 할 수 없겠지.

그리고 철학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철학자의 미사여구나 그의 삶이 아니라 철학자의 논증이라고 나는 생각해. 철학을 철학답게 하는 것은 논증이라는 말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어. 이것은 모든 사람이 신학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하지만 그가 철학자가 되려 한다면, 그가 가장 신뢰해야 하는 것은 직관과 경험에서 출발하여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추론과 논증이라고 나는 믿는단다.

2012/03/11 13:36 2012/03/11 13:36
  1. 성재
    2012/04/03 10:42
    마지막 문장이 참 좋습니다.

    저는 과학의 끝에 철학이, 철학의 끝에 신앙이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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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초안은 수정을 거쳐 <물리학과 첨단기술> 최근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The Ontological Interpretation and Bohmian Quantum Theory of Motion

According to the orthodox interpretation in quantum mechanics, the spatio-temporal properties of a physical thing cannot be defined before measurement. Bohr said that “there is no quantum world; there is only an abstract quantum physical description”. However it is obvious that the physical thing exists out there even though nobody see it. Indeed, there would be no concept, whether physical or psychological, without external public object whose existence does not depend on the measurement process or observing consciousness. Fortunately Bohm had proved that the idea a particle has continuous trajectory in configuration space is compatible with the standard formalism of quantum mechanics. The virtue of Bohmian quantum theory of motion is that it saves our common sense ontology. myeongseok@gmail.com


1. 존재론 해석의 배경
나는 내가 해를 보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 해가 내 피부 바깥에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고 믿는다. 비록 창문 안에 해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해가 창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해가 창문보다 더 크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 믿음이 참이 아닐 수 있다는 논증이 회의주의 철학자들에 의해 줄곧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철학자의 말장난에 그치지 않는다. 심지어 나의 이 믿음을 위태롭게 하는 양자역학 해석까지 등장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같은 구세대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이 잘못된 인식론에 근거해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에 대한 건전한 상식 위에 물리학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끝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존재에 대한 건전한 상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 주장 중에서 우리가 양자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O1. 세계에 나 이외에 여러 인식 주체들이 존재한다.
O2. 여러 인식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이 존재한다.
O3. 여러 인식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은 각 인식 주체의 피부 바깥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O4. 인식 주체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그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들은 여러 개이며, 이것들 사이의 관계는 변화한다.

일부 명상가를 제외하고 O1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리학자들 중에 O2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해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외부 사물이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그 해가 실제로 매우 크고 매우 뜨거워 그것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물리학자들은 O3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물리학자는 지구도 여러 인식 주체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여러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구와 해가 다른 사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변화 중에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물리학자들은 O4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O의 주장들을 “상식” 또는 “상식 존재론”이라고 부를 것이다.

O2에서 말한 “여러 주체들이 함께 지각할 수 있음”을 “common sense”라고 하는데 이를 “공통감각” 또는 “상식”이라고 번역한다. 원래 “공통감각”란 우리 오감의 내용을 주체 내부에서 다시 감각하는 능력을 뜻했다. 주체는 이 능력을 통해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지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따뜻함”, “빛남” 등은 시각을 통해 감각하지만 이것이 해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것은 공통감각 때문이다. 이 공통감각의 도움으로 우리는 해가 단순히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저기 바깥에 있는 사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빛남이 빛난다”라고 하지 않고 “해가 빛난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능력이 거의 모든 동물들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인간만이 이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O3에서 말하는 사물을 “외부 사물”, “공통 원격 자극”(common distal stimuli)이라 부르는데, 공통감각을 통해 우리는 바로 이 공통 원격 자극을 감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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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Bohm 1917-1992. By David Michael Kennedy.



상식 존재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과학이론을 해석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상식 존재론을 유지하는 양자역학 해석을 “존재론 해석”(ontological interpretation)이라 부른다. 존재론 해석에서 가장 중요한 논제는 O3이다. O3에 숨어 있는 가정은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공간 표상이 단순히 주체의 구성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물들이 주체로부터 실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며, 주체로부터 다른 거리에 있는 만큼 사물들도 실제로 서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O4는 우리에게 시간 표상을 요구한다. 칸트는 시공간 표상에 놓이는 대상이 사물 자체가 아니라 현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상식 존재론은 시공간 표상의 대상이 사물 그 자체라고 주장한다.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은 양자역학에서도 시공간 표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과연 우리는 O를 모두 받아들이면서 분자, 원자, 원자핵, 전자 등에 대해 계속 말할 수 있을까? 실제로 데이비드 봄은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 상식을 보존하는 이 해석을 소개함으로써 물리현상, 물리이론, 실제 세계, 경험과 인식 등의 주제를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2. 궤적 없는 물리학
괴팅겐의 이론물리학자인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이 1925년 행렬역학을 내 놓았을 때 대선배격인 막스 플랑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듬해 슈뢰딩거가 파동역학을 발표하자 플랑크는 그에게 “오랫동안 풀지 못해 쩔쩔매던 수수께끼의 해답을 듣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했다.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은 플랑크뿐만 아니라 고전물리학의 가치를 존중하는 로렌츠, 빈, 폰 라우에, 플랑크, 아인슈타인 등에게 ‘구원’처럼 다가왔다. 그는 슈뢰딩거가 물질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익숙한 그림을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이후 양자역학 해석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누어졌다. 한 진영은 시공간에서 궤적을 그리며 연속적으로 운동하는 입자 개념을 고수한다. 이들에게 물리학의 대상은 연속적이고 확정적인 객관 세계이며 이 세계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고 있다. 다른 진영은 원자에 대한 시각 이미지를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물리학의 대상은 불연속적이고 불확정적인 그래서 다만 측정에 의해 구성된 현상계이며 이 현상계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슈뢰딩거는 두 진영을 오락가락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한편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을 칭송하고 보어의 반달리즘을 우려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과율에 대한 믿음이 서서히 흔들렸고 측정행위가 측정대상을 어느 정도 구성한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미시세계에서 시공간 표상을 거부하는 진영이 보어를 중심으로 ‘코펜하겐 해석’을 제안하자 이 해석은 점차 물리학계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막스 플랑크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진지한 철학적 숙고 없이 코펜하겐 해석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아인슈타인이 코펜하겐 해석 반대에 선봉을 섰지만 코펜하겐 해석이 양자역학의 해석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많은 코펜하겐 해석 지지자들은 자신의 해석이 현상주의의 색깔을 짙게 띠고 있음도 불구하고 자신의 해석은 “과학”이지만, 반대자들의 해석을 “철학” 또는 “형이상학”이라고 비난하거나 무시했다. 이런 무시는 오늘날까지 다수 교과서와 학회와 교실에서 계속 되고 있다.

시공간 표상에 관한 한, 코펜하겐 진영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나누는 전략을 취했다. 그들은 태양과 지구 같은 거시 사물들에 대해 시공간 표상을 취하는 것을 굳지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이 반대하는 것은 원자 같은 미시 사물들을 시공간 속에 넣어 기술하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의 일상 자연언어는 우리가 거시세계 속에서 생활하면서 형성된 언어이며 시공간 표상도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언어는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정밀 과학자는 시공간 표상을 미시세계에 계속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O1에서 O4까지 중에서 미시세계에서 적용되지 않는 논제는 정확히 무엇인가? 원자가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지각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O2를 거부해야 할까? 먼저 거시세계에 관한 한, 특히 태양이나 지구에 관한 한, O를 모두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논제들을 추가해 보자.

A1. 아무도 해를 보지 않아도, 그 어떤 측정행위나 측정과정이 없어도, 해는 여러 인식 주체 바깥 저기 멀리 떨어져 존재하고 시간에 따라 위치가 바뀐다.
A2. 그 어떤 측정행위가 없어도, 해는 수소와 헬륨 등 다양한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A3. 그 어떤 측정행위가 없어도, 해의 내부를 이루는 있는 원자들의 위치는 해 표면 안쪽에 위치해 있다.
A4. 그 어떤 측정행위가 없어도, 해의 내부를 이루는 있는 원자들의 위치는 해의 운동에 따라 바뀐다.
A5. 그 어떤 측정행위가 없어도, 해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은 여러 인식 주체 바깥 저기 멀리 떨어져 존재하고 시간에 따라 위치가 바뀐다.

여기서 A1과 A2를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일단 A1과 A2를 인정한다면 A3과 A4도 인정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일단 A3과 A4를 인정한다면 A5도 인정해야 한다.

분명 원자는 많은 과학자들이 함께 탐구할 수 있는 공통의 사물이다. 각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피부 바깥에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진 사물로서 원자를 탐구한다. 물리학자들이 탐구하는 원자가 우리의 피부 바깥에 놓인 외부 사물이라는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원자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서로 다른 사물이라는 데 동의한다. 나아가 이것들의 관계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까지도 동의한다. 따라서 우리가 심지어 원자에 대해서도 O1에서 O4까지를 거부해야 할 이유가 없다. 만일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이 미시세계의 경우 O3과 O4를 거부하고자 한다면, A들 중 일부를 거부해야 한다. 그들은 정확히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가? 우리가 원자나 전자의 궤적을 거부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면, 오히려 우리는 이것들이 궤적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물론 우리가 원자의 궤적을 정확히 계산해낼 수 없고 교란 없이 측정할 수도 없을지 모른다. 우리가 원자의 궤적을 계산하거나 측정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은 인식의 문제이다. 하지만 원자가 궤적을 가지느냐 하는 물음은 존재의 문제이다. 양자역학이 궤적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거나 실험을 통해 확증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누군가 입자의 궤적을 도입한 채, 거의 모든 양자현상들을 설명해낼 수 있다면, 우리는 그런 해석을 선호해도 된다. 우리의 이런 선호는 “철학”이나 “형이상학”에 빠져 “과학”을 무시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데이비드 봄의 존재론 해석은 입자의 궤적을 도입하면서 기존의 양자현상을 설명하고 여러 가지 양자역설들을 해소하고 있다.


3. 적혈구는 궤적을 가지지 않는가?
양자역학의 표준해석가들은 측정 전에 입자가 궤적을 가진다고 가정할 때 역설이 생긴다고 믿는다. 양자현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두 실험은 간섭실험과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이다. 1922년의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실험에서 은 원자들이 시공간 상에서 궤적을 가진다고 가정하고 있다. 슈테른은 은 원자들을 균일하지 않은 자기장 속으로 지나가게 하면, 은 원자들의 빔이 두 개로 갈라져 하나는 위쪽으로 굽고 다른 하나는 아래쪽으로 굽을 것이라고 사전에 예측했다.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위아래로 연속하여 퍼지지 않고 두 줄로 쪼개진 원자들의 자국을 얻었다. 게를라흐는 자신들의 결과가 보어의 방향 양자화를 실험적으로 입증했다면서 곧장 보어에게 축하 엽서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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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aque at the Frankfurt institute commemorating the Stern–Gerlach experiment. From http://en.wikipedia.org/wiki/Stern-Gerlach_experiment


우리가 알고 있는 슈테른-게를라흐 실험 설정은 매우 단순화되었다. 은 원자의 자기모멘트가 은 원자의 제일 바깥 전자의 자기모멘트와 같다고 가정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은 원자들의 빔 대신에 전자 빔으로 슈테른-게를라흐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실제 실험에서 몇 가지 진보가 있었지만, 아직 전자의 슈테른-게를라흐 효과가 확연히 입증되지는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미 보어는 전자의 스핀을 시공간 표상을 통해 이해할 수 없다고 보고, 전자의 슈테른-게를라흐 효과를 실험을 통해 보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자의 슈테른-게를라흐 효과는 거의 명백하고, 이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원자가 궤적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왼쪽에서 총으로 원자를 쏘면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오른쪽 스크린에 도달하여 흔적을 남길 것이다. 다음 주장 중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M1. 자기장 발생 장치를 포함해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에 사용된 장치들은 인식 주체들의 피부 바깥으로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실제로 존재한다.
M2. 인식 주체가 없어도, 그가 스크린을 확인하지 않아도, 스크린에 두 줄 흔적이 남겨져 있다.
M3. 원자가 총에서 발사되어 스크린에 흔적을 남길 때까지, 원자, 자기장, 스크린 등의 상호작용은 물리적 상호작용이며 이 모든 과정은 동역학적 과정이다.
M4. 지켜보는 인식 주체가 없다 하더라도, 원자 하나는 총에서 출발하여 자기장 발생 장치를 경유하여 스크린까지 이동한 후 스크린에 한 점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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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ference pattern of electrons obtained by Tonomura et al. Number of electrons: (a) 10, (b) 100, (c) 3000, (d) 20,000, (e) 70,000.

코펜하겐 해석 진영은 애써 M4를 부정한다. 하지만 다른 논제에 대해 다소 열린 자세를 취한다. M2를 받아들이는 해석자들은 스크린을 하나의 측정장치로 간주한다. M2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흔적 자체가 인식 주체의 개입과 무관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해석자들은 M3까지도 받아들인다. 물론 이들은 소위 붕괴과정이 양자동역학 과정의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M4를 거부하게 되면, 코펜하겐 해석 진영에서 취할 수 있는 합당한 길은 M3을 포기하거나 M2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해석자들은 인식 주체가 스크린 흔적을 눈으로 보기 전에는, 위쪽에 흔적이 있는 상태와 아래쪽에 흔적이 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말하곤 한다. 심지어 인식 주체가 스크린을 보기 전에는 흔적이 있는 상태와 없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런 대안이 상식 존재론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일에라도 누군가 원자가 뚜렷한 궤적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런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과도한 형이상학이 아니다.

전자의 간섭실험은 때때로 전자가 궤적을 갖지 않는다는 실험적 증거로 간주되곤 한다. 1989년 토노무라는 전자를 하나씩 쏘는 방식으로 수만 개를 두 틈으로 쏘아 보내었더니 뚜렷한 간섭무늬를 얻을 수 있었다. 전자 하나는 이전에 발사된 전자와 간섭하지 않고 그 이후에 발사된 전자와도 간섭하지 않는다. 전자는 오직 자기 자신과 간섭한다. 이를 “자기 간섭”(self-interference)라 한다. 한 전자는, 틈을 통과했다면, 스크린에 오직 한 점의 흔적만 남길 뿐이다. 우리가 직접 스크린을 보지 않아도 스크린에는 한 점 흔적이 남겨져 있을 것이다. 7만 개 정도 전자를 발사한 후, 우리가 스크린 상태를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스크린에는 이미 오른쪽 그림의 (e)와 같은 간섭무늬가 남겨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의 자기 간섭을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전자의 궤적을 포기해야 하는가? 물론 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99년에 아른트는 차일링거 등과 함께 풀러렌(fullerene)의 간섭무늬를 얻었다. 풀러렌은 탄소 60 개가 모여 축구공 모양을 이룬 분자이다. 2003년에는 하커뮐러 등이 C44H30N4나 C60F48처럼 매우 큰 분자의 자기간섭 현상을 얻었다. 이보다 더 큰 인슐린이나 헤모글로빈, 나아가 백혈구도 자기간섭 현상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일 정도의 총알을 사용해도 어쩌면 간섭무늬가 생길지 모른다. 이 경우 선명한 간섭무늬를 얻으려면 아마도 중간의 담과 벽면의 거리를 아주 멀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중력효과를 줄이기 위해 넓은 우주 공간에 실험세트를 마련하면 될 것이다. 자기간섭 현상은 입자의 절대 크기와 무관하다. 단지 틈의 너비, 틈과 틈의 간격, 그리고 입자 크기와 속도 등의 상대 크기만 중요할 뿐이다. 만일 자기간섭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궤적 개념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고 축구공이나 지구 같은 거시 사물도 자기간섭 현상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거시 사물의 궤적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입자의 궤적을 도입하여 자기간섭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가 그런 설명을 수용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에 속한다. 이런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친 형이상학이 결코 아니다.


4. 봄의 양자운동이론
데이비드 봄의 해석은 입자의 자기 간섭, 슈테른-게를라흐 효과, 터널 효과 등 여러 양자효과들을 입자 궤적을 통해 설명할 길을 열어 주었다. 그의 해석은 1952년 처음 제안되었지만, 물리학계에서 거의 무시되었다. 봄은 점차 자기 해석에 자신감을 잃어갔지만 젊은 물리학자들이 1970년대 말부터 봄 해석을 반영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연구 결과를 내놓기 시작했다. 아래 그림은 입자의 자기간섭을 궤적 관점에서 해명하는 그림이다. 입자의 양자궤적은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을 하밀톤-자코비 방정식으로 변환하여 풀면 얻을 수 있다. 왼쪽에 위치한 두 틈 중에서 위쪽 틈을 지난 입자는 나중에 스크린의 위쪽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 입자는 오직 한 궤적을 따라서만 이동한다. 그런데 틈을 막 지난 입자는 그 초기 위치에 따라 이후 궤적이 민감하게 변화한다. 고전 퍼텐셜은 입자의 경로를 굽게 할 수 없다. 양자 하밀톤-자코비 방정식에는 고전 하밀톤-자코비 방정식에 없는 새로운 항목이 있는데 이 항목을 “양자 퍼텐셜”(quantum potential)이라 한다. 양자 퍼텐셜은 대안 해석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도입한 가정이 아니다. 이것은 슈뢰딩거 방정식으로부터 수학적으로 유도되는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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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ntum trajectories for two slits with a uniform distribution of initial positions at each slit.



봄의 양자운동이론은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제공해주고 있다. 남은 지면은 그의 운동이론을 개관하는 데 쓰겠다. 하지만 여기서 양자 하밀턴-자코비 방정식과 양자 퍼텐셜을 수식을 써서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수식은 쓰지 않겠지만 잠시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기 바란다. 하밀턴 방정식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좌표변환을 “정준변환”(canonical transformation)이라 한다. 적절한 정준변환을 취하면 하밀토니언이 0이 되게 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좌표변환은 “생성함수”(generating function)라 불리는 모종의 매개 함수를 통해 수행되는데, 하밀토니언을 0으로 만드는 정준변환의 생성함수를 “하밀턴의 주함수”(Hamilton’s principal function)라 한다.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이란 바로 하밀턴 주함수 S를 찾게 해주는 방정식이다. 일단 방정식을 풀어 S를 얻으면 이로부터 위치와 운동량을 계산해 낼 수 있으며, 마침내 입자의 궤적을 얻게 된다. 위치의 함수로서, 즉 일종의 마당으로서 S는 한 입자가 한 지점에 놓였을 경우 바로 그 때 그것의 운동량을 결정한다. 그런데 이 함수는 그 입자가 실제로 거치게 될 위치들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그 입자가 잠재적으로 놓일 수 있는 모든 영역에 대한 정보까지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함수는 단순히 한 입자의 궤적이 아니라 동일한 입자들의 앙상블의 거동과 관련되어 있다. 나아가 S의 시간 변화는 이 가상적 집단 전체의 가능한 운동들 모두를 기술한다.

한편 동일한 상황에 놓인 물리계라 하더라도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의 해는 다를 수 있다. 이 방정식의 해 S가 초기 위치만 고정되어 있는 함수일 수 있고, 초기 운동량만 고정되어 있는 함수일 수 있다. 한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의 서로 다른 해들은 서로 다른 앙상블을 기술한다. 하지만 일단 초기 위치와 초기 운동량이 결정되면 그 입자가 어느 앙상블의 일원인지는 상관없이 그 궤적은 하나로 고정된다. 고전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을 통해 본 고전동역학은 일단 입자의 초기 위치와 초기 운동량이 주어지면, 그 입자가 소속된 앙상블에 무관하게 동일한 궤적을 그리게 된다. 앙상블은 단지 입자들의 가상적 집단이고, 한 입자가 어느 앙상블의 일원인지는 실제적 문제가 아니다.

좀 다른 맥락에서 S를 이해하면, S는 입자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으로부터 입자의 거동을 추정하는 장치로 볼 수 있다. 기술하고자 하는 입자가 앙상블의 일원들 중 정확히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을 경우 이 입자의 이후 거동은 앙상블의 거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된다. 고전역학에서 입자의 이후 궤적은 앙상블의 초기 분포와 완전히 무관하다. 앙상블의 분포가 개별 입자들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고전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의 귀결이다. 하지만 양자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은 고전 방정식의 이러한 특성을 파괴한다. 양자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에서 S는 슈뢰딩거 파동함수의 허수부와 일치하는데, 잘 알다시피 양자역학에서 초기 위치의 확률 분포는 S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초기 확률밀도가 입자의 궤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림5에서 입자의 궤적은 입자가 틈을 막 나설 때의 위치에 의존하지만, 그 입자가 속한 앙상블의 초기 분포에도 의존한다. 이 분포를 결정하는 것은, 파동함수의 실수부인데, 이것은 입자가 놓여 있는 전체 환경에 의존한다. 양자 하밀턴-자코비 방정식의 귀결은, 입자의 궤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입자의 궤적이 그와 멀리 떨어진 다른 입자들의 존재에도 의존한다는 것이다.


5. 결론
봄의 양자운동이론이 보여준 것은 입자가 시공간 상에서 연속 궤적을 가진다는 발상이 양자역학의 정식체계와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그의 이론은 입자의 궤적을 실제로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으로부터 계산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와 관련된 논문과 교과서들이 1980년대 이후 점증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봄 이론이 기존 해석을 능가하는 실험적 차이를 산출하지 못했다고 논평한다. 이 논평은 현재 상태에서 거의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양자운동이론이 우리의 상식 존재론을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매력이자 장점이다. myeongseok@gmail.com

2012/02/10 03:00 2012/02/10 03:00
  1. 이보미
    2012/02/11 17:46
    1쪽 마지막 문단 둘째줄
    원래 "공통감각"란 -> "공통감각"이란
    2절 첫문단
    로렌츠, 빈, 폰 라우에, 플랑크, 아인슈타인 등에게 에서 플랑크 중복됐어요^^;
    3쪽
    나아가 일단 A3과 A4를 인정한다면 A5도 인정해야 한다. -> 나아가 A1과 A2부터 A3과 A4를 함께 인정한다면
    이 더 적절한것 같아요.
    5절 결론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되는 매력이자 ->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매력이자 장점이다.
    가 더 매끄러운 표현...ㅋㅋ
  2. 이보미
    2012/02/11 19:37
    질문 폭탄 받아주세요.
    O4를 인정한다고 해서 우리의 시공간 표상에 놓일 수 있다는걸 곧바로 함축하지는 않는데요. 주체 피부 바깥의 사물인건 동의하나, 위치-운동량 불확정성으로 연속적이고 확정적인 궤적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여요. 그 불가피한 불확정성이 측정의 한계인지, 이론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A2~A5는 태양이라는 macroscopic한 대상 내부에서의 원자들을 가리키는데요. 최종 구성물인 해는 객관적이고 일사불란한 변화를 보여주지만, 원자계에서의 변화는 일정한 운동궤적을 보여주지 않을 것 같은데요. 뉴턴이 중력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설명했던 것, 마찬가지로 전자기이론에서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으로 전기력을 설명한것은 r의 매개지수가 정확히 2인 것으로 밝혔지만. 후에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론에서 이 지수가 정확히 2가 아님을 밝혔는데. 고전역학, 고전전자기학에서 구축해온 간결함, 단순성, 매끄러운 공간, 일직선상에 놓이는 연속적인 시간은 더이상 상대론이나 양자론에서 성립하지 않는데요. 상대론, 양자론에서 보여주는 고유의 간결함과 단순성은 이전의 것과 다를거에요.
    제가 궁금한 것은. 양자계는 매우 작은 공간, 매우 짧은 시간을 보아야하는데 이 미시계에서의 시공간은 우리가 경험하고 표상할수있는 시공간과는 매우 다를거에요. 따라서 해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관계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하더라도, 원자계에서의 시계는 우리의 시계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것이에요.
    측정행위가 측정대상을 어느 정도 구성한다는 점 말인데요. 주체와 동떨어진, 주체와 무관한 객관세계라는게 과연 가능한지? 주체와 대상이라는 뚜렷한 대립 구도로부터 근대 철학이 시작되었고, 그 토대위에 근대 학문이 가능했고요. 근대 물리학에서는 주체가 개입되지 않는 주체 바깥의 '객관세계'를 정량적으로(객관적 수치로) 기술하기 위해 노력해왔는데요. 현대물리학에선 더이상 우리 바깥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한다는게 불가능하잖아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만 하더라도 관측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운동, 측정행위가 측정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봤을때. 우리가 알고자 하는 물리계는 이미 우리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고, 우리가 얻고자 하는 정보에 의해 부분적으로 형성되는 것 아닌가요. 이것이 물리 이론은 주체의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단순무식한 얘기는 아닐텐데요. 어쨌든 지금과 같은 지각능력과 이성을 갖춘 인간이기에 가능한 인식구조가 있을텐데요, 그 인식구조를 통해 들어온 외부에 관한 정보는 이미 우리가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주조'되어 있을 거란걸 부인하기는 힘들것 같아요.
    양자 궤적을 그려낸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수없는 양자계의 개별입자 혹은 앙상블을 일상경험에 걸맞는 표상에 들어오도록 이론으로 interpolate, extrapolate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는 건 단언할수있는 사실.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을 저는 학교에서 전자 빔으로 배웠었는데, 원래 실험 설정과는 다른것이었군요! 은원자의 자기모멘트가 은원자 최외곽전자의 자기모멘트와 같다고 가정한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나요?
    보어는 전자의 스핀은 시공간 표상을 통해 이해할수 없다고 했는데, 당연한것 아닌가요? 운동량과 같은 물리적 외부환경의 영향을 받는, 시간-위치에 관계된 속성은 시공간 표상이 가능하겠지만. 스핀은 전자의 고유속성이고, 시간-위치에 따라 놓이면서 바뀌는 속성이 아니기에.
    전자의 슈테른-게를라흐 효과를 실험을 통해 보이는것이 왜 불가능해요? ㅇㅅㅇ 공부절대부족.....닥공
    • 클라라
      2012/02/12 02:30
      네 질문에서 가정하고 있는 몇 가지 논제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이 글의 목적이다. 만일 태양 안에 있는 원자가, 우리가 그 원자의 위치를 측정하기 전에, 이미 저기 멀리 떨어져 있다면, 우리가 그것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저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 원자는 측정 전에 위치를 가진다. 이 경우 불확정성을 측정의 불확정성으로 여기든, 존재 자체의 흐릿함으로 여기든 상관 없다. 원자가 저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원자를 이미 시공간 상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 이야기해 보자.
  3. 이보미
    2012/02/11 19:37
    저같은 꼬꼬꼬꼬마에겐 4절은 양자운동이론의 개관 조.차. 안되는것 같아요 ㅠㅠ
    틈을 막 지난 입자는 그 초기 위치에 따라 이후 궤적이 민감하게 변화한다는데서요. 고전 퍼텐셜도 마찬가지인가요? 양자 하밀톤-자코비이든 고전 하밀톤-자코비이든 초기조건에 민감하다는 말씀이신지?
    S를 얻으면 위치와 운동량을 계산해 낼 수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개별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인거죠? 결국은 동일한 입자들의 앙상블의 거동과 관련이 있다지만.
    애초에 앙상블은 가상의 개념인가요? 양자 H-J에서는 앙상블의 초기분포는 실제적인 문제를 낳으므로, '가상적' 집단이라 부를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고전 H-J는 초기 위치, 초기 운동량 모두가 결정되면 그 입자의 궤적은 하나로 고정되는 반면. 양자 H-J는 초기 위치와 운동량 모두가 결정될 수 없는 거죠? 그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으로 부터 궤적을 추정하는 것?
    양자궤적은 그림5 밑의 설명, uniform distribution of initial positions와 그 입자가 속한 앙상블의 초기분포에 의존하는 거죠? 여기서, 앙상블의 초기분포라는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떤 입자들끼리 앙상블을 이루는지의 분포를 넘어서 그 앙상블들의 초기 위치의 확률 분포까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앙상블의 초기분포가 입자가 놓여있는 전체 환경에 의존한다면, 양자 하밀톤-자코비 방정식의 귀결은 입자의 궤적이 그와 멀리 떨어진 다른 입자들의 존재, 즉 그 입자가 속한 앙상블 외에 다른 앙상블 까지도 의존한다는 건가요?
    4절은 제가 모르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너무 압축요약되어 있어서 내용을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요. ㅠㅠ
    • 클라라
      2012/02/12 02:20
      고전역학에 따르면, 자유입자는, 중력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한, 등속직선 운동을 해. 따라서 틈을 지난 입자는 등속직선 운동을 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고전 퍼텐셜은 입자의 경로를 굽게 할 수 없다"고 말한 거야.

      앙상블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봄의 양자운동이론에서 입자는 명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가진다. 불확정성은 오직 측정의 불확정성이야. 우리가 위치와 운동량을 명확하게 측정할 수 없을 뿐, 궤적이 동시에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니야. 이것이 봄의 양자운동이론의 핵심 가정이야.

      앙상블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이건 파동함수의 해석, 그리고 상태 개념 등과 연관된 문제이다.
  4. 이보미
    2012/03/08 22:34
    뜬금없는 질문. 선생님께서는 물리학을 탐구하는데 필요한 선험적 인식이 있다면, 그것은 충족이유율 이라고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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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아영 작가의 전시회를 소개합니다. 11월 28일까지 인사동 경인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열립니다. 11월 29일부터 12월 2일까지는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에서 있습니다. http://art.nstory.org/entry/구아영-뉴런-기억-세계-Trace-of-the-World-in-Neurons

라이프니츠는 세계가 생명체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그 생명체 하나하나는 전체 세계를 제 나름대로 조망해주는 뷰포인트이다. 우리 세계는 한 부분이 나머지 다른 모든 부분을 비추어주는 몹시 기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생명체는 세계 전체를 어렴풋하게 또는 또렷하게 표상한다. 이것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보들이 한 생명체 안에 무한히 접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또한 한 생명체 안에는 무수히 많은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코드까지 접혀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나아가 우리 세계는 가능한 모든 조망들이 빠짐없이 존재하는 꽉 찬 세계이다. 생명과 기억과 지각과 인식으로 가득 찬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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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es of a city, collage on digital pigment print, 29.7cm x 42.0cm (2011)



우리는 세계가 생명과 지각과 정보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경험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 마음이 단순히 자기 속의 소동과 소란과 혼란과 환상들의 뭉치가 아니라, 전체 세계를 제각기 드러내는 정보더미라는 것은 은연중에 믿고 있다. 구아영 작가는 전체 세계가,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세계가, 말하자면 고대인들, 중세 기독교인들, 샤갈과 클림트와 고흐 등 예술가들이 본 세계가 자기의 마음 속에 흐릿하게 접혀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신체는 그림들의 갤러리인데 이 그림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 붓으로 여러 가지 색깔로 점묘하고 있다.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촉각과 미각은 제 나름으로 세계를 그리는 프레임들이다. 내 살점 한 점 한 점, 내 세포 하나하나, 내 뉴런 한 줄 한 줄, 내 두뇌의 모든 세세한 주름들은 전체 세계를 바라보는 뷰포인트들이다. 그 주름 속에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날들의 세계가, 심지어 내가 만난 사람들의 세계가, 그들이 만난 사람들의 세계가, 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만난 사람들의 세계가 중첩되어 있다. 우리는 작가의 작품들에서 뉴런 한 줄 한 줄 속에 접혀 있다가 펼쳐지는 세계의 여러 측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뉴턴은 시공간이 신의 감각중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세계를 이루는 한 점 한 점 사물들이, 생명체들이, 마음들이 세계의 감각중추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특히 우리 마음은, 우리 몸은, 우리 세포들은, 우리 뉴런들과 신경들은 전체 세계가 무엇과 같은지를 드러내는 감각중추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세계의 신경이며, 나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슬픔, 사랑과 미움은 곧 세계의 감정이다. 나의 느낌과 기억들은 세계의 변화들과 다양성과 역동성을 표상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우리 뉴런들의 타래가 자연과 계절, 문명과 도시화, 공동체와 문화를 잉태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 문명의 미래, 세계의 종말을 감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태 대지와 동산과 전원에서 출발하여 농장과 목장과 공장과 도시로 모여 들었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미래를 통제하지 못한 채, 오히려 과학기술 시스템 자체가 우리를 데려다 놓는 곳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 그곳에 무엇이 있으며, 그곳에서 인간 삶이 어떠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은 세계를 갈고 짜고 짓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세계를 계속 조망하고 꿈꾸고 그릴 것이다.

결국 인류와 문명과 세계의 운명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뷰포인트를 가지느냐에 따라 정해질 것이다. 이것은 세계와 조망 사이의 상호 피드백이다. 자연세계는 우리 뉴런의 네트워크를 설비했으며 우리는 이 네트워크를 통해 세계를 조망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새로운 조망을 창출함으로써 우리 뉴런 네트워크를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재구성할 것이다. 자연세계가 우리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살도록 강제하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제 나름대로 꿈꾸고 바라고 글 쓰고 노래하고 그린다. 구아영 작가는 새로운 조망을 통해, 그의 신경 회로를 재설비하고, 그로부터 그의 정서와 감정과 느낌들을 분출하고, 마침내 세계를 재창조하고 있다. 김명석

2011/11/26 22:04 2011/11/26 22:04
  1. 임재일
    2014/03/13 23:32
    안녕하세요~
    예술을 사랑하는 청년입니다.
    티스토리를 활용하고자 제가 좋아하는 구아영 교수님의 글이 올려진 곳에 왔습니다.
    힘드시겠지만 티스토리를 초대해주신다면 서로 공유하는 좋은 커뮤니티가 기대되어 집니다.
    jaeillim198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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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고인석 선생께

2011/11/16 00:58
선생님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중간에 발제자도 바뀌어 결국 제가 하게 되었는데 일주일 동안 발제 구상한다고 정신이 없었고 발제 마치고 복잡한 심경으로 마음이 불편했어요. 저의 메타피지컬 마인드가 지성적 잡음처럼 들리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것이 세계이든 자연이든 신이든, 인간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원초적으로 생각하는 존재, 원초적으로 말하는 존재를 필요로 했는데 이 존재를 도입하려고 시도하자마자 듣는 사람들은 제 주장을 학술적 논의가 아니라 종교적 논의로 간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든 과학적 회의주의자이든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학술적 논의(진리 탐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결국 저는 두 진영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합니다.

역사상 가장 지성적으로 합당한 신학은 아마도 스피노자의 철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철학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철학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사람에게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자연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는 모형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 과제는 철학사에서 아직 아무도 성취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말장난으로 이 문제를 도외시할 자신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최근 저는 유아는 얼굴 없는 사람으로부터 자연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사람은 어떻게 자연언어를 갖게 되었을까요? 자연언어의 진화를 부정하는 저로는서 점차 미궁에 빠지고 있습니다. 얼굴없이 자연언어를 말하는 존재가 과연 가능할까, 그런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언어를 해석할 수 있을까, 최초의 인간은 그에게서 자연언어를 배울 수 있을까?

분명 스피노자의 신(자연)은 아마도 자연언어를 구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연언어를 구사하면서 얼굴을 가진 존재는 오직 우리 인간 뿐입니다. 반면 성경에서 신은 자주 얼굴을 가진 채 등장합니다. 이것은 한편에서 매우 합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얼굴을 가진 신을 몹시도 황당하게 여깁니다. 저도 얼굴을 가진 신의 존재를 지성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버클리의 주장처럼) 자연언어의 창시자로서 신이, 그리고 오직 그 신만이 자연언어를 확산 및 유포시킬 수 있다면, 그 신은 아마도 얼굴을 가질 수 있는 존재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 자체를 신의 얼굴이라고 여겨야 할까요? 아무튼 얼굴을 지닌 예수를 신과 동일시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더욱 더 저에게 설득력 있게 하지만 여전히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저에게 두 가지 선택이 남았습니다. 지금처럼 자연언어의 자연 진화를 계속 부정할 것인가? 그래서 얼굴을 가진 또는 가질 수 있는 원초적 타자의 존재를 요구해야 할까? 아니면 다른 자연주의 언어철학자처럼 자연언어의 자연 진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그래서 우리 언어 내의 다양한 규범과 형이상학을 엉킨 코드 또는 밈 바이러스로 해석하고 그것을 제거하거나 디플레이션해야 할까?

최근 이병덕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연으로부터 규범을 이끌어낼 수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깨어진 적이 없다고. 어쩌면 이것은 철학에서 거의 영원한 진리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병덕 선생은 자연주의를 반대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빅뱅부터 지금 현재까지 모든 과정은 자연 과정이지만, 우리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연이 말해주지 않는, 말할 수 없는 실천과 규범의 문제라고. 저는 이것이 몹시 모순적인 말로 들렸습니다. 지금까지 인간 행태와 현상이 자연 과정의 결과였다면, 왜 미래도 그러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일까요?
2011/11/16 00:58 2011/11/16 00:58
  1. 이보미
    2012/03/08 23:39
    원초적으로 말하는 존재, 원초적으로 생각하는 존재. 즉 초월자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 그와 같은 절대자, 무제약자, 전체 혹은 신을 생각할때는 추론의 도약, 생각의 단계에 불가피한 불연속성이 일어날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친숙한 common-sense, good-sense만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한 문제인듯. 그와 같은 문제를 생각할때는 연역, 귀납의 매 단계마다 촘촘이 생각의 고리를 연결시켜 연속적으로 추론을 전개해나가는것이 불가능해 보여요.
    분석적인 틀로 과연 형이상학적 주제에 접근이 가능할지? 저는 의문이에요.
    자유의지를 긍정하는 철학적 모형을 세우려고 할때, 유물론자들에게 반박되기 쉬운 이유가 바로 이것에 있는 것 같은데요. 근거에 집착하는 추론의 방식으로, 근거를 실증적으로 제시하기 어려운 주장을 펼치려 하니까요. 하나의 주장을 실증적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 인풋-아웃풋의 확정적인 인과관계의 틀인 알고리즘이 가능하겠죠.
    제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유는 추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전제로부터 출발해 일의적으로 결론에 이르는 것이 반드시 실제적이지만은 않은 문제들이 훨씬 많을거에요.
    저는 이성적 판단이라고 우리가 여기는 것이 -선생님께선 '지성적 잡음'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차근차근 추론을 통해 이르게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요. 보다 원초적인 거대한 욕망과 결부되어 있지만, 이성적 판단이라 오인하게 되는 불안정한 믿음이 형성되고, 후에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논증을 제시하는 거라 봐요. 또 선생님께선 지성을 너무 좁은 의미로 제한하시는건 아닌지..
    피융피융ㅠ_ㅠ 과제하려는데 자꾸만 생각이 뻗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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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남아도는 친구들은 아래 파일을 읽고 피드백해주세요. 제가 다음 주에 어딘가에서 발제할 내용입니다. 어려운 부분, 모호한 부분, 논리적 비약이 심한 부분을 지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5절 내용이 매우 빈약한데 발제 시간과 지면의 제약 때문에 줄였습니다.







언어철학, 과학철학, 심리철학 등 최근 논의를 종합해보면, 인간 언어의 출현은 자연과학을 통해 결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현상 자체의 복잡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리상 불가능합니다. 많은 진화론자들은 인간 언어가 새들의 노래, 개의 짖음, 벌의 춤, 개미의 페로몬 분비 등과 같은 차원의 의사소통 수단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면서 안드로메다 외계 생물학자가 지구에 와서 생명체들의 다양한 언어를 추적할 때 인간 언어를 다른 동물들의 언어 비슷한 차원으로 파악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과학철학과 인식론과 언어철학에 대한 거의 완벽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컨대 개미가 페로몬을 분비함으로써 정보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안드로메다 외계 생물학자가 지구에 와서 개미들의 페로몬 의사소통을 감지할 수 있기 위해서, 그는 지구의 물리학자와 동등한 물리학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물리학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과 비슷한 논리와 문법을 가진 언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안드로메다 외계 생물학자가 여러 동물들의 의사소통 수단들을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우리 지구 사람들과 명제 수준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그는 인간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모든 인지자는, 과학을 가진 모든 과학자들은, 그가 외계 생물체라 하더라도, 우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 언어가 다른 동물과 완전히 다른 수준의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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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표준 생물학은, 특히 진화론은 “심적 사건의 인과적 효능”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심적 사건의 인과적 효능이란, 심적 사건이 다른 물리적 사건을 야기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현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나의 의도와 의향이 내 신체를 움직일 만한 인과적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그 의도와 의향이 나의 두뇌상태나 신체상태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는 자유의지를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도나 의지가 단지 두뇌상태나 신체상태에 불과하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리적 사물이 “자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표준모형과 표준동역학은 자유를 위한 그 어떤 여지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다니엘 데닛 같은 철학자는 자유의 개념을 바꿈으로서, 물리적 사물들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 미래 행위가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는 것을 보장해주는 자유입니다.

역사상 많은 철학자들이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가능하다”는 견해를 “온건 결정주의”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물리주의 또는 자연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온건 결정주의를 거부해야 합니다. 왜 이를 거부해야 하는지 보다 엄밀하게 논증할 수 있지만 여기서 생략하겠습니다.

셋째, 표준 생물학은 우리의 도덕성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많은 진화생물학자들은 왜 사람들에게 이타적 행동이 나오는지 자연선택을 통해 설명합니다. 그들은 그런 행동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행동 패턴 X를 생각해 봅시다. 그 패턴 X는 개체의 생존과 번식 또는 유전자의 번식에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이제 이 행동 패턴 X는 착한 것일까요 못된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어떤 행동 패턴 Y를 생각해 봅시다. 그 패턴 Y는 개체의 생존과 번식 또는 유전자의 번식에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이제 이 행동 패턴 Y는 착한 것일까요 못된 것일까요? 진화윤리학자가 자기 학문에 충실하다면, X는 착한 행동이라고, Y는 못된 행동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들은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특정 행동 패턴의 적응력은 그 행동의 도덕성을 판단할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표준모형과 표준동역학은 원리상 인간 행위의 도덕성 문제를 다룰 수 없습니다. 이러 저러한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그 일을 벌어지게 하는 행위를 착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이러한 막다른 골목에서 진화론자들은 인간 도덕성은 무의미한 개념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아래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입니다. 중간 중간 생략을 했습니다.

왜 우리는 살인자나 강간범 같은 결함 있는 사람에게는 고장 난 자동차를 대하듯이 반응하지 않는가? 살인자나 강간범은 바로 결함 있는 부품을 가진 기계가 아닌가? 우리 몸의 신경계를 연구한 결과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책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물론 비난과 책임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더 잘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간편하고 유용한 수단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만든 허구적인 매개물일 뿐이다.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자의 유전자를 벌하라」
2011/11/03 03:32 2011/11/03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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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화에게

2011/10/04 12:34

잘 읽었어. 주의를 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그 날 대화에 등장한 구체적인 사람들 가운데 그 어떤 사람도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않았다. 나는 특정 의견에 대해 비판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좀 성급한 면이 있는데 내가 그 의견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그 의견의 부정적 효과를 너무 지나치게 과장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스토아학파의 견해를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것은 스토아학파의 견해가 단일체계가 아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한글 위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사색과 철학에 관한 내용을 토대로 쓴 《명상록》이라 불리는 에세이를 남겼다. 그는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 세네카와 함께 스토아 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금욕과 절제를 주장하였으며 수많은 명언을 남길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였다. 전쟁터에서 틈틈이 쓴 그의 <자성록> 12편은 로마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인 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 정책상 기독교도를 억눌렀다.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명상록》에는 철학인으로서의 그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아우렐리우스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그가 스토아학파라 하더라도, 그는 시대의 한계 내에서 살 수밖에 없다. 노예를 "살아있는 도구"로 여기고 노예 해방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을 무참하게 박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로마의 근간을 유지하기 위해, 황제로서 모든 일을 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를 한 측면에서 "언제나 인정이 많고 자비로워 백성을 널리 사랑하였으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이런 표현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21세기 관점에서 볼 때, 그는 인간의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시대의 노예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 있지만, 나는 결코 아우렐리우스주의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계속 예수주의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토아학파 중 에픽테토스는 노예 출신이었다 하니, 스토아학파가 인간의 미래와 비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나는 스토아학파의 견해를 정확히 모르고 있다. 분명 안빈낙도의 삶, 내적 무모순의 삶이 개인의 삶에게 유익할 수 있다. 나는 그리고리 야코블레비치 페넬만의 자세에 경탄을 하게 되는데 분명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몹시도 강력해 그의 삶은 나에게 몹시 급진적인 삶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 정순한 삶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 인간의 미래에 빛을 던져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안빈낙도의 삶을 어디까지 지속할 수 있을까? 세상이 우리는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내가 "정치적 변절"이라고 표현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치적 반동"이라는 표현을 한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한 삶이 혁신에 대한 반동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런 삶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러한 삶을 추구할 때 생기게 되는 부작용, 예컨대 모종의 나약함, 보다 정확히 말해 정치적 무감각을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은 몹시 성급한 추정이었고 또렷한 논증도 없다. 분명한 것은 내가 그런 견해를 가진 한 개인에 대해 폄훼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정치에 무관심한 내 친구나 특정 개인을 함부로 폄하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적 삶을 추구하는 것보다 낫다는 견해에 반대할 뿐이다. 다시 말해 정치에 무관심한 개인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무관심이 더 낫다는 견해에 반대할 뿐이다.

그 날 대화에 참여한 친구들이 이 점을 잘 알았으면 좋겠다. 나는 특별히 화내지 않았고 격렬하지 않았고 공격적이지 않았다. 나는 의견들이 충돌할 때 의견에 대해서 논쟁하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의견에 대한 비판과 그 의견을 가진 사람에 대한 비판을 구별하지 않는다. 포퍼는 다른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은, 자기 행동 방식에 대한 저항 또는 오류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한다. 다른 동물은 오류가 발견되는 순간 그의 존재가 위태로워진다. 하지만 사람은 오류가 발견되는 순간 그 오류를 자기 자신과 분리하고, 그 오류를 죽여 버린다. 이것이 포퍼의 생각인데, 과학이란 자기 자신과 자기 견해를 분리함으로써, 견해를 끊임없이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은 성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견해를 비판하고 버리는 과정 자체가 과학이라는 것이다. 나는 오직 이러한 포퍼식 과학 정신으로 대화에 참여한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억압하는 시스템과 견해들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격한다. 물론 내 견해가 오히려 타인을 억압할 수 있다. 나는 이런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을 늘 환영한다. 내가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은 단순히 타인을 비판하기 위해서 아니라, 우리 견해가 갖고 있는 오류를 노출하고, 그 오류를 우리 자신과 분리시키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내 견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내 견해를 치열하게 논박해주는, 정서적으로 반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 견해가 왜 잘못된 것인지 치열하게 논증하는 사람들을 나는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견해의 내용 그 자체만으로, 논증 없이, 또는 자신이 정확히 무엇에 반대하는지 모른 채, 반감을 가지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오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을 떠나는 것을 두려워 하고 조심하고 신중하다. 소영이는 내가 정치가 첫째이고 시(예술)가 언제나 둘째라고 말했다. 이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 자아는 오직 타자의 공간에서 살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은 심지어 유아론적 경향을 보이는 데카르트, 버클리 등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은 두 축이 있다. 하나는 생각하는 내 존재의 확실성이다. 하지만 이 확실성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확실하게 판단하는 것이 참으로 참말이라는 것을 보증할 타자 즉 신이 필요했다. 이것은 데카르트 인식론의 다른 축이다. 한 축이 다른 축을 포괄하지 못한다. 오직 나 혼자서는 아무 곳에도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은 버클리 인식론이 잘 보여주고 있는데, 오직 내가 갖고 있는 관념과 지각만으로는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버클리는 자아의 관념들이 모종의 언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언어는 자아가 스스로 만든 언어가 아니라 타자의 언어, 즉 신의 언어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데카르트와 버클리는 자기 인식론이 유아론으로 함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생각하는 다른 자아를 원초적으로 가정해야 했다. 이것은 자아가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아는 이미 타자 또는 타자들의 공간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내 인식론의 핵심 테제이다.

나는 타자의 공간을 공동체라고 부른다. 이 공동체 속에서 삶을 나는 "정치적 삶"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것이 내가 정치에 대해 갖고 있는 관념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족정치에 영향을 받고 있다. 가부장정치 속에서 자라났다면 나는 가부장적 인물이 될지 모른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이미 국가의 통치 이념에 영향을 받았다. 우리 학교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 특정 정치 견해를 가진 선생들이 나를 교육했고 특정 정치색을 띤 교과서를 내가 읽어야 했다. 가령 우리는 예절을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갖추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배웠다. 이것은 매우 정치적인 견해, 특히 정치적으로 나쁜 견해이다. 왜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갖추어야 할 어떤 것으로 예절을 배우지 않았을까? 왜 선생들이 나에게 그토록 "무례"하게 대할 때, 주먹 또는 신발로 내 빰을 때릴 때, 나는 그것이 예절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한국에서 "인권"을 교육 과정에 철저하게 배제할까? 왜 "인권"이라는 별도의 교육과정이 없는 것일까? 한국에서 학생인권조례 같은 것은 고작 몇 년 전에 만들어졌다. 그것도 정치적 과정을 통해 선출된 진보교육감을 통해서 실현되었다. 나는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성향에 크게 영향 받는다. 우리가 기형적 정치 구조를 가진, 가족, 조폭 같은 친구와 선생들 속에서 함께 성장했다면, 나는 내 인격의 몇 할을 그들과 공유하게 될 것이다. (가령 나의 공격 성향 같은 것.) 이것이 내가 정치적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도가니는 인화학교 내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한국 사회가 그런 도가니라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모든 일이 잘 돌아가고 아늑하다고 생각할 때, 누군가는 이곳저곳 이 밀실 저 밀실에서 죽음보다 큰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 물론 우리는 즐겁고 기쁘고 웃으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도 함께 즐겁고 기쁘고 웃으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바라야 한다. 그런 바람이 없는 채 쓰는 시는 나에게 시가 아니다. 그런 바람을 담은 채 쓴 시는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공동체 속에서만 써질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시보다 정치가 더 중요하다.

내가 청소 문제로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 것에 대해 몇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그 글을 쓴 까닭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제발 청소 좀 해"라거나 "청소 안 해 실망이야"를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댓글에도 달았듯이 나는 사실 보도를 해놓고 싶었다. 이 사실 보도를 내가 해야 했던 이유는 실망이나 강요가 아니라, 오히려 포기를 뜻한다. 나의 사실 보도는 다른 친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진지하고 심각한 의도가 담겨 있다. 청소를 다른 사람이 해주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이 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자신은 오직 다른 사람이 해줄 것이라고 안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갖고 있는 함축을 말하고 싶었다. 이것을 국가 공동체의 문제로 확대시킬 수 있다. 이것은 내가 그토록 줄기차게 비판하고자는 참여 부재의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당장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하고 싶어 한다. 모두가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가 예외가 되기를 바라는 일의 나머지들이 존재하게 되고, 그 나머지 일들을 누군가에게 강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 단위에서 누군가에게 늘 설겆이를 미루고 누군가에게 고된 돈벌이를 늘 미룰 수 있다. 이것이 보다 큰 사회로 가면 갈수록, 국가, 또는 국제 사회에 가면 갈수록 엄청난 문제를 유발하게 된다. 내가 청소 문제를 제기한 것은, 우리 자신의 이러한 성깔, 자세, 태도를 직시했으면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비난 받기를 싫어한다. 그래서 나의 그 글 때문에, 비난 받기 싫어 청소를 마지 못해 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청소가 뭐가 중요하냐고 맘속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런 상황들을 만들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구를 비난할 마음이 없고 청소의 중요성을 주장할 마음도 없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 지금까지 누군가가 했고 그 누군가가 기쁜 마음으로 앞으로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시시비비는 말해야 했다. 좋은 공동체는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우리에게 좋은 공동체를 만들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는 좋은 공동체를 만드려는 희망을 조금씩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공동체 자체를 희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상상화의 의사소통 비관주의에 대해 짧게 말해야 겠다. 나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믿는다. 의사소통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의사소통을 쉽게 중단한다. 내가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믿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나는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과 계속 의사소통할 것이다. 하지만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과 의사소통을 계속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의사사통에 관한 한, 오직 이것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2011/10/04 12:34 2011/10/04 12:34
  1. 노소영
    2011/10/04 14:35
    정치와 예술의 관계를 말할 때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말하시네요? 연관성이 궁금..
    그 다음 문단에서 '그런 바람이 없는 채 쓰는 시는 나에게 시가 아니다. 그런 시는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공동체 속에서만 써질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게 시보다 정치가 더 중요하다.'

    -선생님에게가 아니라 원래 그런 바람이 없는 채 쓰는 시는 진정한 시도 예술도 아니에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도 예술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예술이나 지향해야 할 예술은 아니고요. (이미, 벌써 가치의 문제를 말할 수 밖에 없는 게 슬프네요!)
    선생님은 아마 '그것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공동체' 만들기, 좀더 실천적으로 공동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행위를 정치로 보시고 정치가 시보다 중요하다고 하신 것 같은데, 예술도 그런 마음 공동체 만들기에 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예술이 더 정치적일 수 있고 저 같은 사람은 예술의 힘을 더 믿는 거죠. 하지만 예술의 힘을 믿는 과정에는 정치적인 선택들이 많아서 정치가보다 정치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좋은 시가 선생님 마지막 말처럼 정치적이든 예술적이든 의사소통에 회의적이고 무관심한 공동체에서는 절대 쓰여질 수 없고 제대로 소통될 수 없는 것도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갑자기 오늘 제 삶의 회의주의에 반하는 희망은 모두 의사소통으로 쏠려있다는 자각을 하게되네요ㅋㅋㅋ 전 선생님보다도 의사소통의 힘을 믿고 의사소통에 회의적인 사람과의 소통까지 믿는 듯.(물론 예술적으로만)

    어쨌든 정치에 있어서도 그냥 정치로 말하는 게 아니라 '좋은' 정치를 따로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선생님은 어쩐지 시보다 정치가 먼저같아 라는 저의 말은 그냥 농담 정도지 논쟁할 거리가 못됩니다.ㅋㅋㅋㅋㅋ
    이 글을 읽은 저로서는 선생님을 정치나 예술로 구분하고 싶지 않고 예술가가 동질감을 크게 느낄만큼 예술적 의사소통의 가능성도 정치적 의사소통의 가능성 만큼이나 많은 사람으로 여겨져요.
    • 클라라
      2011/10/04 21:52
      나는 네가 가지고 있는 "정치" 개념이 나의 "정치"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를 말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치적인"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어서 타자를 이야기한 것이야. 바로 이 부분. "나는 타자의 공간을 공동체라고 부른다. 이 공동체 속에서 삶을 나는 '정치적 삶'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니까 정치와 예술의 관계를 말하기 위해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정치가 무엇인지 말하기 위해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나는 "바람"까지만 말해도 된다. 그 바람에 따라 실제로 행하는 문제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 나도 실천력이 부족한 사람이고, 그냥 말로, 생각으로 바랄 뿐이다.

      네가 시와 예술이 더 정치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내가 말하고자 한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한편 나는 순수예술의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기도 한데, 작품에 정치적 메시지를 일부러 넣어야 예술다워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넣는 것은 작품을 망칠 수가 있다. 실제로 내 삶도 학문과 정치활동을 놓고 보았을 때, 학문이 우선했다. 하지만 내 학문이 누군가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나는 그것을 바라면서 학문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내 학문은 정치적이다. 그런 바람이 내 진리 추구의 원동력이다. 나는 나의 이런 바람이 공동체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믿는다.

      내가 볼 때, 소영과 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언어적 표현의 힘을 더 신뢰하는 것같고, 너는 비언어적 표현의 힘을 더 신뢰하는 것 같다.
  2. 노소영
    2011/10/04 14:52
    또 한가지 청소에 대한 부분에 많이 공감이 가네요!!
    저도 그런 문제가 사소하다고 결코 생각 안해요. 지금 저의 가족 공동체에서도 그런 부조리함과 불평등을 많이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누구나 집에서 느끼고 있겠죠. 저는 특히 최근 오빠랑 제가 모두 대학을 졸업한 성인이 되고 나니 더욱 그런 문제가 크게 보여요.

    그리고 생각실험실에서도 당연히 그런 걸 느꼈고 특히 예감을 실시간 작업 시스템으로 바꾸고 나니 늘어나는 쓰레기와 설거지감 등등을 생각하면 불편해졌어요. 그래서 전 생각실험실에 속했다는 느낌보다는 빌려쓴다는 느낌, 신세진다는 느낌이 강한 거 같아요. 사실 제 작업실이 넓기도 하고 더럽혀도 되는 곳이고 같이 쓰는 사람들이 잘 나오지도 않아서 예감을 진행하기에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자꾸 예감을 생각실험실 소속이다, 전시에 지원해 줄 거 없냐 라고 하실때 불편하고 앞으로는 예감을 작업실에서 할까 라고 생각도 했지만 그건 오히려 선생님과 친구들을 섭섭하게 하고 생각실험실을 떠난다고 느껴질까봐 그만 뒀어요. 작업실이 연신내라 너무 멀기도 하고..ㅋㅋ
    이런 건 다 제가 생각실험실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속으로 가질 수 없고 제가 자유에 대해 추구하는 것들이 이런 무책임한 태도로 드러날 때에 심하게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어제도 라면을 먹고 나서 쌓여 있는 설거지를 보고 수치심을 느꼈고요. 제가 예감을 엄청 사랑하긴 하지만 덮어놓고 좋기만 한 건 아니에요..

    수민이에 대해 거의 탐구 수준으로ㅋㅋㅋ 질문했던 것들도 다 그것과 관련이 있어요. 수민이는 생각실험실 공동체에 굉장히 희망적이고 '가족' 개념까지 말하길래 제 입장엔 너무나 놀라서 지금 하나의 가족만으로도 벅차보이는 사람들이 과연 생각실험실이라는 곳에서 기숙사라지만 같이 주거까지 하면서 가사노동 같은 것까지 잘 분담하며 살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회의가 들었던게죠.
    하지만 수민이의 희망도 미래에 대한 설계일 뿐이고 아직은 아무도 그 문제에 대해 소속여부?를 확실히 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그것이 자유롭다는 게 생각실험실의 정체성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많은 듯) 그저 수민이는 참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주는 꼭 필요한 친구구나 라고 느꼈어요..ㅋㅋ
    예감에도 회의적인 느낌을 많이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수민이가 예감에 와서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걸 느끼고 감사하는 정도예요.ㅋ

    그러니까 선생님도 포기니 어쩌니 하시지 마시고..ㅋㅋㅋ 공동체에 대한 회의도 너무 키우지는 마세요. 저처럼 반은 수민이 반은 회의주의자 소영이...-_-
    생각실험실에 오는 친구들이 그렇게 양심이나 자각이 없지 않으니 청소에 대한 문제도 모두 알고 있지 무관심하지는 않을 겁니다. 생각실험실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반하는 책임의식도 분명히 많이 느낄거고요.
    제가 제일 많이 느끼는데 고치지 못하고 자꾸 불편하다고만 하니까 참... 제가 또 한심해지네요ㅋㅋㅋ
    아무튼 힘내세요! 예감 마치는 시간을 좀 일찍으로 조정해서 청소와 정리 시간을 추가해야겠어요.
    • 클라라
      2011/10/04 20:05
      이미 말했듯이 나는 부담감이나 짐, 의무, 책임, 소속감, 부자유 등의 관점에서 공동체를 묘사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자유로운 선택을 오히려 더 강조하고 싶었다. 내가 청소 문제에 대해 사실 보도라고 말한 것은 누군가의 무책임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무관심이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였고, 나는 이것의 함축을 성찰하고 싶었다.

      우리는 때때로 나 자신의 일이라 하더라도 미룰 수 있다. 청소가 나 자신의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그 일을 미룰 수 있다. 나는 이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하게 될 때, 할 수밖에 없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열심과 열정을 잘 알고 있다.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기쁜 마음으로 "우리 일"을 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없는 한, "우리 일"도 없다. 만일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면 오직 자기 일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오직 자기만의 일을 하든지, 우리 일을 하든지, 각자의 자유로운 선택에 놓여 있다. 이것은 각자의 사랑이 자유로운 선택에 놓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수치심도, 죄책감도, 부담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남이고, 남에게 미루어진 그 일들을 내가 해야 한다면 나는 그 일을 할 때 별로 기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들에게 우리이고, 내가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우리 가운데 누군가에게 미루어진 일이 있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자청해서, 그 일을 먼저 할 것이다.

      나는 강요하고 싶지 않고 부끄럼을 주고 싶지도 않다. 사랑은 강요의 산물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자 축복이며 은총이며 해방이다. 너는 네가 예감과 예감사람을 사랑한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너의 우리 일을 하면 된다. 너의 우리에 나를 포함시킬지, 생각실험실을 포함시킬지는 완전한 너의 선택이다. 네가 그냥 공간을 빌려 쓴다면, 빌려 쓰는 것으로 "의무",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의무" 같은 것을 실행하면 된다. 나는 너에게 어떤 소속감 같은 것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나도 끼워 달라고 너에게 요구할지 모른다 하더라도.) 나는 심지어 가족에 대한 소속감 같은 것을 나에게 "강요"할 때 나는 가족을 떠나고 싶으니까. ㅋㅋ.

      온갖 부담과 의무와 책임에 눌려 있는 우리 친구들에게 생각실험실이 또 하나의 짐이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 모임이, 이 공간이 자기에게 짐이 되지 않는, 아무런 짐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이 모임과 공간을 유지할 수 있게 하자. 그리고 각자에게 그에 맞는 공동체를 선택하게 하자. 그에게 맞는 공동체를 자유롭게 세울 수 있게 하자. 그가 자기 공동체를 맘껏 사랑할 수 있게 하자.
  3. 클라라
    2011/10/04 20:07
    다른 사람들이 상상화와 이 글을 읽어보고 무슨 큰 일이 벌어진 것처럼 착각할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에서, 그 자리에 없었던 그 사람을 옹호하고 '격렬하게' 대변했던 두 친구들은 오히려 나의 정치 과잉에 저항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 이전에 나온 주제가 정치와 시의 우선 순위에 대한 아주 짧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 없었던 그 분은 불필요한 상상과 오해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4. 큐리아
    2011/10/04 20:25
    오히려 <도가니>를 보고 나서 우리가 살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비인간적인 폭력 앞에 제 혼자 살기 바쁘던 기존의 삶의 태도를 돌아보게 된 것이 그 날의 포인트였는데 그런 점이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네요. '우리가 투쟁을 하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라는 영화의 한 대사나, 정의와 평등 같은 말이 얼마나 모순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제도와 권력 안에서 불의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요. 짧은 대화에서 영화에 대한 저희 감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 같아서 좀 답답했고 대화의 포인트가 어긋난 것 같아서 ㅈㅎ도 있을 때 다시 얘기하자고 했던 거에요~
    오히려 내적 일관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건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들이고 우리가 지향하는 가치들에 부끄럼 없이 충실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인데, 선생님께서 이해하시는 내적 일관성을 추구하는 삶이 정치적인 생활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함축해서 얘기가 좀 어긋난 듯해요.
    • 클라라
      2011/10/04 20:41
      그래 내가 그 짧은 한 마디와 몇 낱말만으로 네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을 해석했구나. 그래서 결국 네 의도를 완전히 놓쳤구나. 그때 나의 한마디가 뜻하는 것은, 자신이 연루하지 않는 일, 자신이 사실을 보지 못하는 일, 자신과 무관한 일들을 도외시할 경우, 사회는 아무런 모순이 없어 보이고, 그래서 자기 내적으로도 아무런 문제 없이 평온할 텐데, 이러한 평온함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

      아무튼 너의 댓글에서 "모순"이 뜻하는 바를 나중에 또렷하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모순은 논리적 모순을 뜻하는 것 같지는 않다. 모순은 현실에서 벌어질 수 없을 텐데, 그래서 네가 "모순적 인간"이라 할 때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날 너에게 "내적 일관성" 또는 "내적 무모순"을 들었을 때 나는 이것을 생각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논리적 무모순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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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작년 9월 서강대대학원 신문에 투고한 글입니다. 트위터 등 SNS의 영향력이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쓸 당시 트워터 가입자는 50만 명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400만 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내년에 1000만 명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대 언론사에 의해, 돈에 매수된 댓글부대에 의해, 덜 영향받고 덜 왜곡된 의견 시장이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비록 작년에 쓴 글이지만,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니 내년에 등장할 보다 의미 있는 현상에 대한 예측을 이미 담고 있습니다. 이 예측이 맞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스마트몹이 세상을 조금 더 참하게, 착하게, 아름답게 바꿀 것입니다.




사회발전의 동력으로서 기술 대 기술발전의 동력으로서 사회

이 글은 스마트폰을 예찬하는 글이다. 스마트폰이 가져올 변화를 과대평가하는 맥락은 거창하다. 먼저 기술결정주의라는 다소 끔찍한 견해를 생각해보자. 이 견해에 따르면 기술은 사회 내 다양한 가치들을 결정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 구조와 역사까지 결정한다. 불을 다루는 기술이 도입된 후 인류에게 닥친 문명화와 도시화 과정을 이제 와서 우리가 과연 되돌릴 수 있을까? 기술결정주의는 여러 가지 전제들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몇 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를 지배하고 변화시키는 다양한 힘들 중에서 기술은 중추적 지위를 차지한다. 인류 역사를 고찰해 볼 때 기술 혁신은 사회의 진보를 주도해 왔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이 사회에 도입되고 그것이 그 사회에 일단 정착하게 되면, 그 기술의 진보와 혁신을 막을 만한 다른 사회적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회가 기술을 보유한 만큼, 또한 기술 혁신을 이룬 만큼, 그 사회는 변화한다.

물론 기술결정주의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여태까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와 정치적 의사결정을 통해 기술 진보의 방향을 사회가 통제해 온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극우 우생학, 대량살상, 핵무기 확산, 인간생체실험, 기술 양극화, 생태위기 등의 문제들은 시민들을 자극하여, 사회적 합의를 통해 기술의 진로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기술이 문화와 정치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립적으로 진보한다고 가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기술 발전은 기술 그 자체의 속성만이 아니라 기술 개발자와 사용자의 욕구에도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기술의 자기조직화에 반대하고, 기술이 오히려 사회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기술결정주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이 견해를 ‘기술의 사회적 구성주의’라 부른다. 이 견해에 따르면, 기술을 통제하는 사회적 힘은 단순히 기술이 실패할 때만 발휘되지 않는다. 특정 기술이 성공하고 확산되는 것도 사회 체제에 의해 결정되는데, 기술의 실패뿐만 아니라 성공조차도 사회적 산물이라는 말이다. 가령 단순히 해당 기술의 탁월성을 바탕으로 판단해 볼 때 인텔의 칩, IBM 호환기종 PC,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등의 성공은 설명할 수 없다.

이제 다음과 같은 거창한 물음을 던져 보자. 스마트폰의 진화는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사람들이 더 좋은 스마트폰을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만큼 더 나은 삶의 방식을 취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오직 우리 사회의 진보 수준만큼만 스마트폰이 진화할 것인가? 그래서 사회의 지배자들이 기성 체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스마트폰 기술을 통제하고, 결국 스마트폰 사용자들을 기만하게 될 것인가? 이 물음은 기술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과 세계, 인식과 실재를 매개하는 매체 일반의 문제를 건드린다. 여기서 매체란 안경 현미경 망원경 보청기 계산기 승용차 통신수단에서부터 언어 신화 종교 신문방송 과학 예술 철학까지 모든 인식 도구들을 포괄한다. 이런 인식 도구들이 발전하는 만큼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진보하는가? 만일 사회가 도구의 진화를 통제한다면, 그리고 사회의 지배자들이 그 통제 방식을 결정한다면, 사회의 권력 구조가 특정 도구의 확산과 사용 방식에 반영될 것이고, 기존 구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도구 사용자들을 조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도구의 진화가 사회 진보를 촉진한다면, 혁신적 도구의 확산은 사회의 혁신을 촉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계를 장악해 가고 있는 기술시스템

매체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서 할 수는 없다. 다만 스마트폰이라는 도구의 특성에 주목하고 이 특성의 중요성에 집중하자. 하나마나한 이야기이겠지만 스마트폰은 무생물이고 능동적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가로등과 CCTV가 도시에서 점차 번식하듯이 스마트폰도 거대한 시스템 내에서 번식한다. 그래서 스마트폰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무생물 개체가 번식하는 거대한 시스템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기술계’라고 부를 수 있는 거대한 기술시스템 또는 기술생태계이다. 이곳에서는 기술, 기술제품, 기술개발자, 기술사용자, 마케터 등이 복잡한 연계망을 이루고 있다. 스마트폰은 기술계의 한 부분인 정보통신 기술계에서 서식하는데, 이곳에는 유무선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세계적 통신망, 그 망 내에서 하이퍼링크를 통해 얽혀 있는 정보망, 이 정보들을 검색할 수 있는 엔진과 브라우저, 이 정보를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입출력하는 하드웨어들, 글 그림 음성 동영상 등 다양한 양식의 정보를 산출하는 컨텐츠 생산자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류역사에서 20세기는 아마도 정보통신 기술계가 세계적 수준으로 구축된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개인 컴퓨터, 정보 저장 매체들, 인터넷과 월드와이드웹, 무선정보통신 등이 국가와 국가, 도시와 도시, 방과 방, 개인과 개인을 연결해 놓았다. 19세기에 에디슨이 발전기, 전압을 분배하는 수단, 전기 소비를 측정하는 계량기, 비용 청구 방식, 전기 설비를 확대시키는 법률 등 서로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하여 거대한 전력 시스템을 구축했다면, 20세기의 기술혁신가들은 정보통신 시스템을 구축했다. 스마트폰은 21세기 초 이 시스템의 정점에서 탄생한 매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티브 잡스는 어쩌면 정보통신 시스템의 완성자로 기억될지 모르는데, 그 이유는 지금 그가 기술 경제 정치 문화 예술 등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기존 정보통신 시스템 안으로 규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쪽에 구글,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아이튠즈, 위키피디어, 블로고스피어 등 정보 저수지와 사회 연계망이 있다면, 이 네트워크의 다른 끝에는 개인 단말기로서 아이폰과 아이패드 그리고 그 유사품들이 자리하게 될 것이다. 정보와 단말기를 이어주는 3G망과 와이파이가 혈관과 신경망처럼 세계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될 것이고, 이 전체를 실제 세계에 구현하는 하드웨어들, 기술자들, 컨텐츠 생산자들, 프로그래머들, 판매자들이 이 기술생태계 안에서 적응하고 증식할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계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단계에서 개인들은 새로운 정보통신 수단을 사용할지 말지, 어떤 기술을 선호할지 상당한 자유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정보통신 기술계의 혁신적 잡종 엔지니어들이 개별 사용자들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술 시스템을 만드는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그 다음 수순은 사회 전체가 이 시스템의 지배를 받게 되는 기술결정주의 단계가 시작될 것이다. 정보통신 기술계 안으로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도시에서도 전원에서도 사막과 산악에서도 살기 힘들어진다. 철의 사용을 거부하고 아직도 나무 막대기로 경작을 하는 부족, 전기 사용을 거부하는 소수 공동체들이 점차 사라지듯이, 정보통신 기술계 바깥 변두리에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잠깐, 나는 이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라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스마트폰의 출현과 스마트몹

한편 이 기술계를 자신의 생활세계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제 마침내 이동성과 휴대성이 극대화된 초소형 개인 컴퓨터, 바로 스마트폰을 만나게 된다. 스마트폰의 출현은 봉화에서 전화기 그리고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긴 정보통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과소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길고 넓은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기술시스템이 완비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온갖 어플리케이션을 장착하고 있어 원하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입출력할 수 있는 소형 PC를 개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사소한 사건이 아니다. 웹 2.0이 출현한 이후, 소수의 오프라인 지배자들이 통제할 수 없는 위키 기반 집단 정보 창고들, 블로그 기반 개인 매체들,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사회연계망 등이 인터넷을 점령하고 있는 중인데, 웹 2.0 기반 정보망과 스마트폰 사용자들의 결탁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던 ‘집단정신의 현상학’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하지만 아직은 사소한 징조에 불과한 사건 하나를 이야기해보자. 지난 2010년 지방선거에서 50만이 되지 않는 한국의 트위터 사용자들 중 일부가 선거의 판도에 사회과학적으로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은 주로 아이폰 같은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투표를 독려했는데, 선거가 끝난 후 심지어 여당에서도 트위터에서 투표 독려가 패배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이것이 징조인 이유는 트위터를 하는 사람의 수가 대한민국 전체 유권자 수와 비교해 보면 몹시도 적은 수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이다. 한국의 트위터 사용자가 1000만 명이 되고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1000만 명이 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 과연 오프라인 지배자들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자행하고 있듯이, 포털과 거대 언론과 유착하여 여론과 정보, 의견과 정서, 이슈와 아젠더를 계속 통제할 수 있을까?

창대하게 시작한 글을 이제 미약하게 끝내고자 한다. 내 생각은 이렇다. 비록 정보통신 기술계가 너무 비대해져 개별 사용자들이 통제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예속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비관할 필요는 없다. 시스템이 너무 커서 소수의 지배자들이 전체 시스템을 지배할 수 없고, 그래서 그들이 대중을 지배하기가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히려 기쁜 소식이다. 최근 위키리크스 사례는 초강대국 미국조차도 자신들의 일급비밀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보다 더 중요한 희망의 근거는 정보통신 시스템 자체가 본성상 사회적 연계망, 상호참조의 지식망, 실시간 의사소통에 의해 진화한다는 사실이다. 스마트폰은 어쩌면 정보통신 기술 시스템의 바로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매체이자 기술이다. 시각이 굴절된 사람은 좋은 안경을 써야 하듯이, 이제 정보가 굴절된 사람은 좋은 스마트폰을 써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원한다면, 우리는 더 똑똑해질 수 있고, 스마트폰은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더 똑똑해지기 위해 우리는 오프라인의 불량 지배자들이 통제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수평적 동료들의 의견들에 끊임없이 접촉해야 한다. 이러한 수평적 대화만이 개인이 더 똑똑해지는 길이고, 우리 스스로 사회 자체를 점차 혁신해가는 스마트몹이 되는 길이다.  20100929 myeongseok@gmail.com

2011/08/12 11:57 2011/08/1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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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연철학 서설

2011/07/19 19:49

가. 존재론

미래 자연철학을 구성하기 위해 우리가 받아들여도 되는 논제와 받아들일 수 없는 논제를 가려낼 필요가 있다. 먼저 다음과 같은 기본 논제들을 생각해 보자.

01. 존재: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그것을 세계라고 하자.
02. 변화: 세계는 변한다.

01은 거의 자명하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스스로를 논박한다. 누군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말한다면, 최소한 그것을 말한 이, 또는 그 말이 존재하는 셈이다. 02는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다. 다만 우리의 경험이 이를 말해줄 뿐이다. 세계가 변화하지 않는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가 경험할 만한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그가 변화를 인정하게끔 할 수 있다. 모종의 주장 변화는 세계가 변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존재하고 바뀌는 세계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 있다. 그것은 ‘자연’[피시스]이라는 말이다. 세계의 바뀜을 가장 잘 드러내는 모습은 나고 자라나는 모습이다. 바뀌는 것과 자라는 것들의 모두 또는 바뀌는 모습과 자라는 모습의 모두를 ‘자연’이라 한다. 또는 바뀜 그 자체나 자람 그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자연에 대한 말들을 ‘피지카’ 또는 ‘피직스’라 한다. 01과 02는 과학 특히 물리학의 기본 전제이다.

01과 02는 철학자들에게 간혹 논란거리가 되었지만 다만 인식 주체, 인식 상황 등과 관련되어서만 논란이 된다. 가령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인식 주체밖에 없다, 오직 자아 밖에 없다, 오직 관념밖에 없다, 오직 표상밖에 없다 등. 파르메니데스는 01과 02를 받아들이지만, 그는 세계의 변화는 오직 감각 경험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변화는 다만 환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환영은 다만 인식 주체 속에서만 벌어지는 것이다. 인식 주체가 없다면 환영도 없고 변화도 없을 것이다. 세계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다만 인식 상황 또는 인식 주체에 의존해서 존재할 뿐이다. 이 점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실재’라는 말을 가져올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하는 것은 비록 세계에 변화가 있겠지만 그 변화는 실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 즉 실체는 불변하고 그 실체의 변화 즉 작용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우리는 철학사에서 자주 접하곤 한다.

자연학 또는 물리학은 다음과 같은 ‘반 파르메니데스 논제’를 처음부터 가정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03. 변화의 실재성: 세계의 변화는 한갓 인식의 산물만은 아니다.

인식 주체나 인식 상황을 떠나, 존재하고 변화하는 세계를 ‘객관 세계’ 또는 ‘바깥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말과 비슷한 말로 종종 ‘실재 세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만일 바깥 세계가 없다면,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모든 변화는 사실 우리 경험의 산물일 뿐이라면, 세계의 변화를 기술하고 탐구하는 물리학은 인식 주체의 구성물이라 보아야 한다. 물리학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바깥 세계가 아니라 다만 우리 경험이다. 물리학은 인식 주체의 심리학일 뿐이다. 앞으로 우리가 이야기할 양자역학은 인식 주체의 심리학일 뿐일까? 만일 물리학이 03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물리학은 우주론이 아니라 심리학이 될 것이다. 현대 양자우주론이 심리학 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03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은 03을 그 어떤 수학 정식체계보다, 그 어떤 현상들보다 앞선 원리로서 받아들인다.

우리는 변화가 다양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경험한다. 세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현상된다. 만일 변화가 세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변화의 다양성도 바깥 세계에 부여하는 것은 합당해 보인다.

04. 변화의 다양성: 바깥 세계는 다양하게 변화한다. 바깥 세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바뀐다.

세계 자체가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니지 않는다면,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다양성을 기술하고 추적하기 위해 두 가지 항목을 상정하게 된다. 바로 속성과 사물이다.

05. 사물의 다수성: 바깥 세계에서는 여러 사물들이 존재한다. 서로 다른 사물들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조각들로 분할하는 데 익숙하다. 세계의 분할과 언어의 출현은 매우 관련이 깊다. 우리의 자연언어 자체는 세계를 여러 조각들, 다시 말해 사물들로 분할할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세계를 여러 다른 사물로 분할하는 것은 04에서 말하는 세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추적하기 위해서이다. 자연학자는 세계를 여러 사물로 분할하는 데 보다 전문성을 발휘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세계를 원자들로 분할했다. 현대 입자물리학자들은 세계를 쿼크와 렙톤과 게이지 입자들로 분할한다.

06. 속성의 ‘소유’: 만일 어느 두 사물들이 다르다면 우리는 ‘두 사물이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속성을 가진다’ 또는 ‘속성을 지닌다’ 등에서 ‘가진다’는 ‘나는 돈을 가진다’와 같은 뜻의 ‘가진다’가 아니다. 근본 차원에서 ‘속성’은 05에서 말한 사물의 다수성을 표현하는 장치이다. 가령 세계에 물과 흙이라는 사물이 존재하고 이 두 사물이 다르다고 생각해 보자. 이 다름을 기술하기 위해 우리는 물과 흙에 각기 다른 속성을 부여한다. 물은 젖어 있고 흙은 말라 있다고 말한다. ‘젖음’과 ‘젖지 않음’ 그리고 ‘마름’과 ‘마르지 않음’은 세계에 두 다른 사물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술하기 위한 언어적 장치이다. 하지만 두 사물의 다름 그 자체가 우리 언어나 인식 또는 경험에 의해 창출된 것이라고 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05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탈레스는 세계에 여러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겠지만 근본 차원에서 모든 사물들은 같은 유형이라고 믿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유형상 모두 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세계의 다양성은 보다 복잡하다. 이 복잡성은 복잡한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 물리학자들은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이 관계들을 사물들과 그 속성들로 짜 맞춘다. 한편 세계의 심층 다양성은 사물 유형을 상정함으로써 기술될 수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세계의 사물 유형을 네 가지로 보았다. 그는 세계의 복잡한 변화를 추적하기 위해, 세계는 다수 사물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물들이 또한 다수 유형들로 분류될 수 있다는 발상을 고안했다. 현대 물리학에서 전자와 양성자는 유형이 다른 사물이다. 또한 사물의 다수성은 한층 더 심화된다. 세계에 전자와 양성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전자들과 많은 양성자들이 존재한다. 이제 사물의 속성도 여러 가지로 복잡해진다. 사물의 유형을 결정하는 속성이 있고, 같은 사물 유형 내에서 사물의 개별성을 결정하는 속성이 있다. 앞의 속성을 ‘고유속성’이라 하고 뒤의 속성을 ‘비고유속성’이라 한다.

07. 고유속성: 일군의 사물들이 똑같은 고유속성들을 가질 때 그 사물들은 같은 사물 유형이 된다. 같은 사물 유형은 같은 고유속성을 가진다.
08. 비고유속성: 비록 두 사물이 유형이 같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사물이라면, 두 사물은 다른 비고유속성을 가진다.
09. 동일한 두 사물의 부재: 고유속성뿐만 아니라 비고유속성에서도 차이가 나지 않는 두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제시한 고유속성으로는 전하량 정지질량 고유스핀 등이 있고, 위치 운동량 각운동량 에너지 등은 비고유속성이다. 전자들은 전하량 정지질량 고유스핀 등에서 일치한다. 질량과 고유스핀은 전자와 같지만 전하량이 다를 경우 다른 유형의 사물로 분류한다. 양전자가 그 사례이다. 양성자는 전하량뿐만 아니라 정지질량에서 전자에서 차이를 보인다. 전자들 사이의 개별성은 비고유속성에서 나타난다. 다른 에너지를 가진 전자는 서로 다른 전자이다.

최소한 비상대론 양자역학의 논의 수준에서 물리학자들은 고유속성의 실재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자와 양전자와 양성자의 차이가 인식 상황이나 측정 상황을 통해 창출된다고 믿지 않는다. 논란이 되는 것은 비고유속성의 실재성이다. 사물들은 인식 상황이나 측정 상황을 떠나 서로 다른 비고유속성을 가지는 것일까? 각 전자들의 에너지는 측정 전부터 달랐을까? 아니면 모두 똑같은 전자들이 측정과정에 에너지들이 달라지는 것일까? 전자들의 위치는 어떠한가? 전자들의 스핀은 어떠한가? 특정한 한 순간에 서로 다른 비고유속성들을 가지는 두 전자들을 상정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은 측정 전에 사물의 위치, 운동량, 에너지를 미리 할당하는 것을 거부하는가? 우리가 05와 06과 07을 받아들이면서 08을 부정할 수 있는가?



나. 벨의 두 정리

다음과 같은 것들을 우리가 경험한다고 생각해 보자. 상자 안에 어떤 공이 담겨 있다. 우리는 상자의 윗면 중앙에 난 한 점 구멍으로 그 공의 한 점 색깔을 볼 수 있다. 또한 상자의 아랫면 중앙에 난 한 점 구멍으로 그 공의 한 점 색깔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상자 속에 든 공을 흔들어 공의 방향을 돌릴 수도 있다. 우리는 상자의 윗면 구멍과 아랫면 구멍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우리는 두 구멍으로 본 공의 색깔이 언제나 하나는 빨강이고 다른 하나는 파랑이었다고 생각해 보자.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제 상자 속에 든 공의 전체 표면은 어떤 색깔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 경험의 다양성을 일으키는 원인을 상자 속 사물에 두고 싶은 사람은 공의 표면이 빨강과 파랑으로 미리 색칠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우리는 공의 적도를 기준으로 상반구는 빨강, 하반구는 파랑으로 색칠되어 있다고 추정할 것이다. 그러면 상자 윗면 구멍과 아랫면 구멍으로 언제나 빨강과 파랑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사례는 전자 하나의 스핀 측정과 정확히 같다. z 방향으로 전자의 스핀을 측정하면 그 결과로서 ½ 또는 -½을 얻게 된다. z 방향의 스핀 측정은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처럼 z 방향으로 자기장을 만들어 그 속으로 전자를 통과시키면 된다. 한편 자기장을 x 방향으로 걸어주면 우리는 x 방향의 스핀을 측정할 수 있다. 이 경우 x 방향의 스핀 값으로서 우리는 ½ 또는 -½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측정 전에 전자가 각 방향 스핀에 대해 ½ 또는 -½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만일 z 방향의 스핀 값이 ½라면 -z 방향으로는 -½여야 한다. 만일 x 방향 스핀 값이 -½라면 -x 방향 스핀 값은 ½여야 한다. 이것은 비단 x 방향이나 z 방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3차원 모든 방향에 대해 전자는 스핀 값 ½ 또는 -½를 가지게 될 것이다. 전자가 측정 전에 스핀 값을 가진다는 것은 모든 방향으로 ½ 또는 -½의 스핀 값을 가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를 실현하는 모형을 우리가 구성할 수 있다. 전자의 상반구 방향으로 ½의 스핀값을 가지고 하반구의 방향으로 -½의 스핀값을 가진다고 가정하면 된다.  따라서 전자가 측정 전에 각 방향에 대해 특정 스핀 값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 현상적으로 볼 때, 전자의 스핀을 처음에 z 방향으로 측정한 후 다른 방향 가령 x 방향으로 측정한 다음 다시 원래대로 z 방향을 측정하면 처음과 다른 값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그다지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 아니다. 이것은 한 방향의 스핀 측정이 다른 방향의 스핀 값을 바꿀 수 있음을 암시할 뿐이다. 아무튼 입자가 측정 전에 속성을 미리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포기할 이유는 아직 전혀 없다.

한편 빛알photon의 스핀 값은 전자의 경우와 다소 다르다. 빛알의 x, y, z 방향의 스핀 제곱은 항상 0 또는 1이다. 그런데 직교하는 이 세 방향의 스핀 제곱을 합하면 항상 2가 나온다. 아무튼 이 말은 x, y, z 중 두 개 방향의 스핀 제곱은 1이고 나머지 하나는 0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가령 z 방향 스핀 제곱이 0이라면, x와 y 방향 스핀 제곱은 각각 1이 되어야 한다. 또한 z 축을 중심으로 x 축과 y 축을 회전하여 얻는 새로운 축 x', y', z에 대해서도 동일한 규칙이 성립해야 한다. 이미 z 방향 스핀 제곱은 0이라 했으니, x'과 y' 방향 스핀 제곱은 각각 1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직교하는 임의의 세 축 u, v, w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경험을 상자 속의 공으로 표상할 수 있다. 상자 속에 공이 담겨 있는데, 우리는 윗면, 앞면, 옆면 가운데 난 한 점 구멍으로 동시에 그 점의 공 색깔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공의 전체 색깔을 우리는 동시에 볼 수 없다. 우리는 세 구멍 중에 두 구멍으로 빨강을 보고 나머지 한 구멍으로 파랑을 보게 된다. 이제 상자 속에 든 공의 전체 표면이 빨강과 파랑으로 미리 색칠되어 있다고 우리는 믿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우리 경험의 다양성을 일으키는 원인을 상자 속 공의 색깔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불행히도 이런 색칠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코흔Simon Kochen과 슈페커Ernst Specker가 1967년에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벨의 두 정리 중에서 하나가 바로 이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 정리를 벨-코흔-슈페커 정리라 한다. 이 정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각 방향에 대해 스핀 제곱 값을 빛알에게 할당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빛알이 측정 전에 특정 방향으로 스핀 제곱 값을 미리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스핀 제곱 값을 미리 가질 수 없다면 스핀 값도 미리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물리적 속성이 측정 전에 존재한다는 가정 자체를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달의 속성을 측정하기 전에 달은 아무런 속성도 지니지 않는다는 주장이 참말이란 말인가! 우리는 비고유속성이 오직 측정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벨이 증명한 또 다른 정리는 더욱 충격적이다. 단일상태에 있는 두 전자의 스핀 값을 측정할 경우 일정한 패턴을 경험하게 된다. 가령 한 전자의 z 방향 스핀 값이 ½라면 다른 전자의 z 방향 스핀 값은 -½이다. 물론 z 방향만 아니라 모든 방향에 대해 이 규칙이 성립한다. 이 규칙을 만족하면서 두 전자는 측정 전에 스핀 값을 가지도록 모형을 만들 수 있을까? 앞으로 하나의 공에 대해 그러한 모형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고 했다. 1990년 페레스A. Peres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단하게 증명했다. 이 증명을 통해 매우 복잡한 벨의 애초 증명이 극도로 단순화되었다.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진 두 사물이 얽혀 복합체를 이룰 때 두 사물에 비고유속성을 미리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정리는 벨-아포로 정리 또는 벨-EPR 정리라 한다. 벨의 원래 정리가 1935년에 발표한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의 논문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들이 모여 복합체를 이루면 그것의 속성은 성분 물질들의 속성을 초월하기 때문일까?



다.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

벨의 정리는 양자역학의 실재주의 해석이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모든 비고유속성들을 사물들에게 측정 전에 동시에 모두 부여하는 것은 모순을 낳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07을 포기하는 데까지 후퇴할 수 없다고 믿는다. 최소한 비상대론 양자역학의 논의 맥락에서는 그렇다.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은 벨의 정리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08을 유지하려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비록 모든 비고유속성들을 측정 전에 사물에게 동시에 부여할 수는 없지만, 측정 전에 동시에 부여할 수 있는 비고유속성들의 목록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어떤 사물에 Q라는 비고유속성을 부여한다고 가정해 보자. 물리학자는 비고유속성에 일정한 숫자를 대응하는 데 익숙하다. 한편 사물들이 드러내는 현상들에 따라 그 숫자의 스펙트럼이 결정된다. 가령 전자는 오직 두 가지 스핀 값을 가지는데 이것은 슈테른-게를라흐 실험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실험에 드러난 현상에 따라 우리는 두 개의 스핀 값을 전자에게 부여한다. 한편 사물에 부여할 물리량의 숫자가 연속 숫자가 아니라 불연속 숫자일 때가 있다. 우리가 탐구하는 사물의 비고유속성이 최대 n개의 다른 숫자들에 대응되는 결과만을 현상할 때 우리는 이 사물을 n차원 벡터공간에서 표상할 수 있다. 사물의 상태는 이 벡터공간의 벡터를 통해 표상되고, 사물의 비고유속성은 이 벡터 공간에서 작동하는 에르미트 연산자를 통해 표상된다. 이 에프미트 연산자의 고유값이 n개일 때 이 연산자를 안겹친 연산자라 하고, 이 연산자에 대응하는 비고유속성을 안겹친 물리량이라 한다. 하지만 고유값이 n개 미만인 에르미트 연산자에 대응하는 비고유속성이 있는데 이를 겹친 물리량이라 한다.

앞서 빛알의 스핀의 경우 3차원 벡터 공간에서 기술되어야 한다. 각 방향 스핀에 대응하는 연산자는 3개의 고유값을 가지지만, 스핀의 제곱에 대응하는 연산자는 오직 2개의 고유값만을 가진다. 따라서 스핀의 제곱은 겹친 물리량이다. 두 전자 시스템은 4차원 벡터 공간에서 기술되어야 한다. 한 입자의 스핀은 오직 2개의 고유값만을 가진다. 따라서 개별 전자의 스핀 값은 겹친 물리량이 된다. 벨 정리는 우리가 겹친 물리량에 대해서도 사물이 측정 전에 그것을 가진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사물의 비고유속성 중에서 안겹친 물리량에만 측정 전에 부여할 경우 벨 정의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맥진스키M. J. Maczynski가 1971년에 증명했다.

10. 실재 속성: 사물은 측정 전에도 안겹친 물리량을 가진다.

달리 말하면 사물에게 측정 전에 안겹친 물리량을 모두 동시에 부여해도 된다. 안겹친 물리량을 ‘실재 속성’이라 부를 수 있다. 사물의 고유속성도 실재 속성이다.

11. 부수 속성: 측정 전에 사물에게 겹친 물리량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

겹친 물리량을 ‘부수 속성’이라 부를 수 있는데, 부수 속성은 측정 상황을 통해 구성된다. 물리계를 구성하는 부분이 가진 비고유속성은  부수 속성이다.

12. 측정 상황: 측정 상황을 특징짓는 것은 특정 실재 속성이다.

모든 측정 과정은 특정 실재 속성을 드러내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부수 속성은 실재 속성의 측정 상황에 의해 부수해서 현상될 뿐이다. 사물은 실재 속성을 떠나 부수 속성만을 드러내지 못한다.

13. 속성의 비국소 상황주의: 물리계의 부분 속성은 부수 속성이기 때문에 전체 물리계의 부분에 비고유속성을 측정 전에 부여해서는 안 된다.

멀리 떨어진 사물들이 한 물리계를 이룰 경우 그 물리계는 비국소 현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복합계를 이루는 부분의 비고유속성은 부수속성이기 때문에 측정 전에 전체 물리계의 부분은 비고유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복합계에서 실재 속성이 될 수 있는 것은 부분 사물의 고유속성과 전체의 비국소 비고유속성이다. 따라서 복합계를 특징짓는 실재의 요소는 구성입자의 질량, 전하량, 고유스핀 등과 같은 고유속성, 그리고 복합계 전체의 비국소적 비고유속성이다.

14. 전체주의: 오직 전체의 속성만이 측정 전에 존재한다.

벨 정리의 함축을 받아들이면서 존재론 해석을 고안하려는 사람은 존재론적 전체주의를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부분을 측정하게 될 때 우리가 얻은 것은 단지 세계의 부수 속성일 뿐이다. 우리에게 현상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부수 속성이다. 결국 우리는 사물의 개별성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것을 느낀다. 우리는 어쩌면 05부터 완전히 새로 이야기해야 하는지 모른다.

내가 여기서 개관할 양자역학의 존재론 해석을 가장 잘 구현한 해석이 봄의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 보자.

15. 만일 유형이 같은 두 사물이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면 두 사물은 다르다.

이 논제는 08과 다르다. 08은 유형이 같은 두 사물이 다른 사물이라면 두 사물은 모종의 비고유속성에서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사물의 차이를 비고유속성에서 차이로 바꾸어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15는 사물의 위치가 사물의 차이를 추적하는 비고유속성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15는 공간에 대한 특수한 형이상학을 가정하고 있다. 사물이 여러 입자로 구성된 복합계라면 사물의 위치는 입자들의 배위공간에서 위치를 말한다. 전체 물리계의 배위를 벡터공간상에 표시할 경우 그 차원은 실수 개가 된다. 따라서 배위공간상 위치는 안겹친 물리량이라고 추정된다. 이것은 사물의 위치가 부수 속성이 아니라 실재 속성이라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봄의 이론은 배위공간상 사물의 위치를 측정 전에서 의미 있는 물리량으로 간주하는 이론이다.


노트: 나는 1997년부터 물리학자 및 수학자들과 함께 모든 존재론 해석이 포기해야 하는 주장과 최소한 받아들여야 하는 주장을 찾는 연구를 수행했다. 김명석 등 1998, 「입자는 측정 전에 물리량을 소유하고 있는가?」, 새물리, 한국물리학회. M. Kim et al. 1998, “The Contextuality of the Possessed Values”, Journal of Physics A, Institute of Physics. 김명석 등 1999, 「물리적 속성의 상황의존성」, 새물리, 한국물리학회. 결국 2000년에 실재 속성과 부수 속성을 구별함으로써 실재주의를 유지하는 해석을 제안했다. M. Kim et al. 2000, “Ontological Interpretation with Contextualism of Accidentals”, Journal of the Korean Physical Society. 이후 조상규 교수의 주도 아래 우리 해석을 구현하는 실제 모형을 고안하려 했다. 가장 쉬운 2차원 모형을 만든 뒤 3차원, 4차원으로 확장할 계획이었다. Sang-Gyu Jo et al. 2002, “New Hidden Variables Theory of a Two Dimensional Quantum System”, Journal of the Korean Physical Society. 이 모형에 동역학을 넣어 가능한 모든 변화들을 구현하는 모형도 고안했다. Sang-Gyu Jo et al. 2004, “Completion of a Realistic Theory for a Two Dimensional Quantum System”, Journal of the Korean Physical Society. 공직을 맡게 되어 2005년 이후 연구가 중단되었고 후속 연구결과물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존재론 해석을 실제로 구현한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데이비드 봄의 양자운동이론이라고 추정했다.


이후 내용은 수학식이 너무 많아서 생략.

부록: 벨 정리의 해소
라. 슈뢰딩거 방정식과 봄 이론
마. 하밀톤-자코비 방정식
바. 양자 퍼텐셜 또는 내부 퍼텐셜
사. 개관: 양자운동이론

2011/07/19 19:49 2011/07/1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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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니안의 글

플루토니안에게. 안녕. 네 글 잘 읽었다.


1. 변명

나의 반론 글에서 상대방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부분과 그냥 내 주장을 명확히 하고 해설하는 부분은 서로 섞여 있다. 자기 주장을 말하는 것이 곧 상대방 견해를 반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내가 글에서 P를 주장한다면, 내가 상대방이 P의 부정을 주장했다고 내가 생각한다는 식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

사실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지난 토요일 정민 선생과 논쟁이 원인이 되었다. 지난 내 글은 다른 친구의 문제 제기를 포함하여 정민 선생의 우려에 답하는 글이다. 나는 내가 하려는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해야 했다.

일단 나는 "순우리말"을 지향하지 않는다. 물론 느슨한 의미에서 "순"우리말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암튼 나는 우리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란 현재 한반도 지형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쉬운 말이다. 그리고 그 뜻을 알기 위해 한자나 영어 및 헬라어나 라틴어를 추적할 필요가 없는 말이어야 한다. 물론 나는 우리말에 한자어와 영어와 일본어 등의 흔적이 많이 있다는 것을 동의한다. 또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동의한다.

내가 이해하는 한 ㅇㅇ은 순우리말이라고 불리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ㅇㅇ은 한자어가 우리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언급하고 있다. 물론 ㅇㅇ은 한자어가 우리말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ㅇㅇ이 그런 견해를 언급한 것은 우리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나의 반론은 ㅇㅇ이 한자가 우리말이라고 주장했고 나는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한자어가 우리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말과 우리말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ㅇㅇ은 한자어를 더 많이 써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나는 ㅇㅇ이 그렇게 주장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너의 말처럼, ㅇㅇ이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자라고 주장한 것인 양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으로 읽히는 구절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ㅇㅇ의 의도는 "와"가 순우리말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한자어를 순우리말에서 제외하려는 움직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나는 "와"가 한자어에서 왔다는 주장 자체가 다소 의심스럽지만,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말은 현재 수준의 한자어 사용 빈도를 유지하자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내가 주장하는 것을 명료히 하려고 하면서, ㅇㅇ이 주장하지 않은 것을 말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만일 ㅇㅇ이 한자어 어휘수와 사용 빈도의 감소가 불가능하고, 학문 영역에서 그것을 꿈꾸는 것이 잘못된 기획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의 생각에 반대한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를 곡해한 양 읽히는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2. 나는 급진적인 교육자이다.
왜 내가 그런 주장을 해야 했을까? 그것은 내가 하려는 일을 사람들이 평가절하하기 때문이다. 나의 기획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한자어 애호가들’(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다)의 발상들을 드러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 발상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정민 선생 그리고 너도 그런 발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 수준의 한자어 전문용어 사용이 불가피하다는 발상이다. 이 발상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 사용 빈도를 낮추려는 작업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 그리고 그 작업이 학문의 본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학문의 전문성과 무관하다고, 학문의 깊이와 무관하다고, 교육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업은 일급학자가 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소격화’가 전문학자들에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내 논문에서 당장 ‘거리두기’ ‘떨어져보기’ ‘멀리 놓고 보기’ 등으로 쓸 것이다. ‘소격화’에 어떤 마력이 있기에, 그것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면 학자들이 의사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일까? 이것이 불가피한 “현실적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계속 사용해야만 의사소통이 되는, 그런 불가피한 현실적 상황에 놓인 전문용어는 거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그런 한자어 조어 전문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이 의사소통의 수월성을 준다는 것도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과격한 방식으로 우리말을 사랑한다. 나는 순우리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모든 외래어를 배격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논리학, 철학, 수학, 물리학의 영역에서 전문용어들을 가능한 한 쉬운 일상용어로 바꾸는 것이다. 나는 언어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더 중요시한다. (아니 그것보다 함께 철학을 하고자 하는 나의 어린 배움벗들을 더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자연언어는 거의 동등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자연언어는 구체적인 행동과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 그리고 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 개별자들을 가리키는 명사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토대 위에서 극도로 추상적인 전문용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추상학문 분야에서 한국사람들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전문용어들을 이런 바탕 자연언어의 토대를 상실한 용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과 ‘질’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찾는 데 나는 거의 실패했다. ‘게’와 ‘깔’은 거의 실패한 시도이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양’과 ‘질’이 그 뜻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낱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에 나는 ‘셈모습’과 ‘못셈모습’으로 각기 다르고 쓰고 있다. 셀 수 있는 속성,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모습을 ‘셈모습’이라고 쓰고 있고, 이것을 ‘quantity’의 대안적 번역으로 선택했다. 이것도 좋은 말인지 모르겠다. 이러한 난관과 실패가 내 기획을 포기해야 하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과연 '양'과 '질'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양’과 ‘질’을 일관되게 사용할까? 질량은 양일까 질일까? 온도는 성‘질’일까? 양과 질에 관한 한, 우리는 혼동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이런 혼동들이 우리가 정교한 생각을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형상’이 익숙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저는 이미 익숙해진 말들은 그냥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에 있습니다.” 여기서 ‘익숙해진’은 ‘전문학자들에게 익숙해진’일까, ‘너에게 익숙해진’일까?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가지는 ‘우리’와 네가 관심을 가지는 ‘우리’는 다른 것 같다. 나는 아직 철학 담론에 진입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은 ‘형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원질, 무한자, 도식, 통각, 오성, 이념, 자명성, 본질, 존재자, 보편자, 선험, 초월, 절대, 직관, 선술어적, 표상, 관념, 환원 등은 아마도 너에게, 전문학자들에게 익숙하겠지? 하지만 이제 막 철학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할까? 이런 낱말들이 한 문장에 서너 개, 또는 열 개 들어 있는 문장은 그들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을 거야. 박사 학위를 받은 나도, 이런 낱말이 연속으로 나오는 문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문장을 영어로 읽으면 읽힌다. 이 무슨 조화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완역한 김진성 선생은 ‘형상’을 ‘꼴’로 번역하고 있다. 왜 김진성 선생은 그 익숙한 낱말을 버리고 ‘꼴’을 사용하려고 할까? 여기서 어떤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운동이 있다. 나는 이 움직임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촉진하는 것, 보다 과격하게, 보다 급진적으로 촉진하는 것이 나의 기획이다. 이것이 폭력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다. 하지만 나는 기존 전문용어들이 새로 공부하고자 하는 친구들에게 더 큰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내 관심이 어디에 가 있는지 너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나의 기획은 어떤 문턱을 낮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턱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계급적 장벽으로 기능한다. 나는 사상가이고 기획자이고 혁신가이고 교육자이다. 나는 낱말 따위로 유희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기존 용어가 익숙한 사람들은 계속 그것을 사용하면 된다. 내가 새로 도입한 낱말들이 맘에 들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나는 내 낱말을 사용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새로 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고 싶다. 함께 배움의 길을 걷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도 나와 함께 더 쉽게, 더 멀리, 더 깊게, 더 높이 걸어갈 수 있다면, 그와 함께 쉬운 말을 사용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급진적인 운동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무시한다 하더라도, 폄훼한다 하더라도, 나는 이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너에게 ‘갈말’이 ‘너무 어렵다’면 ‘소격화’를 처음 듣는 사람에게 그것 또한 어려울 것이다. 처음에 모든 낱말은 생소하다. ‘낱말’이라는 말도 처음에 나에게 생소했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낱말’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2011/07/08 22:51 2011/07/08 22:51
  1. Plutonian
    2011/07/09 01:33
    1에 대해서, (좀 수사적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전 우선 순우리말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치만 우리말이라는 범위로 묶일 수 있는 말들이 있는 것 같고, 한자든 영어든 어떤 언어든 이 우리말이라는 것 안에 많은 요소로서 혼합돼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우리말이란 게 없는 것 같은 이유는, 우리말의 낱말 등에서 어떤 기원적인 지점을 찾더라도 그보다 훨씬 더 앞서는 기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말의 순수한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 좀 들어요. "한자어가 우리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여기에 대해 저는 "네. 그 한자어가 바로 우리말이니까 우리말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대답할 것 같아요. 같은 한말이라도 고대의 한말과, 조선의 한말과, 오늘날 한말은 정말 다를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것 모두를 한말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굳이 순우리말이란 개념이 필요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그 다이나믹한 묶음 자체가 한말 아닐까요.

    왜곡과 오해에 대한 설명들은 저는 그냥 넘어갈게요. 전 어떤 방식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그건 두 분 입장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리고 2에 대해서, (사실 핸드폰으로 글을 읽고 있다가 이 부분에서 컴퓨터를 켰습니다!) 우선 제가 한자애호가(라고 불리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지만)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선생님께서 뭐라 비판하시든지 제가 받아들일 수밖에는 없는 게, 저는 한자 한 자에 담긴 이미지 자체와 그 이미지들이 조합하여 또 다른 한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매우 흥미롭고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유희적 측면에서 그런 거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여러 이미지가 한 자 안에 들어 있는 한자가 꽤 경제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한자어를 계속 씁니다. 근데 이건 좀 이기적인 거죠. 한자를 익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그것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테니까요. ('모양'과 같이 거의 한말인 것인 냥 익숙하게 쓰이는 말들은 일단 제외하고요.) 여기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은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선생님의 작업을 "학문의 본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학문의 전문성과 무관하다고, 학문의 깊이와 무관하다고, 교육과 무관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추측하신다면 이건 순전한 오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께서 다듬는 여러 말들 중에 제게 한자어보다, 영어보다, 헬라어보다 더 와닿는 표현이 있다면 언제든지 그것을 쓸 의향이 있고 실제로도 조금씩 쓰고 있고요. 김상봉 선생님의 글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데, 선생님의 작업과 비슷하게 한말을 사용하고 계시더라고요. 그것도 아주 이해가 잘 돼서 좋았어요. 제가 말하는 건, 그렇다고 모든 단어를 '순우리말(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도 없는 그 말)'로 바꿀 필요는 없다는 거죠.

    제가 '형상'이라는 단어를 예로 든 건 저의 불찰입니다. 다른 예가 머리에서 금방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쓰고는 고치질 않았어요. 게을렀네요. ㅜㅜ '표상', '도식'......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얼마 전에, <나는 가수다>에서 김범수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BMK는 오뚜기의 표상이죠." 저는 김범수가 소위말하는 철학적인 교양을 쌓았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어요. 그런 척도로 잰다면 그냥 다수대중의 하나일 뿐인 그가 그런 말을 했다면 표상이라는 단어가 철학의 진입장벽을 형성할 만큼 어려운 단어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념', '본질', '절대', '직관', '환원'과 같은 단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전 TV의 뉴스 인터뷰나 다큐같은 프로를 좀 자세히 보는 편인데, 가끔 정말 열악한 환경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헉!소리 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있어 놀라요. '선험철학'이니, '통각'이니, '존재자니' 하는 용어들을 한말을 통해 쉬운 말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전 기꺼이 찬성할 거예요. 그치만 그런 불필요한 불경제를 야기시키는 말이 아니라면, 굳이 저런 단어들('표상', '이념', '본질', '절대', '직관', '환원'과 같은 단어들)을 한말로 바꾸는 노고를 하는 것보다는 대중들이 책과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 조성하는 노력이 더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해버릇해서 그렇지(그런 조건이 못돼서 그렇지), 일반대중들도 학자들이 하는 것을 금방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전. 저도 물론 능력보다는 열정이 부족해서 공부하는 게 어렵고요. :( 어쨌든 전 그냥 정도를 이야기하는 게 맞을 거예요. 이 부분에 관해서라면 저는 좀 덜 급진적인 편이 나을 것 같아요.

    혹시 이런 문제제기가 들어오지 않을까 싶은데, "김범수가 '표상'이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 거기에는 모호성이 없을까? 그 단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면 김범수에게 '표상'은 어려운 말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말도 새로 고쳐써야 한다." 라고 한다면,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일상생활에서 쓰는 다른 말들도 모두 어느 만큼은 모호하게 쓰인다고 생각해요. 모호함이 아주 미미하냐, 아니냐의 차이가 작은 차이는 아니겠지만요. 사실 '개념'에 대한 저의 불신도 작용하죠. 개념이란 게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늘 위험과 폭력 같은 걸 그 안에 담고 있으니까요. 이건 경험적으로 알게 된 것이기도 해서 전 여기에 확신 같은 게 있어요. 어쨌든 일상어가 그렇듯 학술어도 모호성을 지니는 건 마찬가지고, 아무리 '셈모습'과 같은 새말들로 모호성을 줄이려고 해도 0%까지 줄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 모호성을 점점 줄여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중요한 거겠죠. 제가 생각하기엔 그래요.

    정말 넓고 깊은 공부를 할 것이라면 한문이든, 영어든, 독일어든, 그리스어든 뭐든 더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 없어요. 아무리 모든 자연 언어가 거의 동등하더라도 조금씩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미세한 차이에서 간혹 대단한 결과가 나오기도 하니까요. 스피노자를 공부하기 위해 카발라철학을 살펴보는 것, 외국인 친구가 외국어로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 위해 그 언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한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전 지금 학계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가 철학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큰 진입장벽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쩌면 이게 가장 큰 생각의 차이일지 모르겠습니다. 학교수업을 영어나 독일어나 프랑스어로 한다면 진입장벽이 되겠죠. (으악, 전 실제로 '삶과 철학'이라는 수업을 수강신청했다가 취소한 적 있어요. 영어로 도저히 철학강의를 들을 수 없었거든요.) 책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런 열정을 가질 수 있을 만한 여유가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부분적으로는 공감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겠지만) 선생님의 작업은 멋지다고 생각하고, 그 작업의 훌륭한 결과들을 받아들여 사용할 것이기도 하지만, 전 언어가 아닌 다른 조건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일들에 더 관심이 가고, 하고 싶고 그러네요.

    이 글이 단지 저를 위해 쓰인 글은 아닐 것 같아요. 그렇지만 긴 시간 내어 충분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화 나누어서 즐거웠어요.
    • 클라라
      2011/07/09 10:13
      '집'과 '주택', '뜰'과 '정원' 이런 말들 사이에 어떤 구별이 있다. 물론 '집'이 어떤 다른 외래어에서 유입된 말일 수 있다. 하지만 집을 짓는 것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어떤 것이다. 그래서 집에 관한 한 자연언어들은 그에 해당하는 고유한 낱말을 가질 것이다. 이것이 순우리말에 대한 나의 기준이다. 하지만 '쿼크' 같은 낱말은 자연언어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는 낱말이 아니다. 이것은 순우리말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자연언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전문용어의 재구성을 기획하고 있다. 나는 '쿼크'까지 순우리말로 바꾸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동사이다. "계산하다"와 "세다" 중에서 나는 "세다" 그리고 "헤아리다"를 기준으로 전문용어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재구성해야 할 전문용어들은 매우 많다. 동사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몸으로 이 시공간 속에서 구현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내가 주목하는 것은 산, 들, 강, 새 등처럼 우리가 우리 몸으로 지각할 수 있는 개별자들, 그 개별자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이 낱말들 중에 일부는 외래어이겠지만, 이들 대부분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뫼'와 '산' 중에서 왜 '산'이 선택되었는지는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오름'이 사용되고 있다.) 암튼 이런 낱말들을 토대로 전문용어를 재구성해야 한다.

      내가 애써 말하려 했던 것이 있는데, 어휘에도 계급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조선학자들이 한글로 저술을 남기지 않고 대부분 한자로 저술을 남긴 것은 모종의 계급의식이 반영되었다고 믿는다. 유럽에서 라틴어 집필에서 자국어 집필로 넘어가는 단계가 우리나라에는 없었다. 나는 이것이 정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글 전용에 대한 오랜 논쟁이 있었다. 내가 대학생 때만 해도 대부분의 교과서는 한글 전용이 아니었다. 조선일보는 오랫동안 한글 전용을 반대해 왔다. 지금도 한자를 (한글보다 먼저) 직접 노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글 전용은 엄청난 진보라고 생각한다. 남은 진보가 더 있다. 나는 바로 남은 그것을 하려고 한다. 바로 전문용어 장벽의 철폐. 나는 이런 오랜 움직임에 동참하는 것이고, 이런 움직임의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반동과 저항이 있다는 것을 나는 감지한다. 내가 급진적이고 과격하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조선에 한말이 있었다. 그 한말은 지식인들의 담론에서 사용한 그 언어가 아니다. 백성들은 상소를 올리기 위해 한문을 알아야 했다. 왜 자신의 일상어로 상소를 올릴 수 없었을까? 현재 한국의 지식인 담론들은 과연 이 땅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한말일까? 그들은 오히려 현재의 담론들이 외국어처럼 느낄 것이다. 나는 법전 같은 것을 읽으면 이것이 과연 우리말인가 싶을 때가 많다. 분명히 여기는 정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계급 문제가 스며들어 있다.

      나는 너를 한자애호가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다만 네가 한자애호가들의 발상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발상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 사용 빈도를 낮추려는 작업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 그리고 그 작업이 학문의 본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학문의 전문성과 무관하다고, 학문의 깊이와 무관하다고, 교육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업은 일급학자가 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네가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발상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위 주장들 중 하나 이상을 말하곤 한다는 것이다.

      나는 "BMK는 오뚜기의 표상이죠"라는 쓰임에서 "표상"이 무엇인지 충분히 드러나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표상"을 "나타냄" 또는 "마음 앞에 다시 나타나게 함"(좀 더 짧게 해야 하겠지)으로 바꾸고 싶다. 그리고 "관념"을 "마음그림"으로 바꾸고 싶다. 칸트는 '표상' 또는 '관념'이라는 용어를 "앞에 서 있는 것"(Vorstellung)이라고 자국어로 말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이 칸트의 조어인지 볼프의 조어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누군가의 조어라고 들었다.) 미국학자들은 이것을 'mental image'라고 바꾸어 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암튼 나는 칸트가 했던 일을 더 급진적이고 과격하고 하고 싶다.

      "한말로 바꾸는 노고를 하는 것보다는 대중들이 책과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 조성하는 노력이 더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는 전자를 먼저 해야 한다고 전략적으로 판단했다. 다시금 이 부분을 읽어보자. "이 발상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그 사용 빈도를 낮추려는 작업의 가치를 평가절하한다. 그리고 그 작업이 학문의 본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학문의 전문성과 무관하다고, 학문의 깊이와 무관하다고, 교육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업은 일급학자가 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전문용어를 한말로 바꾸는 작업이 철학의 민중화를 위해 더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오랜 교육경험을 통해 얻는 생각이다. 물론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 암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생각에 바탕해서 한자어 전문용어를 한말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다.

      헤겔 정신현상학은 오래 전에 번역되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도 여러 번역본이 존재한다. 나는 이 번역본을 읽는 것이 헤겔과 하이데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나 스스로 체험했다. 나는 그 번역본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 것이 영어 번역본다. 왜 영어 번역본이 더 이해가 잘 될까? 그래서 결국 우리는 영어를 해야 하고, 독일어를 해야 하고, 불어를 해야 하고, 나중에는 라틴어를 해야 하고, 헬라어를 해야 하는 것일까? 불교철학하는 사람들은 급기야 산스크리트어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학자와 대중 사이의 간격은 점차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철학은 전문담론으로 더욱 높은 권좌에 오르게 된다. 대중들이 오를 수 없는 곳까지. 나는 이런 악순환을 끊고 싶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고 나의 기획이다.

      물론 낱말을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 다음은 우리말 문장의 논리적 형식을 다듬는 것이다. 두 작업을 함께 진행하고자 하는 것이 내가 하려는 것이다.
  2. Plutonian
    2011/07/09 01:39
    아참, 그리고 '소격화' 역시 '형상'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잘 못 든 예일 뿐이어요!
    먼젓글에 제가 '소격화'를 예로 든 것이 '소격화'라는 용어가 쉬운 용어고,
    그걸 계속 쓰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전혀 아닙니다. ^^;
    오히려 위의 댓글에 제가 늘어놓은 '선험철학' 뭐 이런 용어와 같이 바뀌어야 할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 클라라
      2011/07/09 10:53
      그런 용어들이 바뀌어야 할 용어라고 네가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동기라 할까, 발상이라 할까 그런 것이 있을 텐데 나는 그런 동기, 그런 발상을 급진적으로 구현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기획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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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한알

2011/07/07 22:43
라이프니츠의 "Monadology"를 되도록 우리말로 바꾸고 있습니다. 알아듣기 힘은 곳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언제 이 일이 끝날지 모르겠군요.


 

01. 지금 이야기 거리는 한알모나드이다. 한알은 안 섞인 밑바탕실체이다. 한알이 안 섞인것이라는 말은 조각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알은 다른 섞인 것의 조각이 될 수는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02.
섞인 것들이 있다. 섞인 것은 안 섞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섞인 것은 안 섞인 것들의 더미이다. 따라서 만일 섞인 것들이 있다면, 안 섞인 것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섞인 것들은 다만 한알들의 더미일 뿐이다.

03. 조각들을 갖지 않는 것은 퍼져 있을 수 없고, 모양도 가질 수 없고, 쪼개질 수도 없다. 조각을 갖지 않는 한알들은 자연의 진짜 못나눔알원자들이다. 한알들은 모든 것을 이루는 밑알원소들이다.

04. 나아가 한알이 흩어져 사라지리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한알이 저절로자연히 없어질 길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05. 똑같은 까닭으로 한알이 저절로 생기게 될 길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있던 한알들이 함께 합치고 모인다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섞인 밑바탕이 새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06. 그래서 한알들이 생기고 없어지는 오직 한 가지 길은 한꺼번에 곧바로 생기거나 없어지는 길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일의 맨 처음에 모든 것이 만들어질 때 한꺼번에 곧바로 생기고, 모든 일의 맨 나중에 한꺼번에 곧바로 없어질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달리 섞여 있는 것들은 조각들이 모이거나 흩어짐으로써 조금씩 서서히 생기고 조금씩 서서히 없어질 수 있다.

07. 게다가 한알이 다른 만들어진 것들 때문에 그 속에서 바뀌거나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알 안에는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일 만한 것들이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고, 그 안에서 꿈쩍거리고 틀고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움직임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섞인 것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데, 섞인 것은 서로 자리를 바꿀 만한 조각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알 바깥에서 안으로 뭔가 들어가서 한알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말할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옛날 스콜라꾼들은 밑바탕의 겉모습이 제 밑바탕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한알의 겉모습들이 다른 한알 속으로 들어가 그 한알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겉모습들이 밑바탕에서 떨어져 나와 제 홀로 떠돌아다니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더구나 한알에는 다른 것들이 들락날락할 수 있는 창문이 없다. 그래서 밑바탕도 겉모습도 한알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08. [있는 것들은 어떤 모습속성을 가진다. 만일 밑바탕이 있는 것이라면 밑바탕을 모습을 가져야 한다. 모습 가운데는 본모습본질속성이 있고 겉모습우연속성이 있다. 모습에는 그 밑바탕이 많이 가질 수도 있고 적게 가질 수도 있는 것, 크게 가질 수도 있고 작게 가질 수도 있는 것, 진하게 가질 수 있고 연하게 가질 수 있는 것, 짙게 가질 수 있고 옅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런 모습을 셈모습또는 이라고 한다. 셈모습은 거리, 걸린 시간, 무게, 온도, 농도 따위처럼, 재거나 셀 수 있고 그 크기에 따라 숫자셈알를 붙일 수 있다. 숫자라는 것은 재거나 세는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말이다. 하지만 모습 가운데는 많고 적음, 크고 작음, 짙고 옅음을 나타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빛깔, 맛깔, 냄새 따위처럼 셀 수 없고 숫자를 붙일 수 없는 모습이 있다. 이런 모습을 못셈모습또는 이라 한다. 그런데 한알은 셈모습을 가지지 않는다. 만일 한일이 크고 작음을 가진다면, 또는 많고 적음을 가진다면 그것은 나눌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알은 못셈모습도 가지지 않을까?] 한알들은, 비록 조각들을 가지지 않지만, 저마다 다른 못셈모습을 가져야 한다. 한알들이 저마다 다른 못셈모습을 가져야 하는 까닭은 둘이 있다. 첫째, 만일 한알이 셈모습뿐만 아니라 못셈모습조차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있는 것이 될 수조차 없다. 둘째, 만일 안 섞인 한알들이 못셈모습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면, 그것들로 이루어진 섞인 것들에서도 서로 다름과 바뀜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지 알아보기 위해, 한알들이 아무런 못셈모습을 가지지 않는다고, 또는 한알들이 모두 똑같은 못셈모습을 가진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한알들은 셈모습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과 섞인 것은 안 섞인 것들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섞인 것들은 모두 같게 될 것이고, 이 섞인 것과 저 섞인 것을 가릴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다. [못나눔알꾼처럼, 어떤 이들은 사물들이 모두 똑같은 못셈모습을 가지고 있어도, 빈 터에 사물들이 많이 모이고 덜 모이는 무늬와 결에 따라 세계 속에 다름과 바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계가 꽉 차 있어서 빈 곳이 없다고 생각해 보라.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한 덩어리가 움직여 빠져나가면 그것과 똑같은 다른 덩어리가 그곳으로 들어오게 될 뿐이기 때문에, 한 곳의 모습은 다른 곳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을 테고, 우리는 사물의 한 모습과 다른 모습의 다름을 가릴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있는 것들 사이에서 다름과 바뀜이 있기 위해서, 한알들은 [어떤 모습을, 셈모습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떤 못셈모습을 가져야 한다.

09. [한알이 저마다 못셈모습을 가진다는 말은 한알은 다른 한알들과 못셈모습에서 달라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무개 한 한알은 나머지 모든 한알들과 반드시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있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모든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다르지 않고 아예 똑같아서, 안쪽에서 조금의 다름도 찾을 수 없는 두 사물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한 사물은 빈터에서 다른 사물들과 놓인 자리들에서 다를 수 있다. 오로지 이런 바깥의 서로 맺음 때문에 다른 것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개 두 사물은 안쪽에서 참된 다름을 찾을 수 있는데 둘은 본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에서 다르다.]

10. 으뜸 한알이 만든 모든 것들은 바뀔 수 있음을 나는 받아들인다. [으뜸 한알 또는 하느님이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밑바탕, 그것이 없다고 말하면 말이 되지 않는 밑바탕을 뜻한다.] 따라서 한알도 만들어진 것이기에 바뀔 수 있다. 나아가 모든 한알은 끊임없이 쉼 없이 바뀐다.

11. 만일 한알이 저절로 바뀌게 된다면, 이것은 속에 있는 힘 때문에 [말하자면 하려는 힘때문에] 바뀌는 것이다. 왜냐하면 꼭지 07에서 말한 것처럼, 바깥에 있는 힘은 한알의 안쪽에 아무런 힘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12. 바뀜을 낳는 속힘이 있다면, 이 힘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가는 어떤 모습들이 있다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이 모습들의 다름 때문에 한 한알은 다른 한알과 같지 않은 제 나름의 한알이 되고, 이로써 여러 한알들은 여러 가지로 서로 갈리게 된다. [그래서 한알을 바꾸는 속힘은 모든 한알이 똑같이 가지고 있지만, 바뀌어가는 모습들은 한알 하나하나마다 다르다. 저마다 다른 한알들의 모습들은 촘촘한 어떤 것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 모습이 촘촘하지 않다면 그토록 많은 한알들이 서로 다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 모습이 촘촘하지 않다면 한알이 조금씩조금씩 때마다 바뀌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한알들의 다름과 바뀜을 받아들인다면 한알들의 모습이 촘촘하다는 것을 받아들어야 한다.]

13. 저마다 다른 한알의 촘촘한 모습 속에는, 비록 한알이 하나이고 섞이지 않지만, 이를 지키면서 여러 많은 겹들이, 많은 잔주름들이 담겨 있어야 한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바뀜들이 껑충 뛰지 않고 부드럽게 바뀌려면, 언제나 어떤 것은 바뀌고 어떤 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많은 겹들이 있어서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은 바뀌고 어떤 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모든 저절로자연히 바뀜이 끊이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비록 한알은 아무 조각도 갖지 않지만, 여러 가지 많은 모습들과 여러 가지 많은 맺음들을 갖음이 틀림 없다.

14. 하나이자 안 섞인 한알 속에 있는 여러 겹들을 드러내고 나타내주는 잠깐잠깐의 모습은 다름 아니라 바로 우리가 지각이라 부르는 것이다. [한알의 한 모습은 한 지각이며, 한 모습에 여러 겹들이 담겨 있듯이 한 지각에 여러 주름이 잡혀 있다. 어떤 주름들은 펼쳐지고 어떤 주름들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나중에 나올 이야기에서 또렷해지겠지만, 지각은 알아차림 또는 의식과 다르다는 것을 마음에 잘 새겨두어야 한다. 데카르트꾼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지각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겼는데 바로 여기서 그들은 매우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짐승의 넋은 마음보다 덜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한알일 수 있음을 보지 못한 채] 오직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들만이 한알이고, 짐승들은 넋을 가지지 않으며, [나중에 말하겠지만 짐승의 넋보다 덜떨어진] 온힘엔텔레키 같은 것들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길거리에 있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생각처럼, 오랫동안 넋 나간 것과 곧이곧대로 죽은 것이 다른데도 이 둘을 헷갈려 했다. 나아가 이 생각은 몸에서 아예 동떨어져나간 넋이 있다는 스콜라꾼의 잘못된 믿음을 갖도록 그들을 이끌었으며, 넋이 죽어 없어진다는 비뚤어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까지 북돋아주었다.

15. 한알이 바뀌도록, 그래서 한알이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나아가도록 제 속힘을 내는 것을 한알의 바람이라 부를 수 있다. 바람은 제가 나아가고 싶은 지각에 딱 맞게 언제나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얼추 비슷한 지각에 다다르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지각들로 나아간다.

16. 내가 알아차리는 지각은 제 아무리 하찮은 지각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지각이 마주하는 것대상들이 그 속에 여러 가지로 담겨 있어서 알록달록하다는 것을 내 속에서 보게 된다. 나도 하나의 한알인데, 내 속을 봄으로써 나는 한알 속에 여러 겹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몸소 겪은 셈이다. 그래서 넋이 안 섞인 밑바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나 한알 속에 있는 이 여러 겹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피에르 벨은 그의 <역사비판사전> 올림말 로라리우스에서 밑바탕 속의 여러 겹들을 받아들일 때 말썽이 빚어진다고 보았지만, 그는 여기서 아무런 말썽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17. 더구나 물질 이야기나 움직틀기계 이야기를 빌어서는, 이를 테면 모양과 움직임 따위의 말을 빌어서는 [달리 말해, 역학 원리에 의해서는] 지각이 무엇이고 이것이 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을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지각에 달려 있는 모든 것들도 움직틀을 밝히는 데 쓰이는 말을 빌어서 밝힐 수 없다. 이를 잘 받아들이기 어려우면, 얼개가 잘 짜여 있어서 생각하고 느끼고 지각하는 움직틀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 다음 얼개와 짜임새를 지키면서 그 움직틀을 크게 키우고 우리는 작게 줄여서 마치 방앗간에 걸어 들어가듯이 우리가 그 움직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게 해서 우리가 그 속으로 들어갔을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서로 당기고 밀치는 지레와 톱니와 바퀴 같은 틀 조각들뿐일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움직틀이 어떤 지각을 가지고 있고 왜 그런 지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깨달아 알 만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각을 밝혀주는 것을 물질이나 움직틀 같이 섞인 것들 속이 아니라 한알처럼 오직 안 섞인 밑바탕 속에서만 찾아야 한다. 나아가 우리가 안 섞인 밑바탕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각과 지각의 바뀜뿐이다. 안 섞인 밑바탕이 제 속에서 하는 모든 일은 오직 지각하고 지각을 바꾸는 것밖에 없다.

18. 나는 모든 안 섞인 밑바탕 또는 한알에 온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 왜냐하면 밑바탕으로서 모든 한알들은 가야 하는 과녁을 제 속에 품고 있어서 거기까지 끝내 가고야 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알은 제 안에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고 있어서 저 스스로 힘으로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 이 때문에 한알은 물질이 아니면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된다. [못나눔알꾼들이 말하는 못나눔알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은 물질이다.]

19. 내가 막 이야기한 대로 말뜻을 넓게 잡아, 지각들과 바람들을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모든 안 섞인 밑바탕들 또는 한알들을 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오직 지각과 바람만을 가진 안 섞인 밑바탕들에 맞는 이름은 그냥 한알또는 온힘이라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느낌은 그냥 지각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느낌까지 가진 밑바탕들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느낀다는 것은 보다 뚜렷한 지각을 가지고 그 지각을 외우고 지나간 지각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다 뚜렷한 지각을 가지고 그 지각을 외우고 떠올리기까지 하는 밑바탕들을 따로 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제 지각을 떠올리지도 못하고 다만 헷갈리는 지각만을 가진, 그래서 못 느끼는 한알을 나중에 맨 한알이라 부를 것이다.]

20. 우리가 얼빠졌을 때 또는 우리가 꿈도 꾸지 않은 채 아주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 사이 일어난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아무런 뚜렷한 지각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몸소 겪기도 한다. 이런 때는 우리 넋과 맨 한알을 뚜렷이 갈라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이 모습은 오래 가지 않는데, 우리가 다시 넋을 차리게 되면, 그 넋은 맨 한알과는 다른 무엇이 된다.

21. 그렇다고 안 섞인 밑바탕들이 아무런 지각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밑바탕들이 아무런 지각도 갖지 않는 일은 일어날 수조차 없는 까닭 세 가지를 앞에서 말했다. 첫째, 밑바탕은 없어질 수 없다. 둘째, 밑바탕이 참으로 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아무 모습이라도 줄곧 가져야 한다. 셋째, 밑바탕이 아무 모습이라도 가져야 한다면 그 모습은 지각 말고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똑같은 쪽으로 쉬지 않고 여러 번 빙빙 돌면 우리는 어지러워 넋을 잃게 되는데, 이 때 모든 것이 흐리멍덩해질 것이다. 이처럼 비록 작은 지각들을 아주 많이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뚜렷한 지각들이 전혀 없을 때, 우리는 멍하게 넋을 잃은 모습이 된다. [넋을 잃어 우리 지각을 알아채지 못할 때에 우리가 아무런 지각도 갖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넋을 잃을 때 이것이 죽은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어쩌면] 사람들이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짐승들이 아주 오랫동안 이런 모습에 빠지는 것이다.

22. 그리고 안 섞인 밑바탕의 지금 모습들은 바로 앞선 모습에서 저절로자연히 나온 것이고, 지금 모습은 나중 모습을 품고 있다.

23. 우리가 넋 나간 모습에서 넋을 차리게 되자마자 우리는 우리 지각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가 지각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조차도 우리는 언제나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또렷하게 따라 나온다. 마치 한 움직임이 오직 다른 움직임에서만 저절로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한 지각은 오직 다른 지각에서만 저절로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넋을 차려 지각을 알아챘을 때 바로 그 지각은 앞선 지각에서 나와야 한다. 만일 넋을 차리기 전에 지각이 전혀 없었다면 넋을 차린 뒤에도 지각도 전혀 없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넋을 잃었을 때조차도 지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다만 그 때는 그 지각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24.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 지각들 가운데 뚜렷하고 두드러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래서 많은 지각들 가운데 아무 것도 돋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끝없이 오랫동안 넋 나간 모습으로 내내 머물 것이다. 이것은 아예 맨 한알의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죽음이다.]

25. 자연은 짐승들에게 두드러지고 돋보이는 지각을 주었다. 이것은 자연이 짐승들을 돌보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자연이 짐승을 돌본다는 말은 자연이 짐승에게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해준다는 말이다.] 자연은 짐승에게 여러 가지 느끼는 틀감각기관을 주었는데 이 느낌 틀들은 아주 많은 빛살들, 공기의 떨림들을 모으는 일을 한다. 느낌 틀이 빛살들과 굽이침들을 모아 묶어줌으로써 짐승은 이런 것들이 자신에게 미치는 힘을 더 잘 받게 된다. [느낌 틀에 미치는 힘들이 잘 모여 합쳐지게 되면 넋에서 매우 돋보이는 지각이 생기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은 보거나 듣는 느낌뿐만 아니라 맡는 느낌, 맛보는 느낌, 만지는 느낌, 나아가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매우 많은 다른 느낌들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내 생각에, 넋에서 벌어진 것은 몸의 느낌 틀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시 나타낸다. [한 한알 이 다른 것 나타낸다는 것은 한알 지각한다는 말이다. 한알 을 지각할 때 은 한알 안에 나타나게 된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짤막하게 풀어내려고 한다.

26. 넋은 떠올림에 힘입어 하나에서 다른 것을 잇따르게 하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잇따르게 하기는 헤아림이성을 흉내 낸 것이지만 헤아림과는 다른 것이다. 짐승이 뭔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예전에 가졌던 어떤 지각을 외우고 있었다면, 그래서 지금 생긴 지각과 비슷한 지각을 떠올리게 된다면, 이 떠올림 속에 예전의 지각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짐승은 그 다음에 잇따라 벌어질 예전 일들과 비슷한 것을 이제 미리 생각하게 되고, 예전에 가졌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이제 다시 가지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개에게 막대기를 보여줄 때, 개는 그 막대기가 예전에 자기를 어떻게 아프게 했는지를 떠올리고 낑낑거리며 달아난다.

27. 짐승은 사물을 마음속으로 그리는 힘을 갖고 있는데, 이 힘은 짐승을 찔러 느끼게 하고 움직이게 할 만큼 세다. 이 힘이 이만큼 센 까닭은 앞선 지각의 세기 때문일 수 있고 앞선 지각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때때로 많은 여린 지각들이 되풀이됨으로써, 즉 오랜 습관으로 얻을 수 있는 세기가 하나의 센 찌름인상만으로 한꺼번에 얻어지기도 한다.

28.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잇따르게 하는 것이 다만 떠올림의 길에 따라서만 일어나는 만큼, 사람은 짐승과 똑같은 일을 한다. 이는 마치 까닭 없이 한갓 솜씨만 가진 돌팔이 의사와 같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열의 예닐곱은 한갓 돌팔이처럼 군다. 이를 테면 우리는 이제까지 늘 그래 왔기 때문에 내일도 낮이 밝을 것이라고 미리 생각하는데, 이 때 우리는 돌팔이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천문학자만이 헤아림에 바탕을 두고 내일도 낮이 밝을 것이라고 믿는다.

29. 우리는 반드시 참말언제나 참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갓 짐승과 다르다.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을 반드시 따라 나오게 하는 것은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을 어쩌다 잇따르게 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가 반드시 따라 나오게 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헤아림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반드시 따라 나옴은 헤아림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승들이 가진 잇따르게 하기는 다만 떠올림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반드시 참인 것을 앎으로써 우리는 헤아림과 다른 참앎과학을 갖게 되고, 나아가 우리 자신과 으뜸 한알을 알 만큼 우리를 자라나게 된다. 우리 안에 자라난 이것을 헤아리는 넋또는 마음이라 부른다.

30. 반드시 참인 것들을 앎으로써, 이런 참말들을 그렇지 않은 다른 것들로부터 추려냄으로써, 우리는 우리 모습을 들여다볼 만큼 자라나게 된다. 들여다봄은 우리가 저마다 라고 부르는 것을 알아차리게 하고, 이런 저런 것들이 우리 속에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나 스스로를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있음에 대해, 밑바탕에 대해, 섞인 것과 안 섞인 것에 대해, 물질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한다. 나아가 우리 안에 끝이 있지만 그에게는 끝이 없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그런 낱말뜻을 품음으로써] 우리는 으뜸 한알까지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들여다봄을 통해 헤아림의 알짜 대상들을 얻게 된다.

31. 우리의 헤아림들은 두 개의 크나큰 으뜸말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는 어긋난말의 으뜸말모순율이다. 우리는 이 으뜸말에 힘입어, 어긋난말모순명제을 품고 있는 모든 말은 거짓이고, 거짓말에 어긋나는 말 또는 거짓말을 아니다 하는 말은 모두 참말이라고 못 박는다. [여기서 어긋난말이란 이 말로부터 이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또는 이 말로부터 아무개 말이 참이라는 것과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한꺼번에 이끌어낼 수 있는 말이다. 이를 테면 눈은 희지만 눈은 희지 않다를 생각해 보자. 이 말로부터 우리는 눈은 희다를 이끌어낼 수 있고 또한 눈은 희지 않다를 이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눈은 희지만 눈은 희지 않다로부터 눈은 희다가 참이라는 것과 거짓이라는 것을 한꺼번에 이끌어낼 수 있다. 따라서 눈은 희지만 눈은 희지 않다는 어긋난말이다.]

32. 다른 하나는 넉넉한 까닭의 으뜸말충족이유율이다. 우리는 이 으뜸말에 힘입어, 비록 흔히들 그 까닭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일이 왜 그렇게 되어야 하고 왜 달리 되지 않은지 넉넉한 까닭이 없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아무 말도 참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33. 참말들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헤아림의 참말이고 다른 하나는 있는일사실의 참말이다. 헤아림의 참말은 반드시 참이고, 이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있는일의 참말은 어쩌다 참이고, 이에 어긋나는 일은 일어날 수도 있다. 어떤 참말이 반드시 참일 때, 우리는 쪼개기분석를 통해, 다시 말해 바닥에 이를 때까지 그 말을 안 섞인 마음그림관념들과 말들로 풀어헤침으로써, 그 말이 참인 까닭을 찾아낼 수 있다.

34. 이것은 수학자들이 하는 일과 같은데 그들은 수학에서 찾아진 따름말정리들과 수학을 하는 데 지켜야 할 지킴말규범들을 쪼개어 뜻매김말정의들과 바탕말공리들과 부름말공준들로 조각낸다.

35. [수학의 참말들을 쪼갤 때는 언젠가 끝이 있다.] 우리는 마침내 더는 뜻매김할 수 없는 안 섞인 마음그림들에 이르게 될 것이고, 또한 참이라는 것을 이끌어 보일 수도 없고 이끌어 보이지 않아도 되는 바탕말들과 부름말들, 달리 말해 바탕 으뜸말들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으뜸말들은 반드시 참말인데 이것이 거짓이라고 말하면 이 말에는 뻔한 어긋난말이 담기게 된다.

36. [이처럼 헤아림의 참말은 말을 쪼갬으로써 그것이 참말이 될 만한 넉넉한 까닭을 찾을 수 있다.] 있는일의 참말 또는 어쩌다 참말도 그것이 참말이 될 만한 넉넉한 까닭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만들어진 우주온알에 넓게 펼쳐져 있는 앞뒤로 잇따라 있는 일들에도 그렇게 일어날 만한 넉넉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자연난것에는 서로 다른 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기 때문에, 또한 물체는 끝없이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어쩌다 일어난 일의 넉넉한 까닭은 하나하나 끝없이 자잘하게 풀어헤쳐질 수 있다. 나는 지금 여기에 글을 쓰고 있다. 내가 글을 쓰도록 힘을 미치는 탓작용원인으로서 끝없이 많은 모양과 움직임, 지난 일과 이제 일들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글 쓰는 일을 끝내게 하는 탓목적원인으로서 지난 일이든 이제 일이든, 내 넋 속에 있는, 끝없이 많은 아주 작은 쏠림과 기움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이 모든 탓들이 지금 내가 여기에 글 쓰는 일의 까닭이 된다. 하지만 그것들이 이 일이 일어난 넉넉한 까닭은 될 수 없다.]

37. 이 모든 자잘한 탓들은 앞서 일어났고 더 자잘한 다른 일들, 하지만 어쩌다 일어난 일들을 또다시 불러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앞서 있고 더 자잘한 다른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하나하나 그 까닭을 찾으려면 또다시 비슷하게 쪼개기를 줄곧 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는 어쩌다 일어난 일의 넉넉한 까닭을 찾는 일은 결코 마무리될 수 없다. 어쩌다 일어난 일들은 끝없이 자잘해지고 끝없이 잇따라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들의 넉넉한 까닭 또는 마지막 까닭이 이런 자잘한 일들의 끝없는 잇따름 안에 있지는 않다. [어쩌다 일어난 그 자잘한 일들이 다른 어쩌다 일어난 일들의 넉넉한 까닭이 될 수는 없다.] 넉넉한 까닭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런 잇따름 너머에 놓여 있어야 할 것이다.

38. 바로 이 때문에 일의 마지막 까닭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밑바탕 속에 있어야 한다. 어쩌다 일어나는 그 모든 자잘한 바뀜들은, 마치 샘에서 물이 나오듯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밑바탕으로부터 솟아 나와야 한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밑바탕 속에 그런 바뀜들이 들어 있지는 않지만, 그 밑바탕은 다른 것들에게 바뀜이 생기도록 만들 힘을 가지고 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 밑바탕은 우리가 하느님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39.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밑바탕, 다시 말해 으뜸 한알은 온통 서로 얽힌 모든 자잘한 일들이 그렇게 일어나야만 하는 넉넉한 까닭이 되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으뜸 한알만 있으며, 이 으뜸 한알로 넉넉하다.

40. 이 으뜸 밑바탕은 이로부터 따로 떨어져 있어서 그의 바깥에 아무 것도 두지 않는다는 뜻에서 이것은 하나밖에 없고 [모든 곳에 그의 힘이 미치고 있어서] 모든 것들과 더불어 모든 곳에 있다. 이 으뜸 밑바탕은, 다른 까닭의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이것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까닭에서 곧장 그것이 있다는 것이 그냥 따라 나온다는 뜻에서, 이것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밖에 없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 으뜸 밑바탕은 끝이 없어서 그에 대해 아무런 금도 그을 수 없고, 그에게는 될 수 있는 만큼 많은 있음직함실재성이 가득 차게 담겨 있어야 한다. [만일 이 으뜸 밑바탕에게 덜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은 그에게 금을 그어주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41. 이로부터 으뜸 한알은 다른 것과 견줄 수 없는 차오름완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어떤 것의 차오름이란 그가 갖고 있는 있음직함들을 모두 모은 것인데, 끝이나 금은 그것의 차오름에 들어가지 않는다. [여기서 있음직함이란 어긋난말을 불러들이지 않은 채 생각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차오름을 이루는 있음직함들은 더해질 수 있는 있음직함을 말한다. 이를 테면 나쁜 것은 어떤 나쁨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좋음이 빠진 것이다. 이런 뜻에서 좋음은 더해질 수 있는 있음직함이지만, ‘나쁨은 더해질 수 있는 있음직함이 아니다. 모든 한알들은 제 나름의 차오름을 가지고 있다. 어떤 차오름은 다른 차오름보다 더 많은 있음직함들을 담고 있고, 또는 이들 있음직함들을 더 크게 가지고 있다. 으뜸 한알은 다른 만들어진 한알들보다 있음직함들을 더 많이 더 크게 가지고 있다. 으뜸 한알은 어긋난말을 불러들이지 않은 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끝없이 많이 끝없이 크게 가지고 있다. 으뜸 한알은 다른 아무 것과도 견줄 수 없다.] 따라서 끝이 없어 금을 그을 수 없는 것이 가진 차오름은, 이를 테면 으뜸 한알의 차오름은 견줄 만한 다른 것이 없을 만큼 끝이 없다.

42. 만들어진 것들이 가진 차오름은 으뜸 한알의 힘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또한 따라 나온다. 하지만 만들어진 것은 넘지 못하는 금이 있도록 타고나야만 하는데, 이것들이 가진 못차오름불완전성은 제가 가진 이 타고난 모습으로부터 온다. 만들어진 것들의 이런 모습 때문에 그것들은 으뜸 한알과 갈린다. 만들어진 것들이 가진 이러한 본디 못차오름을 겉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제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려는 물체들의 모습이다. [제 스스로 하려 하지 않고 다른 것 때문에 하게 되는 것, 다른 것으로부터 겪게 되는 못차오름의 모습이다. 오직 으뜸 한알만이 다른 것들로부터 겪지 않고 제 스스로 모든 것을 하려 하기 때문에 으뜸 한알은 다른 것들과 견줄 수 없는 차오름을 가지고 있다. 으뜸 한알은 모든 것을 스스로 차오를 수 있다. 하지만 만들어진 한알들은 다른 것으로부터 겪고, 다른 것 때문에 하게 되는데 이런 게으른 모습이 만들어진 한알들의 못차오름이다. 만들어진 한알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차오를 수 없다. 만들어진 한알들 속에는 다른 것에게 겪는 모습도 담겨 있다.]

43. 언제나 참말들이 놓여 있는 자리는, 또는 그런 참말들을 만들어내는 마음그림들이 놓여 있는 자리는 으뜸 한알의 깨달음지성 속이다. [어긋난말을 불러들이는 것은 언제나 거짓말이다. 언제나 거짓말을 아니다한 말은 언제나 참말이 된다. 어긋난말을 품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은 그럴듯함을 가지고 있다. 한낱 그럴듯한 것들은 마음그림 속에서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모든 그럴듯한 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모든 참말을 아는 으뜸 한알의 마음 속에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해 으뜸 한알은 모든 그럴듯한 것들을 마음에 품고 있다. ‘어긋난말을 불러들이지 않은 채 생각할 수 있음있음직함이라 하는데 으뜸 한알이 그럴듯한 것들을 마음에 두고 곰곰이 생각할 때 그것에 있음직함이 생기게 된다. 으뜸 한알이 이것을 만들기로 마음먹게 되면 있음직함이 커져 그것은 마침내 으뜸 한알의 마음 바깥에 나와 참으로 있게 된다. 이리하여 으뜸 한알의 품은 뜻은 끝내 여기에 참으로 있게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한낱 그럴듯한 것이 있음직함을 얻게 되는 것은 으뜸 한알의 마음이고 그의 뜻에 따라 그것은 여기에 바깥에 있게 된다.] 그래서 으뜸 한알 없이는 그럴듯한 것들에 있음직함이 들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으뜸 한알 없이는 아무 것도 그럴듯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으뜸 한알은 그럴듯한 것들이 지닌 있음직함의 샘이다. 으뜸 한알 없이는 아무 것도 저기 바깥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으뜸 한알은 바깥에 있는 것들의 샘이다. 이뿐만 아니라, 바깥에 있는 것들이 있음직한 한, [그것들의 본모습이 아무런 어긋난 말을 품지 않도록, 그래서 그것들이 있음직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으뜸 한알은 그 본모습본질들의 샘이기도 하다.

44. 본모습들 또는 그럴듯함들에게 어떤 있음직함이 있다면, 나아가 언제나 참말인 것들에게 있음직함이 있다면, 이런 있음직함은 저기 바깥에 있는 어떤 것, 여기에 있는 어떤 것 속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있음직함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의 바깥에 있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란 본모습 안에 바깥에 있음을 담고 있는 것, 다시 말해 그럴듯함이 여기 있음을 넉넉히 말해주는 어떤 것이다. [으뜸 한알, 다시 말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밑바탕이 여기 바깥에 없다면, 그럴듯한 것들이 자리할 곳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반드시 참말도, 언제나 참말도 없었을 것이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밑바탕이 여기 바깥에 있다는 것에 다른 모든 바깥에 있음, 다른 모든 있음직함, 다른 모든 그럴듯함이 뿌리를 두고 있다.]

45. 만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마도 있을 수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반드시 있어야 것이다. 오직 으뜸 한알만이, 오직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만이 이런 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것을 이런 자리를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으뜸 한알은 있을 수도 있는 것일까?] 끝을 가지지 않는 것은 자신에 관한 참말에 대해 아니라고 할 만한 것을 제 안에 품지 않는다. 아니라고 할 만한 것을 제 안에 품지 않는 것은 어긋난말을 제 안에 담고 있지 않다. 어긋난말을 제 안에 담고 있지 않는 것은 있을 수도 있음 또는 그럴듯함을 갖고 있다. 따라서 끝이 없는 것, 다시 말해 으뜸 한알은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으뜸 한알의 그럴듯함을 막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이것이 스스로 말해주듯이, 으뜸 한알은 저기 바깥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으뜸 한알이 그럴듯한 것이고, 그것이 있도록 막는 까닭이 아무 것도 없다면, 으뜸 한알이 자기 본모습대로 끝까지 또는 끝없이 가득 차오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의 있음직함이 끝까지 또는 끝없이 가득 차게 될 때 그의 그럴듯함은 저기 바깥에 있음까지 스스로 자라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무엇인가를 겪지 않고도선험적으로 [말의 뜻을 따라서 생각해보기만 해도] 으뜸 한알이 저기 바깥에 있다는 것을 넉넉히 알 수 있다. 벌써 꼭지 43에서 우리는 겪음을 따라지 않고도, 언제나 참말이 있음직하다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참말이 있음직하려면 그것은 으뜸 한알의 깨달음 안에, 그의 마음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으뜸 한알이 저기 바깥에 있다는 것을 이끌어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말한 것에서 우리는 [말의 뜻을 넘어서서] 겪음을 빌려후험적으로 으뜸 한알 바깥에 있다는 것을 이끌어 보이고 있다. 우리는 어쩌나 일어나는 것들이 저기 바깥에 참으로 있다는 것을 겪고 있다. 이런 일들의 마지막 까닭 또는 넉넉한 까닭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이 저기 바깥에 있는 까닭을 제 안에 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어쩌나 일어나는 것들이 저기 바깥에 참으로 있다는 것을 겪고 있다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저기 바깥에 참으로 있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으뜸 한알 바깥에 있다는 것을 밝혀 보이기 위해 겪음을 빌리고 있다.]

46. 하지만 언제나 참말들이 으뜸 한알에게 달려 있다는 까닭으로 그 참말들이 아무렇게나 될 수 있다고, 다시 말해 으뜸 한알의 뜻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몇몇 사람들은 언제나 참말이 으뜸 한알의 뜻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는데, 데카르트도, 나중에 푸와레도, 이렇게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다 참말들은 으뜸 한알의 뜻에 달려 있지만, 언제나 참말들은 으뜸 한알의 뜻에 달려 있지 않다. 어쩌다 참말들이 따라야 하는 으뜸말은 알맞음의 으뜸말, 다시 말해 가장 좋은 것을 고르라는 말이다. [으뜸 한알은 그의 착한 뜻에 따라 그럴듯한 것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그것을 여기 있도록 만든다. 이 때문에 어쩌다 일어나는 것들 또는 어쩌다 참말이 된 것들은 으뜸 한알의 뜻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참말은 으뜸 한알의 뜻이 아니라 오직 그의 깨달음에만 달려 있다. 반드시 참말들은 으뜸 한알이 자기 깨달음 안에서 마주 보는 것으로서 그의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참말들은 으뜸 한알에 달려 있다. 으뜸 한알은 그의 깨달음으로 반드시 참말들 알아차리고, 그의 뜻에 따라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어쩌다 참말들을 여기 있게 만든다. 으뜸 한알은 어쩌다 참말들을 만들어내지만 반드시 참말들은 찾아낸다.]

47. 오직 으뜸 한알만이 으뜸으로 하나인 것 또는 [모든 것으로 그로부터 나오는] 맨 처음 안 섞인 밑바탕이다. 그에게서 다른 모든 만들어진 한알 또는 딸린 한알들이 나온다. 그림을 그리자면, 만들어진 한알들은 으뜸 한알이 소리 없이 때마다 끊임없는 쏟아내는 꺼지지 않는 비춤으로부터 생긴다. [으뜸 한알은 모든 한알들의 있음을 지켜낸다. 하지만 이 말은 그가 때마다 끼어들어 한알들에게 벌어지는 일들을 바꾸거나 한알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생각을 쉬는 일이 없으므로 비춤도 멈추지 않고 그래서 한알들이 없어지는 일도 없다. 다만 딸린 한알은 으뜸 한알에게 받은 비춤으로 빛나기 때문에 이 빛남은 끝을 가지고 있다. 딸린 한알은 빛을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언제나 머물러 있고 그것을 넘어서 스스로 빛날 수 없다.] 딸린 한알들은 만들어진 것이기에 본디 끝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들이 가진 받아들임을 벗어날 수 없다. [딸린 한알들의 이런 못차오름은 으뜸 한알이 못차오르게 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못차오름이 딸린 한알들의 본모습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으뜸 한알은 딸린 한알들이 제나름의 차오름을 넉넉하게 가지도록 했다.]

48. 으뜸 한알은 제 안에 모든 것을 낼 만한 힘을, 있는 것들에 대한 모든 자잘한 마음그림들을 품고 있는 앎을, 가장 좋은 것을 하라는 으뜸말에 따라, 있는 것들과 그 바뀜들을 만들어낼 만한 뜻을 가지고 있다. 만들어진 한알들은 제마다 으뜸 한알의 힘, , 뜻에 하나하나 어울리는 나임주체성, 지각, 바람을 가지고 있다. 으뜸 한알의 이런 가진 것들은 다른 견줄 만한 것 없이 끝이 없고, 끝없이 차오른다. [나임이 끝없이 차오를 때 으뜸 한알의 힘에, 지각의 뚜렷함이 끝없이 차오를 때 으뜸 한알의 앎에, 바람을 이루는 힘이 끝없이 차오를 때 으뜸 한알의 뜻에 이르게 된다. 이 세 개의 차오름은 모든 온힘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만들어진 한알 또는 온힘이 가진 것들은 다만 으뜸 한알의 그것들을 본 딴 것들이며 한알들마다 제 나름의 끝을 가진 채 좀 더 또는 좀 덜 차오를 뿐이다. 헤르몰라우스 바르바루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케이아차오름을 가진 것이라고 뜻풀이했다.

49. [모든 한알들은 서로 잘 맞추어져 있다. 만일 어떤 한 한알이 다른 한알보다 더 많은 차오름을 가지고 있다면, 더 많이 차오른 한알을 가운데 두고 덜 차오른 한알이 맞추어져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덜 차오른 한알이 왜 그러한 모습을 띠는지를 말해주는 까닭은 더 차오른 한알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더 차오른 한알이 덜 차오른 한알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 만들어진 것이 차오를 때는 다른 만들어진 것으로 하여금 하게 한다고 말하고, 그것이 못차오을 때는 다른 만들어진 것에 의해 하게 된다고 말한다. [한알은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에, 한알이 가진 지각이 뚜렷하면 할수록 그 한알은 다른 한알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 모습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더 뚜렷하게 나타낼 것이다. 이 때문에 뚜렷한 지각을 가질수록 더 차오른 한알이고, 헷갈리는 지각을 가질수록 덜 차오른 한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한알이 뚜렷한 지각을 가질 때는 하게 함능동성을 지닌다고 말하고, 한알이 헷갈리는 지각을 가질 때는 하게 됨수동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50. [뚜렷한 지각을 가진 한알은 헷갈리는 지각을 가진 한알이 왜 그러한 지각을 가지는지 풀어 밝힐 수 있지만, 헷갈리는 한알은 뚜렷한 한알이 왜 그런 지각을 가지는지 풀어 밝힐 수 없다. 이처럼] 한 만들어진 것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다른 만들어진 것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겪지 않고서도, 풀어 밝힐 수 있다면, 이를 두고 앞에 것은 뒤에 것보다 더 차오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를 두고 앞에 것은 뒤에 것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게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한 한알이 다른 한알이 품고 있는 어지러운 정보를 밝혀 보여줄 수 있는 보다 뚜렷한 정보를 품고 있다면, 앞 한알은 뒤 한알보다 더 차오른 한알이며 하게 하는한알이지만, 뒤 한알은 앞 한알보다 덜 차오른 한알이며 하게 되는한알이다. 한 한알이 다른 한알을 하게 하고’, 한 한알이 다른 한알 때문에 하게 되는이러한 모든 맺음들은 한알들의 본모습에 따라, 그것들의 차오름에 따라 모든 한알들을 서로 어울리게 하는 으뜸 한알의 헤아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무 까닭 없이 마구잡이로 생긴 일은 없으며, 모든 일들은 그럴만한 넉넉한 까닭을 가지고 있다. 한 한알이 다른 한알보다 더 많은 본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한 한알을 가운데 놓고 다른 한알들을 거기에 맞추어야 할 까닭이 더 많이 생기될 것이다. 그 까닭이 많을수록 그 한알은 더 많은 하게 함을 지닌 한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좋은 어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떤 한알은 하게 하고어떤 한알은 하게 되는셈이다.]

51. [한 한알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 한알의 모습을 풀어 밝힐 수 있는가?] 모든 만들어진 한알은 다른 한알의 안쪽 모습을 바꾸도록 어떤 물리적 힘을 미칠 수 없다. 한 한알이 다른 한알과 서로 맺어질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길은 으뜸 한알이 가운데 끼어드는 길이다. 그래서 한 한알이 다른 한알에 미치는 힘은 오직 마음그림에 나타난 힘뿐이다. 으뜸 한알의 마음그림 속에서 어떤 한 한알은, 처음에 으뜸 한알이 모든 것을 차릴 때, 자신을 가운데 놓고 다른 한알을 맞추도록 으뜸 한알을 다그칠 만한 좋은 까닭을 가질 텐데, 이 좋은 까닭은 으뜸 한알의 헤아림을 거쳐 다른 한알의 바뀜을 낳을 수 있다. 이것이 한 한알이 다른 한알에게 미치는 마음그림의 힘이다.

52. [한 만들어진 한알은 다른 만들어진 한알을 하게 하지만 그 한알 때문에 하게 된다. 어떤 때는 뒤 한알이 앞 한알 때문에 하게 되지만 또한 앞 한알을 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 가운데서 하게 함과 하게 됨은 서로 주고받는다. [만일 한알 이 한알 을 하게 한다면 한알 은 한알 때문에 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하게 함과 하게 됨은 똑같은 크기로 주고받는다. ‘하게 함작용이라 한다면 하게 됨반작용이라 할 수 있는데, 작용과 반작용은 똑같은 크기로 서로 주고받는다.] 으뜸 한알은 [맨 처음에 모든 것들을 차려놓을 때] 두 안 섞인 밑바탕을, 그러니까 두 한알을 견주어, 이들이 있어야 할 까닭들을 들여다보고 이를 헤아려 한 한알을 다른 한알에 끼워맞추도록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래서 어떤 쪽에서 살펴보면 한 한알은 다른 한알을 하게 하지만 다른 쪽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다른 한알 때문에 하게 된다. 한 한알 속에 도드라지게 알려진 것이 다른 것 속에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의 까닭을 알려주는 만큼 그 한알은 다른 것으로 하여금 하게 한다. 제 속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의 까닭이 다른 것 속에 도드라지게 알려진 것에서 찾아지는 만큼 그 한알은 다른 것 때문에 하게 된다.

53. 으뜸 한알의 마음그림 속에는 있을 수 있는, 끝없이 많은 우주온알들이 들어 있다. [여기서 있을 수 있음이란 어긋나는 말모순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있을 수 있는 것들이 놓은 곳은 으뜸 한알의 마음인데, 그곳에 있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마음그림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것들은 서로 부딪힐 수 있다. 한 우주에서 정조는 화성으로 천도하지 못하지만 다른 우주에서 그는 끝내 천도하게 된다. 이런 있을듯한 일들 가운데서 하나가 바깥에서 참으로 일어나게 하려면 이에 마땅한 넉넉한 까닭이 있어야 한다.] 끝없이 많은 우주들 가운데 오직 하나만 으뜸 한알의 마음 바깥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으뜸 한알이 우주들 가운데서 하나를 고르도록 마음먹게 하는 넉넉한 까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54. 어쩌다 있을 수 있는 것이 여기에 있게 되는 넉넉한 까닭은 오직 그러한 우주들이 품고 있는 차오름의 높낮이 또는 어울림적합성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 있을 수 있는 우주들 하나하나는 그들이 제 속에 접고 있는 차오름의 크기만큼 으뜸 한알의 마음 바깥에 있게 해달라고 조를 만한 마땅한 힘권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깡그리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55. 으뜸 한알은 슬기로워 가장 좋은 우주를 알아볼 수 있고, 그는 착해서 그 우주를 고를 수 있고, 그는 힘이 세어 그 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탓으로 가장 좋은 우주가 바깥에 있게 되었다. [우주는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을 만든 이가 으뜸 한알이라면, 그 우주는 가장 좋은 우주여야 한다. 우리 우주보다 더 좋은 우주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하지만 그런 우주는 여기 바깥에 있지 않고, 여기 바깥에 있는 우주는 그것보다 못한 우주이다. 그렇다면 으뜸 한알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해서 우리 우주보다 더 좋은 우주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거나, 그런 우주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못되어서 그런 우주를 고르지 않았거나, 그런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골라서 여기 바깥에 있게 하고 싶었지만 힘이 약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으뜸 한알이 전혀 으뜸 한알이 아니라는 것이다. 으뜸 한알이 모든 것을 만들었고 그가 모든 것을 알고 끝없이 착하고 끝없이 힘이 세다면, 그가 덜 좋은 것을 만드는 것은 그의 본모습을 어기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 우주가 가장 좋은 우주보다 덜 좋은 우주라면, 으뜸 한알이 우리 우주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나아가 으뜸 한알이 있지도 않은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 우주가 있을 수 있는 우주들 가운데 가장 좋은 우주라는 말은 우리 우주에 아무런 나쁜 일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나쁜 것이 가장 적은 우주라는 말일 뿐이다. 우리 우주에 나쁜 일이 하나라도 있다면 이것은 우리 우주가 가장 좋은 우주가 아니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다. 우리 우주가 가장 좋은 우주임에도 불구하고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다만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 우주가 가장 좋은 우주가 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생겨야만 하는 일일 뿐이다. 그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그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른 우주를 만들 수 있어서 그것을 만들어낸다면, 그 새 우주에는 더 나쁜 일이 또는 더 많은 나쁜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56.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다른 것들과 서로서로 맺어져 어울려 있는 것은, 만들어진 하나하나가 나머지 모든 것들과 맺어져 어울려 있는 것은 한 안 섞인 밑바탕과 나머지 모든 것들 사이의 맺음을 만들어낸다. 다른 모든 것과 이러한 맺음을 가짐으로써 한 안 섞인 밑바탕은 우주의 다른 모든 것을 나타내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하나의 한알은 온 우주를 끊임없이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이다.

57. 한 똑같은 마을은 여러 쪽에서 보면 온통 서로 다르게 보이고 그 보인 모습조망들은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듯 하나의 우주도 보는 쪽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안 섞인 밑바탕들이 끝없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마치 그만큼 많은 다른 우주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하나의 한알이 오직 하나만 있는 그 똑같은 우주를 제 나름의 쪽에서 다르게 본 모습들일 뿐이다. [끝없이 많은 한알들은 가장 좋은 한 우주를 제 나름으로 다르게 나타낸다. 모든 한알들은 우주에 대한 한 제 나름의 조망이듯이, 나는 우주에 대한 한 조망이자 관점이자 전망이다. 나아가 생각할 수 있는 관점들의 개수만큼 한알들이 있으며 이 때문에 우주는 한알들로 꽉 차 있다.]

58. 이렇게 하는 것은 될 수 있는 가장 많은 가지런함질서을 지니면서 될 수 있는 가장 많은 온가지다양성를 얻는 길이다. [우주가 가지런하면 할수록 가지들이 적게 될 것이고, 가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지런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가지가 많고 가장 가지런한 우주가 가장 차오른 우주이다.] 다시 말해 이렇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가장 많은 차오름완전성을 얻는 길이다. [가지런한 우주일수록 더 큰 있음직함을 가지고 그 속에 가지들이 많은 우주일수록 더 큰 있음직함을 가질 것이다. 이처럼 가지런함과 온가지는 있음직함을 크게 한다. 으뜸 한알은 가장 가지런하고 가장 여러 가지인 우주를 만들 것이다. 또한 만일 누군가 우주를 만든다면 그가 가장 잘 헤아릴 수 있으며 가장 즐겁게 헤아릴 수 있는 우주를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가지런할수록 그는 그 우주를 더 잘 헤아릴 수 있고 가지가 많을수록 그 헤아리는 일이 더 즐거울 것이기 때문이다.]

59. 더구나 내가 밝혀 보여준 오직 이 이야기만이 으뜸 한알의 훌륭함을 올바르게 보여준다. 피에르 벨은 그의 <역사비판사전> 올림말 로라리우스에서 내 이야기에 어긋나는 말을 할 때 벌써 그는 내 이야기가 으뜸 한알의 훌륭함을 드높인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나아가 내가 으뜸 한알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으뜸 한알에게 바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벨은 밑바탕이 다른 밑바탕들과 서로 맺음으로써 다른 모든 밑바탕들을 흐트림없이 나타내고 있다는 온 우주에 걸친 이 어울림이 왜 일어날 수 없어야 하는지 그 어떤 까닭도 내놓을 수 없었다.

60. 게다가 내가 막 말했던 것들로부터 있는 것들이 다르게 있을 수 없었던 까닭을, 겪음에 앞선 까닭을 알 수 있다. 으뜸 한알은 온 우주를 짜면서 하나하나 조각에, 무엇보다 하나하나 한알에 마음을 기울였다. 한알은 본디 있는 것들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한알이 있는 것들 가운데 오직 몇몇 조각만을 나타내도록 굴레 씌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온 우주의 매우 촘촘한 모습들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한알은 온 우주는 다만 헷갈리게 나타낼 뿐이고 오직 몇몇 있는 것들을 좁게만 또렷하게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 한알은 제한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들만을 또는 가장 굵직한 것들만을 또렷하게 나타낸다. 만일 한알이 온 우주를 또렷하게 나타낼 수 있다면, 모든 한알은 하느님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알이 알 수 있는 것들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한알이 알 수 있는 것에는 끝이 없다. 한알의 앎에 끝이 있다면 그것은 한알이 모든 것을 또렷하게 알 수 없다는 데 놓여 있다. 모든 한알들은 비록 헷갈리기는 하지만 온 우주를 끝없이 꿰뚫어 본다. 어떤 한알은 더 또렷하게 지각하고 다른 한알은 덜 또렷하게 지각하기 때문에 한알들은 서로 다르고, 끝까지 또렷하게 지각할 수 없기 때문에 한알들은 끝을 가진다. [어떤 것이 한 한알의 가까운 곳에 있다는 말은 곧 그것이 그 한알 속에 또렷하게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어떤 한알의 먼 곳에 있다는 말은 곧 그것이 그 한알 속에 헷갈리게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온 우주를 비슷하게 나타내는 한알들은 서로 가까이에 있는 것인 양 말해도 된다. 한 우주에 대한 비슷한 조망들은 서로 가까이 몰린다. 이렇게 한곳 한곳이 모여 공간을 만들어내고, 공간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조망들로 가득 차게 된다. 한알이 우주를 빈틈없이 가득 채우고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Flewelling Ralph Carlin. Leibniz: It is God who is the final reason of things. A Mosaic in the Main Reading Room of James Harmon Hoose Library of Philosophy (1929, Los Angeles, The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Mudd Hall of Philosophy).

2011/07/07 22:43 2011/07/07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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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사랑

2011/07/07 13:04
아래 글이 몇 친구들에게 오해가 되어 다수 수정했습니다. 7월 14일 아침.

그동안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의문 내지 문제제기들이 그동안 많았다. 여러 배움벗들과 정민 샘을 포함하여 나의 여러 학회 동료 선생들.

먼저 나의 노선을 말해야 하겠다. 나는 폐쇄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말하자면 열린 민족주의자이고 어떤 의미에서 세계시민이다. 다만 지역에 머물러 있기를 만족하는 세계시민이다. 나는 특정 언어를 숭상하지 않는다. 히브어가 최고라거나 헬라스어 또는 라틴어, 불어, 독어, 산스크리트어, 중국어 등 특정 언어를 숭상하지 않는다.

내가 한말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내가 태양계 세 번째 행성 한반도에 출생했기 때문이다. 이 순전한 우연성 때문에 한말을 쓰고 있다. 이런 우연성에 근거해서 나의 언어를 숭상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다만 다른 언어에 비해 한말에 익숙할 뿐이다. 나는 한말에 익숙한 다른 동료에서 남다른 애착이 있을 뿐이다. 영어만을 사용하는 동료는 나에게 없다. 나는 나의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말을 듣기 위해 한말을 쓰고 한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이 더 우수하고 탁월하고 예뻐서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뜻이 통하면 그것은 나의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누구를 말할까? 나는 대학교 때부터 물리학, 수학, 철학, 신학 등을 공부했는데, 그토록 홍수를 이루는 한자어 낱말들이 우리가 공유하는 낱말인지 의문을 가질 때가 많았다. 예컨대 내가 유럽철학을 배울 때 "소격화"라는 낱말이 나왔다. 나는 이것을 "소격화"라고 읽을지 "소:격화"라고 읽을지 몰랐다. 그 뜻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영어 번역어인 "distanciation"이 더 잘 와 닿았다. 물론 한자어를 잘 아는 사람은 "소격화"라고 하면 뜻이 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뜻이 통하고 그것이 우리말일까?

"소격화"를 이해하기 위해 사람들은 "소"와 "격"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겠지. 텍스트를 잘 이해하려면 한자 공부를 해야 한다고. 과연 한자에 그칠까? 우리말을 이해하기 위해, 중국식 한자어, 일본식 한자어, 한국식 한자어, 그리고 영어를 배워야 하고, 또 누군가는 라틴어까지, 심지어 헬라어까지 알아야 우리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여기서 "우리말"은 누구의 말을 말하는가?

나는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아이들에게 성경공부를 가르친 적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에게 산수를 과외한 적이 있다. 나는 중학교 1학년에게 과학을 강의한 적이다. 중3과 고1과 고2에게 물리학을 강의한 적이 있다. 나는 내 여동생과 어머니와 나랏일에 대해 토론한다. 나는 이들과 대화할 때 "우리말"이 필요하다. 이들에게 대화할 때 사용하는 말이, 그들이 하는 말이 나에게는 "우리말"이다. "우리"라는 것은 대화 당사자에 의존한다. 만일 내 친구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친구들이라면, 아마도 우리말은 영어과 한말이 섞인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우리말로 논리학을 하고, 철학을 하고, 물리학 및 수학을 하려고 할 때, 여기서 "우리"는 내가 말을 거는 상대에 달려 있다. 나는 학자들을 대상으로 발표를 할 때, 그들에게 이해되는 말을 한다. 내 논문도 그렇게 쓰고 내 발표문도 그렇게 쓴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우리란 전문학자들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어머니와 아버지"할 때 "와"가  한문의 "與"에서 왔다고 한다. 이 주장 자체가 의심스럽지만, 이 말은  (한자어를 더 많이 써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순우리말이 없다거나 우리말이 없다거나 우리말과 외래어를 구별할 수 없다거나 한자어 사용 빈도를 줄일 수 없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나는 한반도 거주자들이 "그리고" 또는 "함께"를 뜻하는 어떤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논리학에서 몹시 중요한 이 연결사(논리적 상항)가 결여된 언어를 사용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의 발음이 무엇이든 그것에 해당하는 낱말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 "이고", "와" 등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설사 "와"가 한문의 "여"에서 왔다고 해서 내가 "와"를 쓰지 말자고 하지 않는다. 유치원생인 내 조카는 "어머니와 아버지"라고 할 때 "와"를 이해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또 누군가는 한자가 우리 문자라고 말하면서 한자어 사용 빈도를 줄이는 데 반대한다. 하지만 내 생각에 한자도 우리 문자라고 주장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고대 수메르어가 우리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설사 산스크리트 문자를 1만 전 우리 민족이 만들었다고 해서, 그 문자가 우리의 문자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날 때부터 한말 낱말을 배웠고 한말 글을 썼다. 나는 내 수업 듣는 학생들에게 한자가 우리 문자일 수 있으니, 나는 한자어 사용 빈도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한자어를 가급적 많이 사용하겠다,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대화이며 이해이지, 순수한 우리 정신을 회복하고 찾는 것이 아니다. 순수함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내가 배움동무들, 아이들과 어머니들과 아버지들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대화 속에 있다. 나에게 우리란 나의 동시대 사람들, 내 근처에 있는 사람들, 내 관심 반경에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 "우리"가 점차 넓어져야 하겠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왜 대화를 할 때, 한문과 영어와 라틴어와 헬라어와 산스크리트어와 히브리어에 정통해야 철학의 심연을 이해하고, 사상의 심연을 느낄 수 있는가? 이 땅에서 태어나 배운 말에 무엇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나는 한말이 완전하고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한말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조선반도 지식인들의 수백년 간 풍토에 불만을 가질 뿐이다. 나는 한말을 사랑한다. 한말이 완벽하고 가장 탁월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우리가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언어 안에서 지혜를 이야기하고 지성을 이야기하고 진리를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말을 사용하는 이 지역의 인류들을 위해.

2011/07/07 13:04 2011/07/07 13:04
  1. Plutonian
    2011/07/13 03:43
    사족이 아닐까 걱정되지만 몇 자 적어봐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ㅇㅇ씨가 왜곡했다고 느끼는 점이 한자어 사용 등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은 아닐는지요. 제 기억에 그 글에서 한자어를 더 많이 써야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ㅇㅇ씨 글에 대해 시비를 걸겠다는 두 문단 모두 비판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조금 들기는 했습니다. (여기에서 비판된 한자어 사용에 대한 견해와, '순수'어 사용에 대한 견해에 대해 ㅇㅇ씨는 모두 반대하실 것 같으니까요.) 그런데, 저도 선생님께서 그걸 몰라서 쓰셨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걸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 읽은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어쨌든 ㅇㅇ씨의 글을 재밌게 읽어왔는데 전 무엇보다도 그냥 아쉽네요.

    그건 그렇고^^; 우리가 보다 잘 의사소통하기 위한 실용주의적인 작업으로 한말쓰기를 추구하신다고 하셨는데, 궁금한 점이 있었어요. '우리'의 범위가 달라질 때마다 다른 말을 구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인지 아닌지가 궁금했습니다. 예컨대 전문학자들사이에서 '소격화'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유지돼야하는 이유가 현재의 현실적 상황으로 인한 것(, 그래서 점점 그런 단어는 덜 사용돼야하며 지금은 그 준비상황인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그런 단어를 쓴다는 그 사실로 인해 바로 그것이 정당화되는지를요. 전자와 같이 생각하실 것이라고 예상해요. 만약 후자의 견해라면, 한말로 전문용어를 다듬어 사용하게 될 때 오히려 전문가집단과 비전문가집단 사이의 언어를 다르게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했거든요.

    또 궁금한 점은, "중요한 것은 대화이며 이해이지, 순수한 우리 정신을 회복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굳이 '깔', '게'와 같은 낯선 말(물론 '색깔', '무게'와 같은 아주 익숙한 단어들에 이런 말이 쓰이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단독적으로 '깔'이나 '게'와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진 않으니까요.)을 통해 새 말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할까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바꾸려고 하는 한자말 등이 사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게 들어와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형상'이라든지 '학문'과 같은 단어들이요. 이 단어들을 굳이 한말로 바꾸는 것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새로 들어오게 될 전문용어들을 우리말로 잘 번역하기 위해 기반을 다져놓는 것이라면 설득력이 있지만, 사실 저는 이미 익숙해진 말들은 그냥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에 있습니다. 앞으로 잘 만들면 되지요. 그렇지 않고 이미 익숙한 말들도 다 바꿀 것을 요구한다면 오히려 그런 작업이 번역작업은 아닐까란 생각이 좀 들고, 또 그건 조금 폭력적인 것일지도 몰라요. 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말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한자어, 영어 등을 알아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말에 뭔가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러자는 주장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요. 선생님 말씀처럼 '그리고'를 표현하는 말은 어느 문화권에든 존재할테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말을 쓰면 된다고 저도 생각해요. 근데, 말을 통해 철학이나 사상의 심연을 이해해야한다는 주장은 그것이 어떤 기반 위에서, 어떤 맥락에서 탄생한 것인지 알기 위해 그러자는 학문적인 주장이 아닌가요. 우리말이 내적으로 뭔가를 결여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외부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무언가 더 첨가할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그러한 주장이 우리말에 대한 평가절하를 내포하진 않는다고 봐요. 물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말을 평가절하하는 성향을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근데 그렇다면 차라리 그런 편견을 제거해야 된다고 말해야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한글말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더 많지는 않은가요? 학자들은 몰라도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획일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자어나 영어 기타 외래어 보다 한글이 사용될 때 더 독특하고 좋다는 인상을 받는, 그런 경향이 전 분명 있는 것 같아요. 민주주의적인 경향들도 여기에 한 몫 할테고요.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데, 궁금하네요.)

    언어가 단순히 도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언어를 통해 우리들이 구성된다는 이론을 접한 적 있는데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전 어떤 언어든 그냥 뜻만 통하면 되는 것이라곤 생각하지는 않아요. 거기에 얽혀 있는 여러가지 것들을 같이 읽어내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생님의 작업들도 의미 없는 일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실용적이어서 좋다기엔 제게는 좀 과한 구석이 있는 것 같네요. ㅜㅜ '이고 넣기'와 같은 새말은 정말 직관적으로 와닿고 좋았지만 '갈말'이라니, 너무 어려워요. 아,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암튼 전 우리말을 사랑하진 않고;; 오랫동안 쓰였고, 우리에겐 분명 의사소통수단 이상의 어떤 의미 비슷한 게 있는 우리말이니까 잘 다듬고 보완해서 썼으면 좋겠어요.
  2. 성재
    2011/07/23 21:47
    저도 선생님과 같은 뜻을 품고 있어요^^
    송태효 선생님(숙대)께서 이러한 작업에 많이 힘 쓰시고 계십니다.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되시리라 봅니다.
    송선생님 블로그 : http://121.132.42.169/webhard/tc/amrr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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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우리가 쓰는 갈말학술어들은 거의 한자말로 되어 있다. 이것은 때때로 생각을 바르고 깊게 하는 데 걸림돌이 되곤 한다. 나는 말길갈논리학에서 쓰는 한자어 갈말들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많이 우리말 낱말로 바꾸고자 한다. 한자어를 되도록 쓰지 않고 한말 낱말을 쓰는 첫째 까닭은 우리가 다룰 이야기들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한말 낱말로 된 갈말들이 처음에는 죄다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그 갈말이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한자어로 되어 있는 갈말에 낯익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냥 낯익음만으로는 이야기가 쉽게 되지 않는다. 낱말의 뜻이 머릿속에 빨리 들어오고 떠올라야 한다. 우리말 낱말로 된 갈말들에 낯익게 되면, 낱말 하나하나의 뜻이 고스란히 머릿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처음의 낯섦을 조금만 참아주기 바란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이다. 먼저 “배움”에서 바탕이 되는 갈말을 배우고, 한 배움이 끝난 뒤 “본때”예제와 “닦달”연습에서 배운 것을 익힌다. “본때”는 갈말들을 제대로 알아듣도록 본보기 물음을 주고 이를 풀어준다. “닦달”에서는 배운 것을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한다. 여기서 닦달한다는 것은 남을 윽박지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뭔가를 매만지고 다듬는 것을 뜻한다. 배운 것을 우리 삶에 쓸 수 있도록 우리는 배운 것들을 매만지고 다듬어야 한다.

함께 쓴 이들

<말길 첫걸음>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써졌다. 나는 열 해가 넘도록 대학교에서 말길을 가르쳤다. 군더더기를 없애고 오로지 말길의 건더기만을 가르치기를 바랐다. 교실에 만난 수많은 배움벗들은 나를 북돋았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알속들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그들이다. 특히 「생각실험실」의 김가영 김수민 박진원 손혜연 이리나 이주희 이준영 정성경 등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들은 책의 구석구석을 다듬어 예쁘게 꾸며주었다. 대학교에서 논리학을 가르치는 여러 선생들은 우리의 이 일을 기쁜 마음으로 박수쳐 주었다. 김명석.



말길 첫걸음 버전 035 | 2011년 4월 28일

[단행본 발간 관계로 pdf 파일을 내립니다] http://real.ize.kr/tl/209 에서 단행본 버전을 참고해 주세요.


* 이 버전은 2011년 4월 28일에 수정되었습니다. 오타가 발견되면 아래에 댓글을 달아주세요. 잘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있다면 질문해 주세요. 그리고 개선할 사항 있으면 제안 바랍니다.

2011/04/28 23:23 2011/04/28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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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 | 늧 | 수 | 낌새 | 나위
가상 | 허깨비
가치 | 쓸모
개념 | 낱말뜻
결론 | 따름말 | 맺은말
경도 | 씨금 | 씨도
경위 | 맹문
경험 | 미림 | 겪음
계기 | 기틀
공동체 | 동아리
공리 | 바탕말
공준 | 부름말 | 받침말
과학 | 참앎
과학적 방법 | 알길
관계 | 맺음
관념 | 마음그림
관형격 | 매김자리
관형어 | 매김말
구조 | 얼개 | 짜임
궤적 | 자리길
규범 | 지킴말
기계 | 움직틀
기본원리 | 바탕 으뜸말
기억 | 떠올림
기회 | 기틀 | 김



내용 | 알속 | 담긴것
논리 | 말길
논리학 | 말길갈
논리학자 | 말길꾼
뉘앙스 | 뜻색깔
능력 | 깜냥



단문 | 홑월
단순 | 홑겹 | 한겹 | 말끔
단순한 | 안 섞인
단자 | 한알
도 | 금
동물 | 짐승



만물 | 온 | 온갖 | 온가지
명세 | 속가름
모순 | 어긋남
모순명제 | 어긋난말
목적원인 | 목적인 | 끝내게 하는 탓 | 끝탓
목차 | 벼리
문맥 | 글발
문법 | 말본
문법학 | 말본갈
물질 | 몬



반복 | 거듭 | 되풀이 | 포배기
반사실적 가정 | 뻔 글월
반성 | 들여다봄
방법 | 길
방향 | 녘
범위 | 버렁
법 | 도래 | 굴레
보어 | 기움말
복합 | 여러 겹 | 섞임
복합어 | 겹씨
본성 | 본디
본질 | 알짜 | 알천 | 알짬 | 앙금 | 골갱이 | 알갱이
부분 | 조각 | 어섯
부수속성 | 우연속성 | 겉모습
부서 | 벗
분석 | 쪼개기
비교 | 견줌



사물 | 치 | 것
사실 | 있는일
상극 | 비각
상태 | 모습
세계 | 온갖 | 온갖것 | 온것
설명 | 풀어밝힘 | 푼말
성과 | 보람
소유 | 해
속성 | 어섯
수반 | 뒤따름 | 따라다님 | 딸림
수식사 | 꾸밈씨
수식어 | 꾸밈말
수학 | 셈배움
수학자 | 셈꾼
순수 | 제국
술어 | 풀이말
식물 | 풀 | 나무풀
실재성 | 있음직함
실체 | 밑바탕 | 붙박이  밑박이 밑절이



양 | 게
어감 | 말맛
어소 | 늣 | 늣씨
어원 | 말밑 | 말밑천
언어학 | 말갈
여유 | 나위
여지 | 나위
역량 | 깜냥
역할 | 구실
영혼 | 넋
예정 | 터
우연 | 마치가락
우주 | 온통 | 온갖것
원리 | 으뜸말 | 으뜸생각
원소 | 밑알 | 으뜸알 | 한알 | 씨알 | 본알
원어 | 밑말
원인 | | 빌미
원자 | 못나눔알
윤문 | 글치레
우연일치 | 마치가락
위도 | 날금 | 날도
이성 | 헤아림
이유 | 까닭 | 턱
이해력 | 간각 | 알아차리는 힘
인상 | 자극 | 찌름
인용하다 | 따다 | 따오다



자기 | 자신 | 제 | 이녁
자아 | 제맘
자연 | 자람 | 난것 | | 스스로 | 스스로 말미암음 | 스스로 자람 | 자란것
자오선 | 날줄
자유 | 풀림 | 묶임
작용원인 | 힘을 미치는 탓 | 힘탓
장래성 | 늘품 | 싹수
전문 | 손앞
정념 | 겪음 | 느낌
정의 | 뜻매김말 | 뜻매김
정체성 | 됨됨이 | 나름
제약조건 | 가탈
조사 | 토씨
존재형용사 | 있음그림씨
주석 | 뜻풀이
주어 | 임자말
질 | 깔



차례 | 다음째
책임 | 구실
철학 | 깨달음사랑
철학자 | 깨달음사랑꾼
추론 | 이끌기
추상 | 추려냄



탐구하다 | 뜯어보다



판단 | 가리산
판단력 | 가리사니
평가하다 | 꼲다
평서문 | 베품월
표시 | 표시 | 보람
표제어 | 올림말
필요 | 며리



학술어 | 갈말
학식 | 글속
한계 | 그지
행동 | 짓
형용사 | 그림씨
혼 | 넋
혼란 | 혼동 | 주저리
환각 | 헛것
효과원인 | 힘을 미치는 탓 | 힘탓

2011/04/22 15:45 2011/04/2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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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

2011/04/17 21:19

1. 과학 같은 예술

존재의 아름다움과 앎

푸른 하늘에 번져 가는 붉은 저녁놀, 피어오르는 연기, 집시 같은 양털구름, 강물에 반사되는 햇살, 수줍게 흔들리는 연두 빛 새싹, 기하학자가 만든 듯한 고사리, 바다와 하늘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덮인 수평선, 부드러운 백사장 위에 놓인 빙글빙글 소라껍질과 알록달록 자갈. 이 모든 것들은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 아름다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나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물리학을 공부했다. 과학이 이 아름다움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흔히들 과학은 예술과 무관하다고 말한다. 과학의 임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있는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미술과 문학은 진상을 변덕스럽게 부풀리거나 왜곡하기 때문에 과학은 이들 예술을 때때로 조롱하기까지 한다. 이런 관점은 과학사 전체를 지배했으며 대부분의 과학자와 예술가들은 이 관점에 특별한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은 사실에 관계하고 예술은 허구에 관계한다고 다들 말한다.

과학과 예술은 둘 다 본성상 알고 싶어 하는, 이해하고 싶어 하는 인간 의식의 발견물이자 발명물이다. 우리를 과학적 탐구로 이끈 것은 한편에서 자연의 진짜 모습에 접근하고 싶은 열정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다. 그러나 이 감탄은 한낱 정서적 느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다. 이 감탄은 우리의 현재 인식 프레임을 넘어선 어떤 인식의 존재를 감지하는 첫 느낌이다.

인식으로서 예술

원래부터 예술은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지 모른다. ‘과학’에 상응하는 그리스어는 ‘에피스테메’(episteme)인데 이것은 근거 없는 신념이나 개인적 의견과 구별되는 참된 지식을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주저 "메타피지카"(물리학 그 다음)에서 에피스테메를 크게 3가지로 나누었다. 테오리아(theoria), 프락시스(praxis), 포이에시스(poiesis).

테오리아는 “관조” 또는 “봄”을 뜻하는데, 이론적 지식을 가리킨다. 실제로 테오리아는 “이론”(theory)이라는 단어의 어원이기도 하다. 테오리아에 속하는 과학으로는 수학, 물리학, 신학 등이 있다. 프락시스는 “행위” 또는 “함”을 뜻한다. 이것은 윤리나 정치에 관계되는 지식을 가리키는데, 흔히들 실천적 지식이라 한다. 우리말에 “할 줄 안다”라는 표현이 있다. 프락시스란 바로 이러한 “할 줄 앎”이다. 착하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 가진 능력을 ‘덕’(arete)이라 한다. 한편 포이에시스는 “제작” 또는 “만듦”을 뜻하는데, 예술이나 기술에 관계되는 지식을 가리킨다. ‘예술’ 또는 ‘솜씨’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테크네’(teche)는 아름다운 제품이나 작품을 만드는 데 요구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말에 “만들 줄 안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포이에시스는 바로 이러한 “만들 줄 앎”이다.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글과 그림과 노래를 만드는 것도 포함한다. 실제로 포이에시스는 시(poem; 詩)의 어원이기도 하다. 만드는 일에는 심지어 건물, 공동체, 제도, 사람까지도 포함한다.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고, 아름다운 제도를 만들고, 아름다운 사람을 키우는 일에도 ‘테크네’가, 그리니까 예술이 요구된다.

인식이란 단순히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착한 일을 할 줄 아는 것, 그래서 세계를 더 좋게 바꿀 줄 아는 것도 인식의 한 유형이다. 나아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 줄 아는 것, 그래서 세계 속에 아름다운 것들을 새롭게 창출할 줄 아는 것도 인식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세 종류의 앎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인식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간섭하고 강화한다. 세계를 더 잘 보는 사람이 세계를 더 좋게 바꿀 줄 알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세계를 더 잘 본다. 세계를 더 잘 보는 사람이 더 아름다운 것을 만들 줄 알고, 그것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세계를 더 잘 본다. 세계를 더 좋게 바꿀 줄 아는 사람이 더 아름다운 것을 만들 줄 알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세계를 더 좋게 바꿀 줄 안다.

다른 시선들, 더 넓고 깊은 인식

불현듯 펼쳐진 고흐풍의 하늘과 엘라 피츠제랄드의 째즈처럼 고단한 도시의 야경은 과학적 세계 바깥에 놓여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하늘과 야경과 인생이 물리학자가 묘사하는 대로 쿼크와 렙톤과 게이지 입자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입자들의 성질과 배열은 세계에서 일어난 일의 모두를 포착하지 못한다. 집은 단순히 벽돌더미가 아니며, 음식은 단순한 영양소의 결합체가 아니다. 세계를 과학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이 모든 진실을 파악하는 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 하늘은 레일리 산란(Rayleigh scattering) 그 이상을 담고 있다. 실재에 접근하는 데 과학적 언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시선, 다른 시각, 다른 조망이 필요한데 예술은 다른 시선의 존재를 가리키는 감탄이자 그런 시선을 발견하려는 열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마치 과학처럼 실재에 부단히 접근하는 인식 활동이다.


2. 예술 같은 과학

진리의 배반자들

여기 흰 가운을 걸친 사람이 있다. 그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차갑고 날카로운 비커를 들고 있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과학자이다. 과학자를 이처럼 무미건조한 냉혈한으로 묘사하는 일은 매우 낯익은 일이다. 시인이 무지개를 노래할 때 과학자가 하는 일이란 고작 그 아름다운 무지개를 400 나노미터와 700 나노미터 사이의 전자기파로 풀어헤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이 과학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과학철학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의 별명은 아이러니하게도 ‘진리의 배반자’였다. 과학은 진리를 탐구한다고,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참되게 탐구한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들 ‘진리의 배반자’는 오직 진리만을 외치는 주류 과학의 위선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과연,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발견하고, 이것을 사실적으로, 냉정하게 묘사하는 것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일까? 검출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경험할 수 없는 공간을 꾸며내는 것은 진리를 배반하는 것일까?

과학 발전을 저해하는 원흉으로 낙인찍힌 이 ‘진리의 배반자’들은 다름 아니라 포퍼 Sir Karl Raimund Popper 1902~1994, 라카토슈 Imre Lakatos 1922~1974, 쿤 Thomas Kuhn 1922~1996, 파이어라벤트 Paul Feyerabend 1924~1994이다. 이들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과학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고 싶었던 것은 과학에 대한 맹신, 소크라테스가 그랬던 것처럼, 맹신에 대한 맹신을 경계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가 작은 알갱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맹신한다. 우리는 이 알갱이와 저 알갱이가 분리되어 있다고 맹신한다. ‘진리의 배반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오히려 이러한 맹신이 인간 인식의 성숙을 저해하는 원흉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과학자가 다른 사람보다 세계에 관해 더 많은 진리를 발견한다는 발상을 비판했다. 파이어라벤트는 <방법에 도전>(1974)에서 과학과 비과학을 엄격하게 구별해 주는 소위 ‘과학적 방법’을 엄선하려는 주류 과학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그 대신 그는 인식 양식의 다양성을 옹호했는데, 특히 <자유사회에서 과학>(1978), <이성이여, 잘 있거라!>(1987), <지식에 대한 세 대화>(1991) 등에서 소수문화와 대안적 의술에 지지를 보냈다. 파이어아번트는 객관성과 합리성만을 추구하는 주류 과학자들에게서 대중을 현혹하는 소피스트의 모습을 보았다.

“무한한 무지라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는 포퍼의 말은 과학이 세계에 대한 탐구에서 독점적 우월권을 지닌다는 발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말이다. 과학이 세계에 대해 알아보았자 얼마나 알고 있겠느냐! 무한한 진실들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현재 우리의 무한한 무지를 표현하기 위해 과학은 오히려 예술의 들뜸과 겸손함을 배워야 한다. 포퍼는 과학이 예술적 창작 활동과 비슷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상력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 훨씬 너머로 우리를 모험하게 한다. 과학자가 예술적 감각을 지닐 때 그는 세계에 대한 보다 성숙된 이해로, 때때로 인식의 도달불능점으로 감행하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진리의 배반자’들이 원했던 것은 냉혈 과학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이었을 것이다.

코스모스, 꾸며진 세계

과학은 코스모스를 탐구한다. 또는 과학은 자연 속에서 코스모스를 발견한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과학은 세계를 코스모스로 만든다. 아주 오래 전에 누군가, 깔끔하게 사열된, 말끔하게 꾸며진 세계를 가리키기 위해 ‘코스모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화장품을 뜻하는 ‘코스메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듯이, 코스모스라는 말 자체가 “꾸밈”을 뜻한다. 과학이 하는 일은, 군사령관이 사병과 병마를 사열하듯이, 행정관이 법을 사리에 맞게 집행하듯이, 요리사가 식재료를 조합하여 맛있게 요리하듯이, 청소부가 더러운 것들을 말끔하게 치우듯이, 자연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다. 이 점에서 과학자는 마치 예술가처럼 세계를 제작하고 있다. 예술이 세계를 재구성하는 만큼 과학도 세계를 미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굿먼 Nelson Goodman 1906-1998이 주장했듯이 우리는 말 없이 세계를 가질 수 없다. 우리가 과학적 세계를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말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말을 통해 세계를 말할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파악될 수 있도록 재단된 세계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세계를 코스모스로 재단하기 위해서는 과학자는 멋진 재단사 다시 말해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과학이 예술의 옷을 입을 때 과학적 세계가 흐려지거나 인간 인식이 타락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과학은 실재의 표면에서 실재의 심층으로 내려갈 새로운 상징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보다 깊고 보다 넓고 보다 높은 수준의 코스모스를 만나기를 바란다면 과학은 매번 다시금 예술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3. 경계 넘기: 미술관 옆 실험실

이성의 세계, 감성의 세계

지배자는 권좌에 앉아 부동의 자세로 신하들에게 명령하고 신하들은 명령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인다. 자연을 이루는 수많은 사물들의 움직임을 명령하는 자연의 지배자가 존재할까? 최초의 과학자들은 자연의 최고 지배자를 찾는 일을 자기 임무로 삼았다. 그들 중에 이성을 그 지배자로 보는 견해가 이윽고 출현했는데, 이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궁극적 불변자를 발견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이성에게만 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오직 이성만이 궁극적 불변자이며 다른 모든 변화들을 지배한다는 뜻이다. 여태 과학은 이성의 힘으로 한 세계, 통일된 세계, 변화하지 않는 세계, 질서 잡힌 세계, 로고스 그 자체인 세계를 발견하려는 운동을 이끌어왔다. 이성의 단일지배체제 아래에서 변화는 불변자가 만들어낸 환상 또는 겉보기에 불과했다.

한편 바뀌는 것들을 예찬하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세계 속에서 다수성과 다양성과 변화를 감각한다. 감각에 의존하면 할수록 불변자는 사라지고 변화만이 남게 된다. 변화를 진정한 실재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감각의 세계 또는 무상한 세계이다. 이런 식으로 이성과 감성의 대결 구도가 구축된다. 한쪽에는 이성의 담론으로서 과학이 있고, 다른 한쪽에 감성의 담론으로서 미학 또는 예술이 있다. 과학은 단일성과 통일성과 불변성에 근거해서 세계를 찾고, 예술은 다수성과 다양성과 변화에 근거해서 세계를 만든다. 이런 플랫폼에서 플라톤과 호머, 수학과 시, 마음과 몸, 관조와 노동, 이상과 현실, 참과 아름다움이 대립한다. 둘의 경계는 너무나 선명해서 가야금을 연주하는 물리학자, 수학을 공부하는 화가는 몹시도 특이한 인물, 단순히 다재다능한 인물로만 간주된다. 하지만 저러한 대결 구도는 과학과 예술을 왜곡하는 굴절 안경일 뿐이다.

실험실로 간 예술가

예술은 감각의 세계를 확장하는 운동을 이끌어왔다. 미술은 사물들의 배치를 다르게 보는 방식을 개발함으로써 아직은 우리 눈으로 보지 못했던 새로운 공간을 창출했다. 음악은 사건들의 배치를 다르게 듣는 방식을 개발함으로써 아직은 우리 귀로 듣지 못했던 새로운 시간을 창출했다. 서사와 연극과 영화 등은 사물들의 시공간 배치를 다르게 느끼도록 함으로써, 또는 그 배치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융합함으로써 우리가 아직 느끼지 못했던 감각적 경험 공간을 창출했다.

한편 과학은 불변 구조를 지닌 세계, 고정된 유일무이한 세계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은 예술가가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보게 하는 데, 그래서 감각의 세계를 확장하는 데 참여한다. 수학, 음향학, 신경과학 등은 작곡가들에게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소리를 배치하도록 도왔다. 빛, 색깔, 상대성의 과학은 인상파 화가, 피카소, 달리 등으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그리도록 도왔다.

이처럼 예술가는 과학의 도움으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만들었는데, 이런 활동 속에서 과학과 예술의 경계가 흐려졌다. 예컨대 어떤 화가는 자외선만으로 본 세계, 적외선만으로 본 세계를 감히 그리고 싶을 것이다. 반사와 굴절이 만들어낸 세계 말고 간섭과 회절이 만들어낸 세계를 그리고 싶을 것이다. 예술가는 과학적 통찰을 통해 기존 예술들 간의 경계, 나아가 예술의 한계를 넘는다. 영화, 홀로그래피, 스펙트럼 음악, 인터렉티브 아트 등이 이런 식으로 생겨났고 앞으로 계속 새로운 유형의 예술이 생겨날 것이다.

창작하는 과학자

거의 모든 영화는, 심지어 공포영화와 SF영화와 판타지영화까지도, 실제 세계보다 더 진실된 면을 보여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한 사건을 다양한 앵글에 담아 다르게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사건의 진상을 더 잘 볼 수 있다. 또한 그 사건이 발생한 전후 맥락을 다양한 시퀀스로 다르게 보여줄 때도 우리는 마찬가지 경험을 한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실생활에서 피상적으로 관찰하는 사건들을 재조명한다. 시간 배치와 공간 배치를 바꿈으로써, 프레임을 바꿈으로써 영화가 얻고자 하는 것은 삶의 진실이다. 소설 또한 성격과 사건과 인물과 대사 등을 자유자재로 배치함으로써 삶의 심층을 탐사한다.

미술은 우리의 해부학적 시각 기관으로 파악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그린다. 음악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으로 세계를 구성한 후 이를 무한히 변주한다. 예술가는 이런 활동을 통해 무엇을 얻는가? 그가 얻고 싶은 것은 진짜 세계이다. 그는 허구를 만듦으로써 진실을 찾는다. 바로 이 방식은 과학자들이 세계의 진짜 모습을 찾고자할 때 채택하는 방식이다. 마치 연금술사가 세상의 온갖 재료들을 이러 저리 섞어서 가능한 모든 변화들을 산출하듯이, 현상학자가 자기 상상력을 끝장까지 철두철미하게 자유자재로 밀고나가듯이, 물리학자는 존재하는 사물들과 그 변화들을 위상공간 내에서 이리저리 변환한다.

연금술사는 그런 방식으로 변화를 지배하는 근본 물질을 발견하고, 현상학자는 지향세계의 의미 구조를 파악하고, 물리학자는 복잡성과 가변성 속에 깃들어 있는 자연의 보존량을 발견한다. 실험 과학자가 하는 일도 바로 이런 것이다. 실험실은 자연을 단순히 재현하는 곳이 아니다. 과학자는 실험실에서 자연을 만들고 그것을 강제로 바꿈으로써 그러한 바꿈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요소를 발견한다. 그것이 질량이든 전하량이든 또는 운동량이든 에너지든, 아니면 쿼크든 DNA든 자연의 불변자 또는 질서의 담지자를 찾는다.

더 깊은 곳의 세계, 실재의 심연을 보고자 하는 사람은 예술과학자 또는 과학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그는 자연을 보는 시각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끊임없이 변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연을 자유자재로 창출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는 자연 깊숙이 숨은 대칭성을 추상함으로써 자연의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또한 대칭성을 보다 더 깊숙이 숨김으로써 사물의 아름다움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서 과학과 예술은 통합되고, 세계는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게 우리에게 내려앉고, 우리 삶은 보다 온전해진다.

2011/04/17 21:19 2011/04/17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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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봄 대학생 김예슬은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김예슬에게 대학교는 “자격증 장사 브로커”였고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일 뿐이었다. 그의 말처럼 대부분의 20대 대학생들은 대학교 안에서 세상의 경쟁 압력에 적응하는 법을 배울 뿐이었다. 대학교를 거부하는 행위는 곧 “두려움과 불안”을 반사적으로 촉발하기 마련이다. 대학교를 뛰쳐나오려는 자들은 내면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래도 대학교는 나와야지”라는 목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목소리 자체가 우리의 현재 체제를 떠받치고 있다. 김예슬은 이 보수적 목소리를 거부하고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대학교를 거부하기로 작정했다. 그는 아마도 지금 “자유의 대가로”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려는 그의 용기는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려는 다른 많은 동료 젊은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배움이란 무엇일까? 가르침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고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배워본들, 가르쳐본들 내 삶이, 세상이 더 좋게 바뀔까? 나는 비정규직교수이다. 정부와 대기업과 대학교의 합작을 통해 만들어진 지배 매트릭스를 지탱하는 데 마지못해 종사하고 있다. 다른 대학생 심해린은 김예슬 선언에 교수들이 침묵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나는 학생에게든 다른 교수에게든 대학교를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대학은 우리 인류의 오래된 유산이고, 이 유산을 현행 대학교의 행정적 지배자들이나 국가의 관료들 또는 시장의 보스들이 독점하게 할 순 없다. 우리는 그 유산을 지키고 드높일 의무가 있고 또한 그럴 권리가 있다. 나는 내 위치에서, 내 탐구에서, 내 성찰에서 그런 의무와 권리를 다하며 살고 싶다. 물론 이 말은 김예슬의 행동과 심해린의 개탄이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올곧은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세상을 바꾸는 데는 많은 스타일이 있다. 김예슬의 방식은 그 다양한 것 중에 하나이고 몹시도 아프지만 아름다운 방식이었다. 선생들 중에 누군가가 대학교를 박차고 나온다면 그것도 멋진 방식이 될 것이다. 내 스타일을 무엇일까? 대학교에, 우리 사회에, 세상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는, 내가 기꺼이 투신할 수 있는 실천 방식은 무엇일까? 오래 전부터 이를 고민했다. 우리는 두려움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과감한 것이라고 거의 생각해 낼 수 없다. 몹시도 급진적인 사상을 머릿속에서 게으르게 상상할 수는 있겠지만, 끝장을 볼 때까지 실행에 옮길 만한 것이 그다지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의 상상력은 권력을 잃었고 남들이 금지하는 것을 우리도 금지한다. 나도 제도 교육에 불만을 품고 다니던 학교를 그만 둔 적이 있는데, 심지어 이것조차도 희망과 용기의 산물이 아니라 어쩌면 절망과 두려움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조만간 한국사회에서 고등학교 졸업자와 대학교 입학 정원이 같아지거나 역전될 날이 올 것이다. 대학교들은 구조조정을 해야 하고 인수합병과 폐교 절차를 밟는 학교가 생길 것이다. 우리에게 배움이란, 특히 큰 배움이란 무엇일까? 큰 배움터에서 양성한다는 소위 지성인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대학교와 지성인 사이의 강력한 개념적 연관성은 한국사회의 통념 속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가령 ‘듣보잡대’(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스런 대학교)나 ‘지잡대’(지방에 있는 잡스런 대학교)라는 낱말과 관념은 큰 배움의 이념을 왜곡시키는 악성 코드들 중 하나이다. 이 코드는 거의 모든 학생들의 두뇌 속에, 거의 모든 학부모들의 두뇌 속에 바이러스처럼 번져나가고 있다. 의견을 생산하고 평가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오히려 이를 주도해서 전파하고 있다. 한 배움터가 단순히 서울에서 물리적으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그 배움터를 저질로 만들지 못한다. 한 배움터에 들어오는 학생들이 대체로 예전에 성적이 나빴다는 사실은 그 배움터를 저질로 만들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배움터에서 배운 사람들은 한국에서 ‘루저’ 취급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동생들이 학교를 바라보는 관점, 학교를 평가하는 방식이 모여서 결국에는 학교 행정가들의 정책을 좌우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통념과 관념들이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지는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통념과 관념을 바꾸게 된다면 그만큼 세상은 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념주의적 처방은 매우 온건하고 보수적이고 때때로 수구적이고 기만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통념을 바꾸는 것은 몹시도 급진적인 실천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관념, 하나의 통념을 바꾸는 것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 관념은 매우 많은 다른 관념들과 연계되어 있고, 이 관념들은 각각 또 다시 매우 많은 다른 관념과 연계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관념을 바꾸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생각의 대부분을 바꾸어야 할지 모른다. 사람들이 쉽게 생각을 바꾸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각이 바뀐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대부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생각 또는 표명되지 않았던 생각이 단순히 드러났을 뿐이다. 자신이 또렷하게 파악하는 생각은 잘 바뀌지 않는다. 변덕을 부리는 것은 우리의 정서와 느낌일 뿐이다. 어쩌면 ‘생각을 바꾸라’라는 조언은 ‘목숨을 바쳐라’만큼 극단적인 조언일 수 있다. 진정한 배움은 기존 생각을 점검하고 다듬고 바꾸는 과정이다. 한국의 학생들은, 지식인들은 지금 이러한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을까?


우리의 행복을 착취하는 지배구조 속으로 우리를 예속하는 악성 코드는 모피어스가 “매트릭스는 도처에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도처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가 네오에게 말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너무나도 시스템에 잘 길들여져서 시스템을 보호하려고 한다. 매트릭스 안에서는 누구나 요원일 수 있다.” 높은 연봉이 보장된 직장을 추구하는 우리의 열망과 욕구는 결국 잘 나가는 기업과 직종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길들이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지배 매트릭스를 해체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런 열망과 욕구를 아주 조금만이라도 줄여나가야 한다. 하지만 조금만 줄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줄이게 되면, 네가 능력이 없으니까 그렇게 했다고, 이류 인생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고, 친구들이 비웃기 시작할 것이다. 사소한 욕망 하나라도 그것을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 정말이지 그런 실천은 지성과 절제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현재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많은 힘과 에너지가 동원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자본이 투입되어 있고 토지가 투입되어 있으며 법률과 제도가 투입되어 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서로 복잡한 이익과 보상과 처벌의 이해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것들의 투입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과 열망과 욕구이다. 균형발전이고 뭐고, 지속가능한 성장이고 뭐고 관계없이, 세금 적게 내는 대신 자기 연봉이 더 많아지고,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기만을 희망한다면, 비리로 범벅이 된 모리배가 의원이 되고 시장이 되고 총리가 되고 대통령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리배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만들고, 그 제도 아래에서 이익이 증대되는 시장의 보스들과 의견 통제자들은 이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서로 강력하게 결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는 동안 자신이 가진 관념과 생각과 욕구와 열망을 되짚어보고 검토할 시간을 얼마나 가질까? 학교는 우리에게 그렇게 할 시간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들이 그런 것을 반성할 지성적 힘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성찰해야 할 때, 이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이런 방식의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낸 원래 동인인 바로 그 욕망들을 더욱 가열해야 했으며, 그런 욕망을 실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선생을 찾아 다녔고, 선생들에게 그런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우리들은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우리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을 만드는 데 전체 인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만큼의 기여를 했다.

우리가 숭상하는 인간상들은 우리 사회가 숭상하고 있는 인간상을 부분적으로 형성한다. 거짓 장부를 만들고 경영권을 법을 어겨가면서 세습하는 기업인을 우리가 최고 경영자로서 존경하게 되면, 우리 사회도 그를 그만큼 존경하게 될 것이다. 군사반란으로 집권하고 반민주 폭압정치로 장기 집권했던 대통령을 역대 최고 대통령으로 존경하면, 그런 이는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분량보다 더 많은 존경을 우리 사회에서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불량의견을 양산하는 족벌 언론들의 의견들에 흡족해 한다면, 그만큼 그들의 불량의견들이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이 유통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나쁜 사람을 나쁘다고 말하고 나쁜 의견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을, 정치적 중립이라는 미명으로 입막음하고 있다. 이 편재하는 지배 매트릭스에 우리 스스로 자발적으로 부역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신성한 노동과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의 숭고한 뜻과 깔끔하고 또렷하고 새로운 생각들도 세상을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우리가 선호하는 것, 우리가 우러러 보는 사람, 우리의 시간과 열정을 바치는 곳을 변화시키면, 우리 사회 시스템도 그에 따라 약간은 변모하게 된다. 우리가 부패보다 무능력이 더 나쁘다고 믿게 되면 우리 사회도 권력을 맘대로 부리면서 부패한 자들이 판을 치는 방식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힘이 없거나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우리 힘을 발휘했고 능동적으로 자기 욕망을 실현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나중에 나쁜 결과를 낳게 될 줄 모른 채, 너나 나나할 것 없이 돈 잘 벌거나 지배자가 되는 데 유리한 명문학교를 추구했고, 그런 직종을 선택했고, 점수와 자격증에 매달렸으며, 거대 자본에 복무하는 ‘부품’이 되는 걸 동의했고, 이런 식으로 육체를 돌보는 데 바빠 철학적 성찰과 탐구에 게을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것은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그에 따라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주도하는 것이다. 삶에서 성공이 무엇일까? 그것은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내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게 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승리한 삶이다.


나는 “그래도 학교는 나와야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래도 배움은 계속해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삶은 계속 되어야 한다. 더 아름답고 더 착하고 더 참된 것을 찾는 삶이 우리가 좇아야 할 삶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게 되는 게 진짜로 성공한 삶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한 때가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내내 그렇게 믿을 용기가 있을까? 혹시 그것이 성공한 삶이 아니라면 어쩌나 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지금 살고 있지 않는가? 학교를 박차고 나오든지 계속 다니든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살아야 할 삶, 알아야 할 앎, 사랑해야 할 사람을 지금 바꾸는 것이다.

사실 김예슬 선언은 이것을 이미 담고 있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정말이지 ‘대학’은 단순히 현행 제도나 건물을 뜻하지 않는다. 큰 배움, 보편적인 배움, 통합적인 배움을 뜻해야 한다. 대학교 다니는 것을 이제는 그만 두겠다는 말은 그런 참된 큰 배움에 자기를 내던지겠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했던 그런 독립투사처럼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 이것은 나의 아주 오랜 배움벗들이 줄곧 감행했던 일이다.

2011/03/04 00:18 2011/03/04 00:18
  1. 성재
    2011/03/28 23:05
    지금 나부터. 용기있게.

    군대에서 예슬친구 글 읽은 기억이 떠오르네요. 애석하게도(?) 불온서적에 선정되지 않아서 몰래 숨길 까닭 없이 단숨에 읽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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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있는 마음

2010/02/25 15:54

이제 곧 소크라테스는 독미나리 즙을 먹고 죽어야 한다. 배움 동무들이 스승의 죽음을 가엽게 여기고 슬피 운다. 그는 오히려 살아있는 내내 죽음을 마련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그의 온 삶은 깨닫는 것을 좋아하는 삶이었다. 철학자라는 말뜻은 앎, 슬기,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는 늘 철학자로 산 셈이다. “깨달음을 올바르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죽어감과 죽음을 스스로 닦달해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아.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죽음을 닦달한다는 말이 참말이라면, 살아있는 내내 죽음을 뜨겁게 바라면서 오랫동안 스스로 닦달하던 것이 막상 자기에게 닥쳐왔을 때 성을 낸다는 것은 진짜로 엉뚱한 짓이야.”

깨달음을 좋아하는 것과 죽음을 기다리고 좇는 것은 무슨 맺음이 있을까?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왜 죽어가는 것과 죽음을 스스로 닦달해야 하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몸의 즐거움을 좇는 것과 깨달음을 좋아하는 것은 함께 갈 수 없다고 믿었다. “자네는 먹을 것이나 마실 것과 같은 것으로 느끼는 즐거움에 안달하는 것이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을 것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의 몸과 얽힘으로써 얻는 즐거움에 안달하는 것은? 그 밖에 몸의 다른 보살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자네는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이 돋보이는 옷과 신발을 가지거나 그 밖에 반지 귀걸이 노리개 따위를 가지고 있다는 데 퍽 우쭐해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것들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런 것을 높이 살까 아니면 업신여길까?”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넋을 보살피기 위해, 몸이 즐거워하는 것을 좇는 일에 휘둘리지 않도록 넋을 몸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게 할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이란 넋이 몸에서 빠져나가 사람에게 넋이 없어지는 것이다. 죽음이란 넋이 몸에서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쩌면 죽어가는 것을 늘 닦달해야 한다. 그래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몸의 즐거움도 없고 이런 것에 전혀 골똘하지 않는 삶은 살 만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몸의 즐거움에 아무 마음도 쓰지 않는 이들을 거의 죽음에 가까이 와 있다고 여길 거야.”

그러면 왜 깨달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넋을 보살피고 되도록 넋을 몸에서 떼어 놓으려 해야 할까? 왜 소크라테스는 깨닫는 데 몸이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몸으로 느끼는 것은 언제나 흐릿하고 어렴풋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으로는 참된 앎에 도무지 이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짜 깨달음은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넋이, 우리의 마음이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또렷하게 알고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눈과 귀와 살갗으로 얻은 몸의 느낌은 틀릴 수 있으니, 느낌은 되도록 멀리해야 한다. 그리고는 있는 것들은 오직 마음으로만 헤아려 생각해야 한다. 마음으로만 헤아려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느낌을 따르지 않고, 말뜻과 말길에 따라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말뜻은 있는 것이 있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 본모습인데 흔히 “이데아”라 부르는 것이다. 말길은 말과 생각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길인데 흔히 “로고스”라 부르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 있는 그대로의 착함, 있는 그대로의 참됨을 아는 것이다. 몸은 이런 것들을 알 수 없다. 어렴풋하게 아니면 비뚤어지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살갗은 있는 그대로의 그것들을 볼 수 없다. 몸을 쓰지 않고 오로지 생각만으로 그것들에 다가갈 때만, 때 묻지 않은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착함과 참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참말로 깨닫고 싶은 사람은 넋을 몸에서 멀리 떼 놓으려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깨달음을 좇는 것과 죽어가는 것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몸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의 넋, 우리의 마음은 그토록 흠 많은 몸과 범벅이 된 채 죽는 날까지 함께 해야 한다. 몸은 먹을거리가 없으면 안 되니까 이 때문에 우리는 먹을거리를 찾아서 바삐 살아야 한다. 또 몸이 아프면 몸을 돌보느라 우리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을 겨를이 없다. “몸은 꼴림, 안달, 두려움, 허깨비, 어리석음으로 우리 속을 가득 채워 놓아 도무지 아무런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 버려. 몸으로 말미암은 것 때문에 우리는 깨달음을 좋아할 겨를이 언제나 없어. 이보다 더 고약한 것은 어쩌다 우리가 몸을 보살피지 않아도 되어 짬을 얻어 뭔가를 따져 보려고 하면, 몸이 이곳저곳에 끼어들어 우리를 들뜨게 하고 엉클어 놓고 얼빠지게 만들지. 그래서 몸 때문에 우리는 참된 것을 알 수 없게 되고 말아.”

진짜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넋은 몸에서 떨어져 나와야 하는데, 우리가 아무리 힘을 써도 억지로는 넋을 몸에서 떨어지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 있는 내내 넋을 감싸고 있는 몸이 넋을 늘 성가시게 만들 것이다. 그러면 깨달음을 참말로 애타게 바라는 사람은 진짜로 죽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깨달음을 뜨겁게 바라고 또한 좋아하는 사람인데 바로 이 깨달음은 우리가 죽게 되었을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 것이 되지 살아 있는 동안엔 아닌 것 같아.” 그렇다고 스스로 죽을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죽는 것은 자기를 아끼는 이에게 할 짓이 못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나라에서 나서서 죽게 만들어 준다니 그는 이를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여겼다. 이제 진짜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배움 동무들은 마음이 개운치 않다. 넋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남게 되면 넋은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죽으면 몸과 함께 넋도 마치 숨과 김과 바람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넋이 제 홀로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들은 왠지 스승의 죽음이 억울하고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독미나리 즙을 마시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진다. 소크라테스는 벗들의 마음을 달래고 보듬어 안아야 한다. 몸이 죽은 뒤에도 넋은 한결같이 살아 있다는 것을 벗들이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그는 넋이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 있다고 믿는 까닭을 배움 동무들에게 풀어 놓는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태어나기에 앞서서 우리 넋이 살아 있었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뭔가를 배울 수도 알 수도 없다. 그것이 참된지 거짓된지, 그것들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아무 것도 따질 수 없는 사람은 배울 수도 알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먹을 수도 없는 이는 아예 배울 수조차 없다. 그런데 사람은 참된 뭔가를 배우고 가끔 알 수도 있다. 이것은 사람이 처음부터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말귀와 말뜻과 말길을 알고 태어난다. 이것들은 배움과 앎의 씨앗이다. 배움과 앎이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보았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뭔가를 보려면,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살아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는 태어나기 전에도 살아 있었던 것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태어나기 전에 살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몸을 뺀 나머지, 바로 우리의 넋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살아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의 넋이 말뜻과 말길을 품고 몸속으로 들어오게 된 셈이다. 말뜻과 말길은 참된 말과 거짓된 말은 가려내는 힘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배우기 전에 이런 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면 배움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이 말은 들은 배움 동무들은 아직도 걱정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스승의 말은 넋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있었다는 말이지 죽은 다음에도 줄곧 살아있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입던 옷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지만, 이것으로부터 그 옷이 언제까지라도 닳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는 믿음을 이끌어낼 수는 없다. 더구나 넋이 몸과 따로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몹시 어렵다. 이를 걱정하며 한 배움 동무가 말한다. “우리 몸은 뜨거움과 차가움, 메마름과 젖음 따위의 것들로 팽팽하게 서로 얽혀 있는데, 우리의 넋이란 바로 이런 것들의 섞임과 어울림이라고 생각해요. 넋이라는 것이 이 따위의 어울림이라면, 우리 몸이 아프거나 다른 나쁜 것들 때문에 축 늘어지거나 너무 당겨지면 우리의 넋도 바로 깨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넋이란 몸에 있는 여러 것들의 어울림이어서 사람이 죽으면 맨 먼저 사라지는 게 넋이라고 사람들이 말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뭐라고 대꾸해야 할까요?” 그는 넋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것이라는 스승의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스승은 “배움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꺼내는 것이고 넋이 이미 보았던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라는 믿음과 “넋은 몸의 이런 저런 것들의 섞임과 어울림이다”라는 믿음 가운데서 무엇이 더 참에 가까울 것 같은지 묻는다. 올바른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처음 믿음이 되도록 참에 가까워야 한다고 말한다. 참에 더 가까운 믿음으로부터 믿기 어려운 믿음으로 조금씩 나아가야 하지, 믿기 어려운 믿음에서 참된 믿음을 이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다음 소크라테스는 넋을 한낱 몸속의 어울림으로 볼 수 없는 까닭을 말한다. 몸에 있는 것들의 어울림이 깨어질 때 이것을 고치려 하는 것은 넋이다. 넋은 우리 몸이 아프거나 슬프거나 들떠 있을 때 이를 다시 낫게 하고 감싸고 가라앉힌다. 넋이 몸의 어울림이라면, 어울림이 깨어졌을 때 넋은 이를 다시 고치고 바로 잡는 일을 할 수 없다. 넋은 몸에서 일어난 것들을 다스리며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한낱 그것들의 어울림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벗들에게 우리를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잘 몰라서 잘못 내린 벌을 피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판단해서 죽는 것을 피하지 않았다. 이것을 피하지 않게 한 것은 자신의 힘줄과 뼈들이 아니다. 죽으려고 여기에 갇혀 있고 도망가지 않는 것은 몸이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시킨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옳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넋이자 그의 마음이다. 그의 넋이 말길을 따라 옳은 것을 좇을 때 그 옳은 생각에 이를 수 있고 바로 이 생각이 그의 몸을 거슬러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소크라테스답게 살게 한 것이다. 나무를 나무답게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무이다. 플라톤은 이를 나무의 이데아라 불렀다.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이다. 넋이란 바로 삶의 이데아이다. 이런 저런 꼴로 살아 움직이는 소크라테스를 소크라테스답게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소크라테스이다. 그것은 바로 소크라테스의 넋이다.

넋이란 살아 있는 것을 살아 있게 만드는 무엇이다. 넋은 몸을 이루는 것들을 이렇게 저렇게 모으고 고르고 어울리게 해서 마침내 몸에게 삶을 부어준다. 몸은 오직 넋과 단단히 붙어 있을 때만 살아 있다. 그래서 넋이 몸과 떨어질 때 진짜로 죽는 것은 오직 몸뿐이다. 넋은 삶을 만들어내는 무엇이기 때문에 이것은 죽음과 어울릴 수가 없다. 이런 뜻에서 넋은 언제나 살아 있다. 소크라테스는 말뜻과 말길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그가 독으로 몸이 굳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다른 무엇보다 돌보고 보살피고 아끼고 다듬어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넋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넋을 더럽히지 않기를 바랐다. 이렇게 하여 소크라테스의 벗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알게 된 사람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슬기롭고 가장 올바른 사람이 이 땅을 떠나가는 모습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고 참으면서 지켜보았다. 아름답고 착하고 참된 그의 넋과 얼은 오늘날 우리의 마음속에 한결같이 살아 숨쉬고 있다.

2010/02/25 15:54 2010/02/25 15:54
  1. 김민석
    2010/02/25 17:17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넋이란 것은 초월적 정신보다 영혼에 가까워 보입니다. 감각과 넋의 차이를 말하면서 인식의 해석적 자원이 사회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넋이 죽어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그저 믿음의 문제인데, 넋이 몸에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군요. 소크라테스의 설명에서 모호하게 하는 것이 넋의 개별성과 보편성의 문제인데요. 그것이 자기넋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역시 그러한 믿음이 허무해져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 생생
      2010/02/26 11:13
      제가 "넋"이라고 한 것은 물질 없이 존재할 수 있는, 말하자면, 실체로서 "영혼"의 한말 대응어입니다. 소크라테스 전후의 영혼 개념은 생명력 비슷한 어떤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은 이것을 철학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저의 글은 고대철학 연구자로서 쓴 것이 아니라 심리철학 연구자로서 쓴 글입니다. 스크라테스-플라톤의 심리철학을 요약 또는 해설한 짧은 글입니다. 이것은 제가 그의 이론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넋이 불멸하는지 좀 더 면밀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인식 능력이 사회적으로 주어진다"는 가정을 받아들일 때, 플라톤의 이론이 여전히 유효할까, 질문하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은 좀 더 분석이 필요한 말입니다. 사회는 이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플라톤은 사람들 속에 불멸하는 영혼이 들어 있다고 말하겠죠.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은, 이미 존재하는 영혼들에 의해 주어진다, 또는 만들어진다고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혼이 생기기 위해서 다른 영혼들을 필요로 합니다.

      역시 지적했다시피 개별 영혼이 불멸하는가, 아니면 영혼 일반이 불멸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나아가는군요. 영혼이 복수인지 단수인지 하는 문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하나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영혼이 단수이고, 다른 개별 영혼은 단지 그 하나의 영혼의 부분이라고 해석할 경우, 플라톤은 여전히 그 하나의 영혼이 불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식 능력이 사회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말이죠.

      플라톤은 심리철학을 개척한 인물로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이론을 보다 다듬습니다. 그리고 근대철학으로 와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에 가면 이론적 복잡성이 심화됩니다.

      이 논의들이 현대에서 한편에서는 현상학에서, 다른 한편에서 분석철학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탐구됩니다. 현대적 논의와 플라톤의 논의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면, 플라톤이 단순하게 보이고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2500년 전 이야기 방식과 오늘날 이야기 방식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2500년 전에 플라톤이 가졌던 배경 이론을 우리가 모두 아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훨씬 호의적으로 해석해야,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이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레게 같은 플라톤주의자들이 현대 언어철학과 심리철학에 기여한 바는 매우 강력합니다. 영혼 불멸에 관한 그의 논의는 바로 이데아에 대한 그의 확신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플라톤 심리철학의 가치는 마음과 물질 사이 근본적인 존재론적 간격 최소한 개념적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간격이 있기에 사람이 세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고, 그리고 인식론과 윤리학과 미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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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각은, 그것이 긍정적 생각이든 회의적 생각이든, 내부에 관한 생각이든 외부에 관한 생각이든, 객관적 진리 개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개념은 오직 타자와 의사소통 중에 있는 피조물들만 접근할 수 있다. 앎의 획득은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에 기초해 있지 않다. 앎의 획득은 전체론적으로 생기며, 그것은 처음부터 상호인간적이다. 데이빗슨의 <외부주의 인식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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