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인간은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우리가 정말로 소통하는 순간은 존재하는가?



생각실험실 풍경에 대한 기록, 2011/10/2 예감이 끝나고



나는 내가 말을 하면 타인이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내 의견이 합당하면 타인에게 먹힐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꽤나 많은 경우 주변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내가 타당하다고 여기는 생각을 피력했었다. 그런데 언젠가 정말 힘겹게 인생을 사는 친구가 내 숱한 설득과 조언에 수긍했음에도, 그 힘든 고통을 재생산하는 행동과 생각을 결코 바꾸지 않는 것을 목격한 후로는 타인을 변화시켜보려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당시 내 주장들을 논증해보았을 때, 친구에게 했던 내 말들은 꽤나 타당했던 걸로 생각한다. 그 순간에는 그녀도 진심으로 내 말에 동의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내 의견은 당연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의 상호작용 속에서, 논증을 통해 참인 명제에 수긍하는 바람직한 양상이 보이기를 바라며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적인 잔소리에 불과한게 아닌가 싶다. 현실에서는 옳음이라는 가치 이외의 여러가지 것들이 같이 섞인 채 공존한다.

예감이 끝나고 다 같이 집에 가는 길이었다. 생각실험실의 한 친구가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살아간다는 말에 ㅋㄹㄹ 선생님이 그런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정치적으로 변절하기 쉽다고 이야기하며 매우 진지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왜 그런지를 증명하려 했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서 갑자기 격렬하게 논증을 하기 시작하셔서 너무 지나치고 공격적이라고 여겨졌다. 버스 정류장이라 시끄럽고 친구들을 배웅해야하는 상황이라 알아듣기조차 힘들었지만, 상당히 설득력있게 증명하셔서 그 주장만 놓고 보았을 때는 분명 올바른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주장이 참이건 거짓이건 선생님의 행동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겨졌는데 첫째로는, 전혀 정치적 변절에 대한 주제가 나올 상황이 아닌데 그런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은, 도가니라는 영화를 보고 동요하지 않는 친구의 행동은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삶의 방식 때문이고, 그게 부럽고 본받아야 할 것 같이 보인다는 대충 그런 소소한 이야기 중이었다. 정치적 변절 이라는 주제는 상식적으로 당시의 이야기와는 전혀 무관하며 나올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둘째로는, 그 주장이 상대를 상처줄 수 있고 화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참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어떤 순간에서는 상대가 상처를 입더라도 바른말을 해야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은 그럴 필요가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셋째로는, 참 거짓을 떠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그런 방식으로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무익하며 역효과만 가져올 대화법이라 생각했다. 만약 이 대화의 목적이 자기 주장만을 피력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설득하는 데 있다고 가정할 경우에 말이다.

나는 이러다가 생각실험실 친구들이 선생님을 미워하여 다 떠나버릴까 걱정이 되어 선생님께 그러시지 말라고 말렸다. 평소의 친분으로 미루어보아 선생님이 오직 상대를 상처입히고 괴롭히려는 목적만으로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님께 그냥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똘레랑스 정신으로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면 안되냐고 호소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선생님이 생각실험실 친구들은 공동체를 생각하길 바란다고 이야기를 꺼내시며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대체 당시의 상황이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문득 당시 선생님의 모습에서 사회문제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격렬하게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권 친구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그제서야 난 선생님이 왜 그렇게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만한 행동을 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은, 본인이 속한 그 집단 정체성에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 사회문제는 곧 본인이 분노할 문제고 아파할 문제고 해결해야할 문제가 된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선생님이 매우 상처받았고 아파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생님이 언뜻 언뜻 말했던 그 선생님의 불합리한 경험의 역사로 인해,그리고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기에 잘 알 수 있었다.

선생님께는 부정의한 세상에 대한 상처와 분노가 많이 있으시고 그 문제를 매우 중요하고 고통스럽게 생각하신다. 평소의 대화 주제, 행동, 그리고 SNS에 올리는 말들만 보아도 선생님이 얼마나 올바른 공동체를 갈망하고 부패한 기득권에 분노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선생님의 그러한 인식은 매우 타당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한지 여러가지 이유로 알지 못하고, 알 수 없을 것이다. 선생님이 보고있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면모들은 생각실험실 친구들이 체감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심각할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인식 하고있는 선생님께 그 주제를 꺼내는 건 매우 중요했고 타당했고 필요했다. 선생님의 사회인식, 그리고 그 인식에서 비롯된 상처와 분노를 공유한다면 우리는 선생님을 통해 내가 몰랐던 세상의 아픈 부분을 전달받게 된 것일 게다. 하지만 선생님과 같은 정도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지 않은 어린 친구들에게 선생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었고 필요이상으로 화를 내시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친구의 나이와 경험을 고려했을 때 정치적 변절과 같은 문제 자체를 생각하는 게 오히려 괴상하고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만약 생각해본다해도 결코 정치적 변절을 좋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소통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상대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고 우리는 결코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다. 나 자신도 내 행동의 이유를 다 모르는데 하물며 상대방 행동의 이유는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런 차이로 인해 우리는 종종 상대에게 화를 내고 결별한다. ㅎㅅ씨가 생각실험실에 화를 내면서 떠났던 그 사건도 참으로 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다. ㅎㅅ씨와 선생님의 세상은 매우 달랐고 그래서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 소통하지 못하고 각자의 주장만 하다가 상처받는 게 슬펐다. 대화는 종종 무의미미한 자기주장의 반복을 통래 더한 곡해와 오해를 만들어내고는 한다. 난 생각실험실 사람들이 바쁘거나 다른 일을 하려고 떠나는 건 괜찮지만, 서로 화가 나서 싸우고 떠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화를 내는 행위는 참으로 몰이해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 화를 내고 말지만 사실 그 잘못이 저질러지기까지 수많은 원인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잘못이 벌어지기 까지의 모든 원인의 연쇄고리를 봄으로써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면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가 사회변혁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지식인의 안일한 주장일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하였는데, 살면 살수록 라이프니츠의 말이 맞는 부분이 많다는 걸 느끼고 있다. 그의 말대로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그 것은 신만이(완전한 지각을 가진 으뜸 한알만이) 알 수 있는 것인가. 이 거대한 세상의 부분들만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각 개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을 보고 경험하고 있으며 기질적으로도 참 다양한 인간들이 살아간다. 그럼에도 잠시나마 우리들이 온전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순간은 올까? 나와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타인에게 영향을 주려는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 졸업을 하면 다시 한번 모나드를 시간을 들여 곱씹어 봐야겠다. 불완전하게 세상을 인식하는 나는 오직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내 인식 범위를 벗어나 나를 의아하게 하는 사람은 내가 더 이해해야할 대상이지 결코 화를 내고 배척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2011/10/04 04:24 2011/10/04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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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상상화에게 생각을 생각하라 2011/10/04 12:35 De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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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각은, 그것이 긍정적 생각이든 회의적 생각이든, 내부에 관한 생각이든 외부에 관한 생각이든, 객관적 진리 개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개념은 오직 타자와 의사소통 중에 있는 피조물들만 접근할 수 있다. 앎의 획득은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에 기초해 있지 않다. 앎의 획득은 전체론적으로 생기며, 그것은 처음부터 상호인간적이다. 데이빗슨의 <외부주의 인식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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