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우와 본래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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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주말 예능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인기를 끌고 있다. 쟁쟁한 가수들의 경쟁이기에 노래의 퀄리티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일까? 실력 있는 가수들의 무대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 프로그램은 무척 반가운 프로그램일 것이다. <나는 가수다>는 평일 늦은 밤 시간대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이나 <김정은의 초콜릿> 등에 방영될 만한 무대들이 주말 황금 저녁 시간대에 방영된다는 점에서 큰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오디션 등 경쟁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에서 인정받는 가수들이 새로운 편곡을 거쳐 경쟁 형식으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이기에 더욱 매력적이라 할 수 있다.

 

지난 3월부터 4월까지 두 달간 방영되었던 <나는 가수다> 5월부터 새로운 PD를 영입하고 새로이 방송되고 있다. 새로운 가수들도 3명이나 섭외되었다. 임재범, BMK, 김연우가 그들이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 주(2011.05.15) 방송 중 김연우의 인터뷰에서 착안된 글이다.

 

김연우는 맑고 깨끗한 목소리와 창법으로 사랑 받는 가수이다. 그는 첫 경연에서 6위를 차지하였다. 별다른 기교 없이 부르는 노래에 청중평가단이나 시청자들은 크게 반응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순위에 위기감을 느끼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절제를 좀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표현을 많이 안 해요. 그게 저한테는 좀 나름대로 단점이 될 수도 있는데.” (“”안에 들어간 모든 말은 15일 방송 중 김연우의 인터뷰 내용이다.) 김연우는 자신의 노래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이 프로그램에서는 단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평소 자신의 창법을 좋아하는 매니아 층이 있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15~6년 동안 진짜 매니아 층 한 200분 만들어놨거든요.”라는 그의 인터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는 프로그램을 위해 자신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그거 16년 동안 만든 건데 방송 1~2회로 이 500(청중평가단을 가리킨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바뀌기로 생각을 했어요.” 이는 같은 날의 다른 인터뷰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확실해요. 제가 불러왔던 대로 부르면 안될 거 같아요. 하하하. 저는 모든 걸 다 버리고 기존 틀을 확 바꿀 거예요. 저한테는 진짜 도전이에요 도전.”, “다음주를 좀 기대를 해주세요. 아 김연우도 저렇게 노래할 수 있구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노래를 부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스텝들의 이미지 투표에서 김연우는 7위를 차지했다. 김연우의 노래라면 뻔하지 뭐, 새로운 기대 같은 거 없어. 이런 이유에서였을까? 그러나 중간 평가 무대 이후 그는 단숨에 가수들 간의 평가에서 1위로 도약한다. 김연우는 모든 힘을 짜내면서 노래했고, 전혀 넣지 않았던 기교도 듬뿍 선보였다. 자신의 원래 창법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고, 그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상황이 원하는 바에 따라 자신을 바꾼다. 여태 지켜온 방법을 고수하기보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바꿈으로써 해결책을 찾은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존재이자 현존재로 본다. 이는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친숙한 것으로서의 세계 곁에 거주하고 있으며,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존재이자 현존재인 인간은 본래적 삶이나 비본래적 삶(세인의 삶)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세인이란 현존재의 퇴락으로, 남들이 사는 대로 사는 사람이다. 타인과의 차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평균성을 추구하는 삶을 살며 이는 자신을 잃은 삶이다. 불안은 현존재를 본래적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계기이다. 불안은 공포와는 다른 것으로,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 불안의 대상은 무, 죽음이다. 죽음은 세인이 현존재를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는 죽음에의 선구를 통해 본래적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삶에 던져져 죽음을 향해 사는 존재이지만 죽음으로 인한 깨우침으로 앞으로의 가능성에 자신을 던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가수다>를 보면서, 김연우의 변화를 보면서 마음이 왠지 짠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 본래적인 삶의 모습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아닌 모습, 즉 청중이 원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른 가수들과 비슷해지는 전략을 세웠다고 볼 수도 있다. 화려하고, 기교 많고, 퍼포먼스를 보일 수 있는 무대를 구상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김연우도 저렇게 노래할 수 있구나라는 말이 듣고 싶다고 하는 인터뷰가 슬펐다. 당신은 당신의 모습대로 노래해도 너무 멋져요. 꼭 바뀔 필요는 없어요.

 

그가 비본래적인 삶을 택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대중에 따라 변하는 부지런한 가수를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그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더 오래 남아서 좋은 노래를 많이 들려주면 시청자에게는 기쁜 일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뛰어난 가수들의 다양한 무대를 보고 싶은 입장에서는 이런 획일화되는 창법과 무대가 염려되기는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평균성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일까? 그 안에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절대적인 미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일까? 나는 너와 달라, 우린 달라, 그런 말을 참 많이 하면서도 평균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우습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은 모르지만,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 나의 선호를 무시할 때도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기 위해. 사랑 받기 위해 그들의 선호에 나를 맞춘다. 힘들 때도 있고 생각보다 쉬울 때도 있고 때로는 나를 더 넓히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나를 넓히는 작업. 비본래적으로 사는 삶이 나쁜 삶은 아니라는 하이데거의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 비본래적으로 사는 삶 속에서 새로운 나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때도 종종 생기니 말이다.

 

힘내요 당신. 나는 그대로의 당신도 좋아요.

2011/05/17 00:14 2011/05/17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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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글과 철학

2011/05/10 00:20

삶과 글과 철학

 

 

한 방울의 이슬만 떨어져도 힘겨워하는 장미 꽃봉오리와 우리는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진실로 우리가 인생을 사랑하는 것은, 인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1, 독서와 저술에 대하여.

 

(책세상에서 출판된 책의 번역은 내용이 아예 다르다. 그 번역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 방울 이슬이 떨어졌다 하여 파르르 떨고 있는 저 장미 꽃봉오리와 어떤 점에서 같은가? 그렇다. 삶에 친숙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1,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한 방울의 이슬에도 힘겨워하는 장미 꽃 봉오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수업 시간에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을 때, 이 글귀는 큰 환영을 받았다. 우린 너무 작은 일에도 쉽게 힘들어합니다. 그럴 필요는 없지요. 조금 더 강해져야 합니다. 이 정도의 말들로 그 때 시간을 돌이킬 수 있다. 내 기억에는 이러하다. 그 사람들이 어떤 의미를 전하려 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그 땐 이 구절에 대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내가 감동한 문장은 그 다음 문장이어서 사실 위의 글에 별 관심이 없었다. 내가 좋아했던 것은 이 것.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이유는 삶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한창 도피를 꿈꾸던 나는 익숙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진짜 별 거 없는 내 삶이 참 싫었지만, 이 글이 위로가 되었다. , 원래 삶은 별 거 없는 거구나. 그냥 내 삶이니까, 내 삶에 익숙하니까 삶을 사랑하는 거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책에는 완전히 다르게 번역이 되어있다. 그런데 그 번역도 마음에 든다. 너무 지겹고 힘들지만 그래도 무엇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으니까 삶을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게 참 묘하다. 사랑 받는 것도 물론 좋지만 사랑하는 것도 내게 힘이 된다. 어떤 종류의 에너지가 되어서 삶을 이끌게 해준다.)


금요일에 늦은 점심으로 김밥을 먹다가 갑자기 이슬에 힘겨워하는 꽃봉오리가 생각났다. 어쩌면 그 날 비가 와서였을지도 모른다. 가늘게 비가 떨어지고 나는 우산이 없어서 서둘러 걸어 다녔다. 꽃봉오리는 이슬 한 방울에도 몸을 바르르 떤다. 그러나 우산 없는 나는 비를 수십 방울 맞았어도 멀쩡했다. 나는 꽃봉오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꽃봉오리보다 더 강한 존재일까?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도 않다. 나는 살기 위해 꽃봉오리보다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꽃은 땅과 햇빛과 비가 있으면 살 수 있다. (아닌가? 아니라면 알려주세요.) 나는 땅과 햇빛과 비만으로 살 수 없다. 나는 훨씬 더 까다로운 환경을 필요로 한다. 나는 나를 다치게 하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할 가시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들에게 싫어요 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것이 두렵다.

어떤 일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한 방울 이슬이 장미 꽃봉오리에게는 휘청거릴 만큼 힘든 일일지라도 나에게는 그저 닦아내면 그만인 일인 것처럼 말이다. 모두에게는 장미 꽃봉오리의 이슬처럼 견디기 힘든 일들이 몇 가지 있기 마련이다. 나는 왜 이따위 일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리나 하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누 구 에 게 나   그 런   일 들 이   있 다 . 단지 그 사람의 그런 일과 나의 그런 일이 다를 뿐이다. 그 사람은 거뜬히 해내는 일을 내가 힘겨워한다고 해서 내가 뒤떨어지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장미처럼 이슬을 힘들어하지는 않지만 살기 위해, 삶에 만족하기 위해 장미보다 훨씬 많은 조건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내가 장미보다 못한 존재인가? 장미는 장미대로 피어날 것이고 나는 나대로 삶을 꾸릴 것이다. 그와 나도 마찬가지. 그는 그대로 나는 나대로 뻗어나갈 것이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안티 크라이스트>는 정말 안 봐도 그만이었을 영화였다. 좋아하는 영화 평론가가 극찬한 영화였고, <도그빌>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신작이라서 기대하고 갔지만 나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영화였다. 이미 알고 있었던 악평들처럼 영화가 외설적이거나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는 영화였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감독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영화라고 했다. 라스 폰 트리에가 심한 정신 쇠약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면서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찍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고치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이라는 니체의 말을 떠올려보면 그는 정말 훌륭하게 병을 치료한 것이다.

 

내겐 철학이 어느 정도 그런 기능을 한다. 내가 나의 철학을 하면서 나를 고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먼저 해놓은 작업들은 내게 반짝거리며 다가온다. 격렬한 사유 끝에 나온 반짝임이 나를 이끌어준다. 상상화는 철학의 실용성이 사회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을 만드는 것에 있다고 했지만(내가 제대로 읽었다면) 나에게 철학은 스스로를 치유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다. 철학을 하면 구원받는 느낌이 들어요. 언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종교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사실 나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인형 뽑기가 떠오른다. 그 기계 안에 들어있는 수십 개의 인형 중에 하나의 인형이 인형 뽑기 집게에 잡혀서 달랑달랑 들어올려지고 있는 모습. 그 인형이 구원받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철학은 내가 인형임과 동시에 인형을 뽑고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준다.

 

이 글 또한 그런 글이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이 그런 글이다. 그런 글에서 벗어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 되고 만다. 나의 글을 쓰고 싶다. 나를 발가벗기는 것 같아서 망설여지기도 하고 스스로가 불에 뛰어드는 나방 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 쓰는 글은 나를 위한 글이다. 그게 옳다. 그래서 그럼에도 무엇이든 쓴다.

2011/05/10 00:20 2011/05/10 00:20
  1. Plutonian
    2011/05/10 05:05
    궁금해서 원문을 찾아봤는데, 인용하신 니체의 말 중 두번째 문장이요,
    (혹시나 다른 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옮겨보면 이래요.
    Es ist wahr: wir lieben das Leben, nicht, weil wir an’s Leben, sondern weil wir an’s Lieben gewöhnt sind.

    더듬더듬 읽어봤더니 전 아랫 번역이 더 맞는 것 같기는 합니다.
    (근데 또 윗 번역대로 읽어도 뜻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드네요.)
    어쨌든 nicht A sondern B (not A but B) 구문인 것 같은데,
    nicht 다음에 쉼표가 들어가 있어서 찝찝해요.
    제대로 된 해석이 아니니, 그저 원문만 참고해주세요.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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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이게 최선입니까?


 

스포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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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소설 <제인 에어>를 좋아했던 나는 영화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에 들떴다. 그런데 4 20일에 개봉한 영화가 일주일 조금 넘게 지나자 상영관이 얼마 없는 게 아닌가! 아니 왜 이러지? 블록 버스터 영화가 아니라서 그런가? 꼭 보고 싶은데! 그렇게 얼마 없는 상영관과 상영시간을 어렵게 찾아간 내게, 영화 <제인 에어>는 똥을 주었다.

 


 

내가 사랑했던 당찬 제인은 어디로 갔는가? <제인 에어>에 사랑에 빠진 제인만 나왔나? 사랑에 빠진 제인의 모습이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가? 버사와 풀 부인에 대한 수수께끼는 제대로 암시되지 않은 채 당황스럽게 등장하나? 어린 그녀 곁에 있었던 헬렌은 왜 이름을 얻지 못했으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템플 선생님은 언급조차 되지 못했나? 뜬금없이 깨어나세요라고 말하는 결말은 무엇인가? 감독은 최근에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가 <인셉션>이었나? 우리에게 킥을 날리고 싶었던 거라면 엔딩 크레딧과 함께 Non, je ne regrette rien을 틀어주지 그랬어?

 

 

감독은 소설 <제인 에어>에서 로맨스만을 부각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바람에 많은 부분이 빠지거나 가볍게 다루어졌다. 용기 있게 삶을 사는 제인이 좋았던 나는 이 영화에서 얻을 것이 없었다. 심지어 인물들도 BBC 드라마의 인물들보다 훨씬 덜 매력적이었다. 너무 많은 내용이 축소되면서 이야기는 생명력을 잃은 듯 보인다. 주인공인 제인조차 어떤 과거와 성격을 가진 사람인지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 제대로 사랑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에 서툴지만,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 나가기 위한 의지와 자세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관객은 제인에게 제대로 감정 이입을 할 수가 없다. 로체스터와 제인이 뜬금없이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사랑을 확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식 당일에 로체스터에게 이미 부인이 있음을 알게 되는 과정이 너무 순식간에 지나간다. 힌트가 전혀 없었기에 관객 입장에서는 당황스럽다. 둘은 왜 사랑에 빠졌지?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소설 <제인 에어>가 단순히 제인이 돈 많은 남자와 사랑에 빠져 신분 상승을 하게 되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영화 <제인 에어>는 그런 식으로 제인을 폄하하고 있다. 어째서 자신의 삶을 열심히 꾸리려 애쓴 여성이 부자 남성을 만나 영원히 행복했다는 식의 뻔한 이야기로 소설을 각색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꽤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언급되지 않거나 가볍게 넘어간 인물들이 너무 많다. 페미니즘적 성격이 있는 소설이란 것이 감독에게 거북했기 때문일까? 제인과 로체스터의 로맨스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많은 부분을 생략했지만, 이 생략으로 인해 로맨스 자체도 무게를 잃었다. 인물이 선명하지 않은데, 그 인물이 그리는 이야기가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스며들 수는 없다.

 

 

먼저 리드 부인과 그 가족의 비중이 줄었다. 이들은 어린 제인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내용 속의 인물로, 특히 빨간 방에 관한 이야기가 빠진 것이 굉장히 아쉽다. 빨간 방에 제인의 암울한 어린 시절을 대표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인이 빨간 방에 갇혔을 때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이상한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 모습이 평소 제인과 상반된 모습, 즉 로체스터의 또다른 부인인 버사를 의미하는 거라는 해석도 있다. 버사와 제인이 같은 인물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란 해석이다. 여성을 억압하던 시대에 의해 미쳐버린 여성을 버사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빨간 방에서 제인이 기절한 사건 뒤 리드 부인은 제인을 로우드 기숙사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로우드 학교의 교장 브로클허스트 씨의 이중적인 면도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다. 학생들에게 검약과 순결을 강조하면서 제대로 된 시설을 전혀 갖추어주지 않지만, 그의 가족들은 온통 비단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다닌다. 학생들은 난방이 되지 않는 건물에서 생활하고, 버터 바른 빵조차 먹을 수 없으며 꽁꽁 언 물을 깨고 세수를 하는데도 말이다. 로우드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최초의 친구, 헬렌 또한 아주 간추려진 채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병들어 죽는 소녀가 헬렌이다. 병들어 죽었다는 것조차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헬렌은 불같이 화를 내는 어린 제인과 달리 바보 같을 만큼 참는 성격의 인물이다. 부당한 선생의 체벌도 모두 견디어 낸다. 헬렌과 제인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영향을 주고 받는 등 교감한다. 그러나 평소 건강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헬렌은 학교 내에서 전염병이 돌던 때 폐병에 걸려 죽고 만다. 최초의 친구가 그토록 일찍 죽은 것에 대해 제인이 가졌을 감정이 어땠을까. 또 한 명의 교감 상대는 템플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학생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었던 단 한 명의 선생님이었다. 헬렌과 제인을 북돋아 주고, 학교에 남아 있을 힘을 준 사람이다. 실제 소설에서 템플 선생이 결혼을 하여 학교에서 떠나게 되자 제인 역시 로우드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된다. 이 결심으로 제인은 신문에 광고를 내어 손필드의 가정교사가 되는 것이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가 줄어들면서 다른 여자와 다른 제인의 분위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도, 표현될 수도 없었다. 영화 속 제인은 어쩐지 모르게 우울한 여자쯤으로 표현되었다. 어린 시절 리드 부인에서 대들던 모습은 묘사되었지만 그 후 어떻게, 누구의 영향으로 변했는지 알 수 없으며 변화에도 당당한 모습은 남아있다는 것도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 재능도, 욕심도 많은 여자가 주변 환경에 의해 얼마나 억압받아왔는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는지도 보여질 수 없었다.

 

 

손필드로 온 이후에도 생략된 인물과 이야기들이 많다. 가장 아쉬운 점을 꼽자면 버사와 풀 부인이 뜬금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제인이 손필드에 도착한 이후 그녀는 줄곧 이상한 느낌에 시달린다. 영화에 묘사된 로체스터의 방에 불이 난 사건 말고도 소설에서는 잠을 자다가 깬 제인 앞에 버사가 와있었던 일이나 결혼을 약속한 뒤 사둔 드레스를 한밤 중에 버사가 찾아와 갈기갈기 찢은 장면 등이 더 있다. 이처럼 버사는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는데도 영화에서는 손필드에 숨겨진 인물이 있다는 복선을 거의 보여주지 않다가 후반부에 갑자기 터뜨린다. 관객으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풀 부인 또한 그렇다. 풀 부인은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대사 속에만 등장한다. 풀 부인은 미쳐버린 버사를 지키는 사람으로, 버사의 존재를 모르는 제인은 풀 부인이 자신의 방에 내려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버사에 대한 힌트가 없어지면서 로체스터가 죄책감을 느끼는 대사와 장면들도 없어져버렸다. 로체스터에게 심상치 않은 과거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 납득하기 어려워졌다. 여태 그런 것 같은 낌새가 전혀 없었는데? 뭐라고? 이미 결혼을 했다고? 하며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전개처럼 느껴지고 이질감이 든다.

 

 

덧붙이자면 제인이 로체스터의 연인으로 착각했던 블랑슈 잉그램에 대한 묘사가 조금 더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블랑슈 잉그램이 얼마나 오만하고 도도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는지에 대해 말이다. 로체스터가 점보는 노파로 변장하고 저택에 찾아와 점을 보는 장면이 빠진 것도 아쉽다. 로체스터가 인물들의 실체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으며, 블랑슈 잉그램이 아니라 제인을 좋아한다는 결정적 힌트였는데 말이다.

 

 

결혼식 다음 날, 손필드에서 도망쳐 나온 제인을 보살펴준 사람들은 세인트 존, 다이애나, 메리였다. 영화에서 그들의 사정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을 뿐 더러, 알고 보니 제인과 그들의 외가 쪽 친척이라는 사실이 생략되었다. 영화에서는 제인이 뜬금없이 유산을 그들 모두와 나누겠다고 말하지만 원래 제인은 이제 자신에게도 가족이 생겼다는 것에 엄청난 기쁨을 느끼며 그들과 모두 친척 관계이기 때문에 유산을 그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말 또한 실망스러웠다. 어째서 이렇게 뜬금없는 결말을 만든 것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이 영화가 <인셉션>스럽다고 생각했다. 분명 더 희망찬 결말이 원작에 있음에도 영화는 모든 것을 덮으며 그럼 꿈에서 깨어나세요라고 말하며 끝난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속담도 있는데 이 결말은 좀 너무한 것 같다. 이 간단한 대사 속에 우리들이 다시 만난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에요, 우리 이제 함께 해요, 등의 여러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특히 영화를 일종의 꿈으로 보자면 더욱 그렇다. 관객들에게 이제 영화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같아서 허무하다. 영화의 끝이 영화의 끝을 알리는 대사로 끝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야기의 행복한 결말이 궁금한데 말이다.

 

 

그래도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로체스터에게 프로포즈를 받는 제인의 모습이다. 정원의 큰 나무 아래서 로체스터가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 즉 블랑슈 잉그램과 결혼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제인은 로체스터에게 제가 미천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영혼도 감정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라고 울부짖는다. 뒤이어 그와 제인이 동등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자유로운 사람임을 말하는 부분은 안타깝게도 영화에서 삭제되었다. 그러나 미천하고 가난하고 못생겼지만 자신도 영혼과 감정이 있는 사람임을 울면서 소리치는 제인의 모습은 나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책으로, 드라마로, 그리고 이번에 영화로, 몇 번을 보면서도 이 장면은 정말 좋다.

 

 

영화 <제인 에어>는 로맨스만을 부각하면서 원작에 담겨있는 여성의 당당함, 주체적인 삶을 모두 배제해버린 영화이다. 그 과정 속에서 인물의 생생함과 독특함이 사라져 이야기의 개연성마저도 훼손되었다. 원작을 많이 좋아하는 터라 다른 때보다 영화를 엄격하게 본 느낌도 있지만, 원작을 전혀 살리지 못한 리메이크라는 점에서 너무나 아쉽다.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이 영화를 본다면 어떻게 보았을지 궁금하다. 나름대로 괜찮은 로맨스 영화였을 수도 있었을까?


2011/05/03 23:51 2011/05/03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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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2011/04/27 23:39

사랑이란?

 

영화 <레옹>, <헤드윅>, <클로저>, <올가미>의 내용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옹>의 클리너 레옹은 소녀 마틸다를 사랑한다. 마틸다를 만나기 전 레옹이 사랑한 가장 친한 친구는 화분이었다. “그 화분을 무척 사랑하는군요?” 마틸다의 물음에 레옹은 제일 친한 친구라고 답한다. “항상 행복해하고 질문도 안 해. 나 같지, 봐봐. 뿌리도 없거든.” 마틸타는 정말 12세 소녀라고 믿을 수 없게, 이렇게 대답한다. “정말 사랑한다면 공원에 심어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돼요.” 레옹이 자신 대신 부패한 경찰에 복수를 하고 죽자 마틸다는 레옹의 화분을 공원에 심는다. “여기가 좋겠어요, 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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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분과 마틸다와 레옹, 출처는 다음 영화 포토.


 

<헤드윅>의 대표급 ost The Origin of Love에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인용한 이야기가 나온다.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이 원래 두 사람이 등을 맞대고 한 몸으로 붙어있는 상태였다고 말한다. 이 인간의 힘이 너무 강력해지자 제우스가 번개로 등을 갈랐고, 한 몸이었던 두 사람이 서로를 그리워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를 꼭 들려주고 싶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글로 쓰기보다 영화의 한 장면을 직접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클로저>의 앨리스는 연인 댄에게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사랑을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몇 마디 말은 들리지만 그렇게 쉬운 말들은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사랑이냐고 울면서 묻는 그녀에게 댄은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다. 앨리스 또한 어떤 답을 바라고 묻는다기보다 답이 없음을 알고 자포자기한 상태이다. 첫 눈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사랑에 빠졌던 우리지만, 이제 우린 사랑이란 게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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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와 댄, 출처는 다음 영화 포토.



 

<올가미>의 시어머니 진숙은 아들 동우를 사랑한다. 아들로서, 그보다 더, 남자로서. 아들을 며느리 수진과 결혼시킨 이유는 수진을 아들이 원하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숙은 아들의 결혼 이후 수진을 온갖 방법으로 못살게 군다. 네가 감히 우리 아들을! 아니, 내 남자를! 요리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풋내기 주제에!



사랑은 너무 많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우리는 그 모습들의 어떤 점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걸까? 사랑이란? 드라마 <연애시대>의 대사를 옮기자면, 어디서부터가 사랑일까? 혹은 무엇이 사랑일까? 윤상의 사랑이란을 수십 번 들어도 알      .



덧붙임.
윤상과 이하나의 '사랑이란'

2011/04/27 23:39 2011/04/27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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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푼젤>, 사랑스러운 리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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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푼젤>은 흔히 알려져 있는 동화 라푼젤과 조금 다른 내용이다. 등장 인물에도 조금 차이가 있고, 인물들의 성격도 재구성되었다. 동화 라푼젤은 다음의 이야기이다. 어느 부부가 기다리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임신한 아내는 마녀가 산다고 알려진 옆 집 마당의 라푼젤(그렇다, 라푼젤은 원래 채소 이름이었다.)이 자꾸만 먹고 싶다고 말한다. 마녀는 진짜 마녀였을까? 남편은 망설이다가 아내의 부탁에 못 이겨 옆 집의 라푼젤을 몰래 뜯으러 간다. 몇 번쯤 라푼젤을 서리하러 갔을 때, 남편은 그만 마녀에게 들키고 만다. 마녀는 라푼젤을 뜯어간 대가로 태어날 아기를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남편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마녀에게 그러겠다는 약속을 한다. 아기와 채소의 거래라니! 어느덧 아기가 태어나고, 마녀는 라푼젤의 집에 들어와 아기를 데려간다. 이후 라푼젤은 마녀의 집에 갇혀 그녀를 엄마로 알고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하러 나왔던 왕자가 마녀의 집 담을 우연히 넘게 되고 라푼젤을 본 뒤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어쩜 그들은 첫 눈에 그렇게도 잘 반할까! 마녀는 사랑에 빠진 라푼젤을 보고 분노한다. 자신만 사랑하고 자신만 알아야 하는 소녀가 왕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녀는 숲 속의 높은 탑에 라푼젤을 가둬놓고 라푼젤의 긴 머리로 탑과 땅을 오간다. 라푼젤은 그 탑에 갇혀 영영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의 위대한 힘이란! 왕자는 라푼젤을 찾아 탑에 올라오기에 이른다. 결국 그들은 탑에서 탈출하고 마녀는 벌을 받는다. 라푼젤은 그 동안 옆집 아줌마 아저씨로 알았던 부부가 자신의 친부모임을 알게 된다.

 


영화 <라푼젤>은 원작 동화와 몇 가지 다른 점들이 있어 신선하다. 영화 <라푼젤>은 위의 내용과 달리 라푼젤이 한 왕국의 공주이며, 그녀의 머리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그 힘은 라푼젤을 임신했을 당시 엄마가 먹었던 꽃 때문인데, 그 꽃은 마녀가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는데 사용하던 꽃이기도 하다. 마녀는 자신이 숨겨두고 사용하던 꽃이 사라진 것에 분노하여 아기 라푼젤을 납치한다. 라푼젤의 머리의 신비한 힘을 계속 쓰기 위해서는 그녀의 머리가 잘려선 안되기에 라푼젤은 머리를 한 번도 자르지 않는다. 탑에서 마녀와 라푼젤은 단 둘이 산다. 탑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소녀 라푼젤에게 마녀가 부르는 노래가 아주 인상적이다. “Mother knows best.”! 엄마가 제일 잘 아니 엄마를 믿고 따르란 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 있는 말이지 않은가? 엄마라는 말을 다른 단어로 대체해도 좋다. 다수, 혹은 신, 혹은 나(스스로). 삶에서 다수가 나의 선택을 대신해주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 결단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나인가? 하이데거는 주체적으로 사는 삶을 본래적인 삶, 그렇지 못한 채 대중에 이끌려 선택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 삶을 비본래적인 삶이라 말했다. 비본래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세인Das Man이라 한다. 엄마의 선택에 의한 삶 또한 비본래적인 삶일 것이다. “나만 믿고 따라와!” 라고 말하는 엄마에게서 벗어나는 내용으로 <라푼젤>을 해석할 때, 영화는 소녀의 성장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라푼젤의 머리카락에 힘이 있다는 사실도 새롭다. 신비한 머리카락은 라푼젤이라는 인물에 특징을 만들어주면서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낸다. 먼저 마녀가 아기 라푼젤을 납치한 이유가 원작보다 좀 더 있을 법한 일로 바뀌었다. 원작의 이야기처럼 마당의 채소 좀 훔쳐먹었다는 이유로 아기를 달라는 마녀나,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그러겠다고 말해버리는 아빠는 쉽게 동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머리카락의 힘은 라푼젤에 능력을 부여한 것이다. 원작에서 라푼젤은 탑 아래로 머리를 내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지만 영화 속 라푼젤은 상처를 낫게 하거나 젊음을 되찾아주는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는 라푼젤이 활발한 성격의 소녀가 된 점과 더불어 그녀에게 주체성을 부여한다.

 

영화 속 라푼젤은 원작보다 훨씬 용기 있고 친화력 강한 인물로 재탄생 했다. 탑에 있을 때부터 밖을 꿈꾸었고, 탑 내부에 그림을 그리는 등 활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한 라푼젤이 탑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동기가 왕자와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호기심 때문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라푼젤이 좀 더 주체적인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밖에 모르는 철부지 여자에서 원하는 바를 향해 노력하는 여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탑 밖에 나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힘든 일을 헤쳐나가는 모습도 그렇다. 싸워야 할 때는 열심히 싸우고,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과는 금방 친해진다. 그녀는 험난한 세상으로 나온 것을 후회하고 울기도 하지만 용기를 되찾고 새로운 발걸음을 뗀다. 언제나 새로운 생성을 긍정하는 니체가 떠오르는 지점이다. 니체는 새로운 생성이 지나간 과거의 사건들에 다시 의미를 부여하게끔 해주는 역할까지 한다고 보았다. 지난 날의 아픔이 지금의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라푼젤은 새로운 시도를 즐겨하는 점에서 니체의 생성이 생각나게 한다.

 

또한 마녀가 색다른 악역을 맡고 있다. 라푼젤은 진심으로 위하는 면이 없지 않은, 진짜 엄마인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마냥 마녀로만 보기엔 조금 힘들다. 마녀가 라푼젤의 외출을 막는 것은 엄마가 자식의 독립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동화에서 라푼젤은 평민이고 그녀의 연인은 왕자였으나 영화에서 라푼젤은 잃어버린 공주이고 그녀의 연인은 소매치기이다. 둘의 지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어차피 왕자와 공주가 등장하기에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여성과 남성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은 그보다 큰 의미이다. 남자 잘 만나서 팔자 폈다는 식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왕자와 공주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점은 분명히 이 영화의 단점이다. 쉬운 신분 상승의 이야기를 버리지 못한 것이다. 한참 재미있게 보다가도 엔딩 장면과 나레이션에서 아 역시 디즈니 영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볍게 기존의 엔딩 대사를 비꼬며 장난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디즈니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카락이 잘린 라푼젤의 진실한 눈물이 죽은 플린 라이더를 살렸다는 것 또한 개연성을 헤치는 장면으로,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를 위한 디즈니 식 이야기 전개 방식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수많은 등불이 떠오르는 장면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 때 그 음악이 아름다움을 배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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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장면!

2011/04/20 00:49 2011/04/20 00:49
  1. redshad
    2011/04/20 12:46
    나도 이거 완전 감동하면서 봤는데!

    난 공주가 탑에서 내려와 잔디를 딛으며 노래할때 완전 감명받았어.
    공주 뿐만아니라 사실 우리도 탑에 갇혀살잖아.
    어떤 식의 탑이든.. 사상, 사회, 학교.
    나는 공주가 탑에서 나올때 ,나는 내가 갇힌 탑에서 나갈 수 있는 순간을 살짝 꿈꿨어.ㅋㅋ
    공주의 자유에서 나의 자유를 대신 느꼈달까.ㅋㅋㅋ

    근데 확실히 디즈니 만화이긴 했어.ㅋㅋ
    나레이션, 인물(생김새), 노래까지. 딱 디즈니 던데.ㅋㅋ
    하지만 디즈니 특유의 그것이 어떤 면에서 좋기도 해. 동화같이 아름답고 음악과 어울어진..그런 것..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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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내 인생을 뒤흔든, 잊혀지지 않는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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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은호의 대사 중 인생이 요동친다는 표현이 있다. 나는 그 표현이 그 상황에 꼭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그런 순간들이 한 번, 혹은 몇 번 있기 마련이다. 인생이 요동치면서 방향이 확 꺾이는 순간 말이다. 삶에 아주 큰 영향을 미친 그 순간, 사건들은 대부분 기억에 똬리를 틀고 앉아 비킬 줄을 모르기도 한다. 한 번의 영향으로 그치지 않고 남아서 더 세력을 떨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은호에게, 우리에게 그런 순간이 있는 것처럼 영화 <더 리더>의 두 주인공에게도 그런 사건들이 있다. 전차에서 표를 검사하는 삼십대 여인 한나는 우연히 십대 소년 마이클을 도와주게 된다. 자신을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를 전하러 온 마이클은 한나에게 호기심과 사랑을 느끼고 둘은 이내 연인이 된다. 한나는 언제나 사랑을 나누기 전 마이클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마이클은 아주 열심히, 열정적으로 그녀에게 책을 읽어준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홀연히 떠나버리고 마이클은 홀로 남는다. 시간이 흘러 법을 공부하게 된 마이클은 나치 전범 재판에 참관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피고인인 한나를 만난다. 한나는 피고인 무리 중 가장 심한 벌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된다. 마이클은 그녀가 늘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사실을 깨닫고 교도소의 그녀에게 일일이 책을 읽으며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준다. 어느덧 출소를 눈 앞에 둔 한나는 마이클과의 면회 이후 자살해버리고 만다. 마이클 앞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남긴 채.

 

니체는 망각이 부정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기존의 견해에 반대하여 망각은 긍정적이고 능동적이라는 견해를 펼친다. 망각은 기존에 있던 기억을 단순히 잊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활동과 기억을 가지는 작업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망각을 원초적 기억 능력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프로이트의 원초적 기억능력과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프로이트의 원초적 기억은 엄마-아빠-나 사이의 오이디푸스적 기억을 일컫는다. 남아와 여아 모두 엄마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다가 남아는 아빠의 거세위협으로 인해 엄마에 대한 사랑을 거두어들이고 아빠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여아 또한 아빠로 사랑의 대상을 옮기려 하나 이 관계는 근친상간적 사랑이 되고 만다. 따라서 여아는 다시 엄마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대상으로 삼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적 기억이며, 이 기억은 모든 인간의 원초적 기억이 되어 두고두고 삶에 영향을 끼친다.

 

반면 니체의 망각이 원초적 기억능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망각을 위한 새로운 활동으로서의 기억이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원초적 기억이 절대 잊혀지지 않고 남아서 지속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기억이라면, 니체의 원초적 기억은 망각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기억이다. 이 망각 능력은 상처를 가슴 깊이 내면화하지 않고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삶이 요동칠 만한 사건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과 기억을 시작하는 것이다.

 

교도소에서 출소를 코 앞에 둔 흰 머리 할머니 한나에게 대머리 아저씨 마이클은 여전히 꼬마다. 이를 볼 때 한나는 과거에 머물고 싶어하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녀는 출소 후에 당연히 마이클과 함께 살 것이라고, 그가 늘 책을 읽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행복했던 옛날처럼 말이다. 그러나 마이클에게 한나는 사랑의 대상임과 동시에 증오의 대상이기도 했다. 나치에 가담해서 유대인 학살을 도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자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첫 사랑이었던 한나와의 사랑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 이후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없게 했다. 어찌하다 보니 결혼을 해서 딸도 낳긴 했지만 그에게 한나 외에 다른 여자는 있을 수 없었다. 강렬한 첫 사랑은 그에게 흉을 남겼다.

 

한나의 마음에 남은 강렬한 기억은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마이클에게 늘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던 한나는 문맹이었다. 그녀는 감옥에 가기 전까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러나 그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어떤 불이익이라도 감행했다. 재판 중 범죄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친필을 확인하는 절차가 오자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 글을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밝히는 대신 그 죄를 뒤집어쓰는 편을 택한다. 어째서 문맹이라는 것이 그녀에게 그렇게 무거운 짐이었을까? 나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렇게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사실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사소하게 보는 내게 이해가 될 리 없었다. 트라우마라는 것이 그런 것임을 알지 못했다. 남에게는 그렇게 작은 일이 내겐 삶을 놓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나가 어째서 문맹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영화에서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한나는 문맹이 되었고, 그 사실은 평생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된 것이다.

 

한나는 문맹이라는 상처를 마이클을 통해 치유했다. 자신이 문맹이었음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마이클이 보내준 녹음 테이프를 들으며 교도소에서 스스로 글을 깨우친다. 새로운 활동으로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곧 예전보다 밝아진다. 교도소의 관리인들이 하는 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그 동안 한나는 교류 없이 외로이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도서관을 드나드는 등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는 말에서 말이다. 그러나 한나에게 남겨진 마이클의 기억은 치유되지 못했다. 마이클과 새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있었으나 마이클은 이를 거부했다. 거부당한 한나는 상실감과 두려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마이클은 왜 한나와 함께 사는 것을 거부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아마 그는 한나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했던 것 같다. 그 복잡한 감정 속에서 그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몇 십 년 만에 앞에 두고 보게 된 여인 앞에서 어떤 감정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그는 사랑이라는 사적인 감정 대신 단죄라는 사회적 감정을 앞세웠다. 마이클은 한나에게 교도소에서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는다. 당신이 했던 끔찍한 일들에 대해 반성을 했느냐는 질문이다. 그러나 한나는 글을 배웠다고 답한다. 그것만이 한나가 했던 새로운 활동이었다. 이에 마이클은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어리석은 여자를 보는 듯한 표정이 스친다.

 

한나의 자살 이후, 아마 마이클에게는 무거운 짐이 하나 더 늘었을 것이다. 아마 사랑했던,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잘못으로 자살했다는 짐일 것이다. 조금 더 따뜻하게 그녀를 대할 걸, 원한다면 함께 살 수 있다고 말할 걸그는 한나가 남긴 유산을 문맹퇴치를 위한 단체에 기부하는 것으로 자신의 짐을 던다.

 

마지막 장면에서 마이클은 딸에게 한나의 무덤을 보여주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로써 그의 깊은 상처는 어느 정도 회복기에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일을 스스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니체의 말처럼 새로운 활동으로 기존의 기억을 잊는, 긍정적 망각의 활동을 마이클은 시작한 것이다.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을까? 그 기억이 언제까지나 그 때 그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기억은 쉽게 변한다. 처음 새겨질 때부터 어느 지점이 왜곡된 채 기록되기도 한다. 기억에 이끌리지 않고 삶을 살아나갈 수 있길 바란다. 스스로 주인이 된 기억이 없어지길 바란다. 내가, 나의 기억의, 주인으로, 살아나가길.



*2011-1학기 진은영 교수님의 <니체와 현대철학> 강의 자료와 내용을 바탕으로 니체와 프로이트에 관해 썼습니다. (<더 리더> 또한 수업 시간에 함께 본 것입니다.) 니체와 프로이트에 관해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잘못 이해한 저의 탓입니다. 자료를 다시 확인하지 않고, 제가 이해하고 기억하는 대로 썼어요. 본문에도 썼다시피 기억이란 녀석은 왜곡되기도 하기에 니체와 프로이트에 대한 논의가 어느 정도 제대로 되어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에 대한 해석은 수업과 별개로 저의 것입니다. 기억/망각과 영화가 이렇게 연결될 줄 몰랐는데, 글을 쓰다보니 새롭군요 허허허. <더 리더>를 지루한 영화라고 생각했던 2009년의 제가 떠올랐습니다.

2011/04/14 01:12 2011/04/14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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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스피치>, 나를 믿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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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더듬이 왕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네다섯 살 이후로 언제나 말을 더듬어 왔고, 여태 어떤 의사도 치료하지 못한 왕이 여기 있다. 조지 6, 그는 연설을 두려워하는 말더듬이 왕이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유명한 치료사들을 알아본다. 그러던 중,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을 만나게 된다.

 

라이오넬은 조지 6세가 왕의 아들이라 할 지라도 자신의 방에 와서 진료받기를 권한다. 필요하다면 조지 6세의 사생활까지도 물을 것이라 말한다. 여태 겪어왔던 다른 의사들에 비해 괴짜에, 고집불통인 것처럼 보이는 라이오넬. 그의 치료 방법이 과연 말더듬이 조지 6세에 효과가 있을까?

 

 

다른 의사는 조지 6세를 전하라고 불렀다. 그러나 라이오넬은 첫만남에서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치료를 시작하자고 말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 동등하게 대하는 방법이며 치료에도 효과적일 것이라 주장하며 말이다. 조지 6세는 라이오넬이 자신을 버티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하지만 이내 그 애칭에 익숙해진다.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묻지 말라고 강경하게 대했던 태도도 갈수록 허물어져, 라이오넬에게 먼저 찾아와 가족에 대해 털어놓기까지 한다.

 

그런데 사실 라이오넬이 버티에게 하는 치료법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그 방법 중 많은 것은 말 더듬는 습관을 고친다기에 부적절한 방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서로 마주보고 아 하는 소리를 번갈아 가며 내거나, 바닥을 구르며 소리를 내고, 바르게 누운 버티의 배 위에 엘리자베스가 앉은 채 버티에게 말을 하도록 한다. 이런 엉터리 치료법 속에서도 버티는 조금씩 발전한다. 말을 더듬을 때마다 몸을 앞뒤로 조금 흔들거나 욕하는 것처럼 말을 뱉어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라이오넬이 제시하는 치료법들은 일시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약간의 방법들과 무언가 치료를 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한 눈속임들 뿐이다. 핵심은 버티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 너무 과하지 않게,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슬그머니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버티는 라이오넬의 도움을 받으며 제법 훌륭하게 연설을 끝마친다.

 

 

결국 버티에게 필요했던 건 의학적인 치료가 아니라 친구와 믿음이었던 것이다. 버티는 자신을 어떤 직위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으로, 애칭으로 불러줄 사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왕실의 딱딱함 속에서 자란 그는 제대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 그의 형이 제멋대로였기에 더욱 심했다. ‘형이 저렇게 엇나가고 있으니 나는 더 확고히 자리를 지켜야 해. 우린 왕실의 사람이야.’ 같은 생각이 버티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문에 버티는 노래를 하지도, 욕을 하지도, 자유롭게 흘러가는 대로 무엇을 맡겨본 적도 없었다. “이런 데서 약해지면 안되오.”라는 버티의 말이 그 스스로를 가두어 둔 딱딱한 틀을 보여준다.

 

버티는 왕실의 권위와 왕이 될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압박 받아왔다. 아버지는 권위적이었고, 버티의 왼손잡이나 안짱다리를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여 모두 교정시켰다. 유모는 그를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았으며, 가장 친했던 동생이 죽었을 때는 동생이 병에 걸려 죽었다는 이유로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성장기 버티의 주변에는 버티의 편이 되어준 사람이 없었다. 곁에서 그를 지켜봐주고 다독여준 사람이 없었다. 버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라이오넬을 찾아와 말한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을 전해 들었소. ‘버티는 다른 형제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용기 있는 아이야.’라고.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는 내게 그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소.” 아버지가 어린 버티에게 이 말을 해줬더라면 어땠을까. 그래도 버티는 말을 더듬었을까? 형이 왕이 되어 왕위에 대한 부담을 덜었다는 고백 또한 의미심장하다. 그 동안 버티가 철없는 형 밑에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지 알 게 한다.

 

 

영화에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나는 버티가 엘리자베스를 만난 이후 말 더듬는 증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버티를 믿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모습을 발견해주고, 옆에서 격려해주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당사자에게 엄청난 힘이 된다. 온 모습이 다 바뀔 만큼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를 믿어주세요! 난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해낼 수 있다고 말해주세요. 그리고 곁에 있어주세요. 그게 버티가 원하는 전부였다. 그것만 있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다. 라이오넬의 말처럼 버티에겐 위대한 왕이 될 자질이 충분했다. 우리도 버티와 별로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도 나를 믿어줄 사람, 곁에서 듬직하게 지켜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은 모두 말더듬이니까. 비록 말을 더듬지 않는다 해도, 망설이고 갈등하고 자책하니까 말이다.

2011/04/03 01:52 2011/04/03 01:52
  1. 막시
    2011/04/06 11:34
    어떤 일이 있어도 위해주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친구, 우리 모두가 필요하고 원하고 소망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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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글은 무엇으로 쓰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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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미워한다. 독자를 잘 아는 자라면 독자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독자가 백 년을 산다면, 정신 그 자체가 썩은 냄새를 풍기리라. 모든 사람이 읽는 것을 배우게 된다면, 결국에는 쓰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 자체도 썩고 말리라. 한때 정신은 신이었다가, 다음에는 인간이 되었고, 이제는 마침내 천민이 되었다. 피와 잠언으로 쓰는 자는 읽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중. (민음사, 63~64.)

 

 

가끔 글을 쓸 때 드는 생각이 있다. 이 글은 내 머리가 쓰는 건가 내 손이 쓰는 건가. 분명 분량은 늘어나고 있는데 같은 말을 반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이 글이 진짜 내가 하려던 방향과 다르게 쓰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글을 읽을 때는 한층 더 심해진다. 한글을 읽고 있는데 이게 한글인지 영어인지 모를 만큼 아무 내용도 파악하지 못할 때, 한 줄을 다 읽은 뒤 다음 줄로 내려가 읽지 않고 다시 같은 줄을 읽게 될 때, 나의 뇌는 활동을 멈추었고 나의 눈만 바삐 움직일 뿐이다.

처음 위의 니체의 글을 읽었을 때 나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책을 읽는 사람이 게으름뱅이라서 미워한다고? 책을 읽는 데 왜 게을러? 독자를 잘 아는 사람이면 독자를 위해 아무것도 안 한다고? 독자는 읽는 사람인데, 글이 더 쓰여지지 않으면 독자는 무얼 읽나? 모든 사람이 읽는 걸 배우면 문맹률이 줄어드는데 왜 생각이 썩지? 정신이 천민이라고? 암송되길 바란다고? 나보고 배우는 것들을 다 외우라는 건가? 물음표 수십 개가 머리 속에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절대 맞춰질 수 없는 퍼즐 같은 글이었다. 다섯 번쯤 다시 읽자 퍼즐이 아니라 온전하고 선명한 그림이 마음에 생겼다. 느낌표 수천 개가 심장을 때렸다.

(생각 없이 하는)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이게 나의 느낌이었다. 피로 쓴 글은 쓴 뒤에도 마음에 남아 다른 생각들에 영향을 미친다. 정신으로 읽은 글은 읽은 뒤에도 마음에 남아 나를 변화시킨다. 나는 너무 쉽게 쓰고 쉽게 읽는다. 읽고 쓴 글 중 나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얼마나 되는가?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나오는 글은? 읽은 뒤 곱씹어 생각해보다가 결국 마음에 새겨진 글은? 모든 걸 쉽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웠다. 진짜 내 소유가 된 사유는 없다는 사실과 빠르게 지나쳐가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해왔던 일들이 떠올랐다. 게으르게 책을 읽는 행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건 책을 읽는 이미지만 생산할 뿐, 행위가 끝나면 이미지 외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아무 생각도 없이 쓰고 읽는 행위는 정신을 파괴시킨다. 정신은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 없어지면 썩고 만다. 쉽게 쓰고 읽은 책은 정신을 파괴시키는 주범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나의 피로 쓴 글과 남의 피를 읽어나갈 의지다. 책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힘을 가지고 있고 그 힘을 사용해야 한다. 쉽게 생각하려 하지 마라.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다 짜내어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글로 남겨라. 읽을 때도 마찬가지. 모든 문을 활짝 열어 정성껏 읽어라. 그렇게 쓰고 읽어야만 새겨진다.

 

 

이 글을 생생에 쓰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는 이 글을 쓸 만큼 니체의 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는지, 정말 정신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지, 한 마디로 이 글을 쓸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내가 피와 정신으로 이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오랜 습관에 따라 손가락으로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니체의 글을 읽고 심장이 헐떡이던 순간이 기억난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느낀 것을 다 털어놓고 싶었던 충동이 생생하다. 이때가 아니면 기회는 없어, 라고 외치던 내 안의 목소리가 아직 느껴진다. 그 기회는 놓쳤지만 되살려 말할 기회는 잡고 싶었다. 그 욕심에서 쓰고 올리게 된 글이라는 것을 밝힌다. 또다시 부끄러워진다.

2011/03/27 23:32 2011/03/27 23:32
  1. 노소영
    2011/03/27 23:50
    아주아주 솔직한 글이네요.

    저는 솔직하고 나름 피로 썼다고 하는 글이 혼자만의 것처럼 타인이 읽기엔 거북한 것이 되어버리는데...

    주연씨는 계속 느꼈지만 문장이 참 깔끔하고 명료해서 배우고 싶어요.

    내용 면에서도 제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글이었구요.

    저는 좀... 타인에게 암송되기는 커녕 읽히기도 힘들게 쓰고...

    나 자신에게 읽히고 암송되게 쓰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 같아요.

    그 연습이 먼저이고 그게 쌓여서 내가 쓴 글을 내가 암송하여(아마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으로 암송할 수 있다고 기대) 타인에게도 암송되게 하고 싶다.. 고 생각 하나 보네요.

    암송이라.. 암송되게 하는 것이 뭘지 오래오래 생각하게 하네요.^^
  2. Plutonian
    2011/03/28 01:31
    글 쓰기 전에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야한다고 생각하고,
    또 동시에 글은 쓰고, 쓰고, 또 써야한다고도 생각해요.

    아무튼 글에는 힘이 있고, 절대로 마구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연씨가 지금 하고 있듯이, 쓴 글에 대해서 늘 반성해야할 것 같아요.
    니체가 정말로 드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었던 것도 피로 썼기 때문일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주연씨 글이 간결하고 명료한 글이라 좋아요. : )
  3. 비밀방문자
    2011/03/28 02:16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박주연
      2011/03/28 20:19
      네 연락주세요! 여기로 바로 알려드려도 되는데 제가 비밀 댓글을 달 줄 몰라요.ㅋㅋㅋ 여태 이 별명이 언니인지 못알아보고 있었네요. 그때 그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니 잊으셔도 돼요.ㅋㅋㅋ 잘 지내시죠?
  4. 안녕
    2011/03/28 04:12
    쉽게 생각하려 하지 마라. 맞아. 내 글과 내 생각에 내가 속는 일이 다반사인데 그것 역시 너무 쓰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쉽게 여기고 있어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요. 피로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두근두근해요. 확실히 그냥 책을 침대에 누워서나.. 불편할 때마다 자세를 고쳐가며.. 읽다보면 어렴풋이 뭔가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하고, 그런 앎이 지속된다면 정말로 정신이 썩어버릴지도 모르죠. 그런 앎을 경계해야 하는 것 같아요.
  5. 막시
    2011/03/29 08:47
    잘 읽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글을 공유하는 것에 거리감을 느끼는게 이러한 이유에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쓴 이 글이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 진정있게 읽힐 자격 또는 의미 조차 있는지, 그렇다면 이 글이 얼마나 진정있게 읽힐 여지가 있는지 하는 생각들을 하다보면 어느새 다른 생각들에 몰두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나의 생각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다 보니 그런게 아닌가 해요. 그리고, 아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더 잘 이해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도 꼬리를 물고는 하죠. 그래서 저에게 글쓰기는 공유의 의미보다는 생각의 정리에 머물러 왔던 것 같아요.

    주연씨 좋은 글 잘 보고있어요 ^^ 정말 읽기 편하고 좋아요. 글의 모든 면모- 의미, 색체, 어투 등 -는 글쓴이의 생각/마음을 잘 반영하는 것 같아요. 글 많이 올려주세요 ^^
  6. redshad
    2011/03/29 13:15
    너를 다시 발견하는 순간이네.ㅋㅋ멋있다.

    나도 위에 올라와있는 니체의 글을 보니까 감동이 쫙ㅋㅋ
    어디다 써붙여놓고 봐야겠어.ㅋ
    우리 생각하자, 그리고 피로 쓰자.(아 왜 오글거리지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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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네트워크>, 우리는 여전히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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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상공간이 발달할수록 현실에서 외로워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지 않는다. 아이들은 놀 시간이 나면 컴퓨터 게임을 한다.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짬이 나면 인터넷을 하고, 개인 블로그나 마이크로 블로그를 운영한다. 한참 싸이월드가 유행할 때에는 심지어 오프라인 상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비싸고 좋은 음식을 먹으러 가서 꼭 예쁜 사진을 남기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었다. 현실과 가상이 바뀐 것이다. 가상에서 풍족해질수록 현실은 빈곤해졌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페이스북이라는 거대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만든 최연소 억만장자의 법정 싸움 이야기라기보다 한 사람의 외로움에 대한 영화이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거대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 즉 친목 사이트를 개발한 사람의 것이라는 점에서 극대화된다. 그가 만든 사이트에서 207개국에 걸쳐 5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만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외롭다. 함께 페이스북을 만든 하나뿐인 친구도, 복수심에 페이스북의 전초인 페이스매쉬를 만들게 했던 여자친구도 억만장자 마크 주커버그 옆에 남아있지 않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문화산업이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가 생기도록 하지만 대중을 만족시키지는 못한다고 비판한다. 가상공간 또한 문화산업처럼 우리의 욕구를 자극시키지만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가상공간은 우리를 24시간 내내 혼자가 아니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가상공간은 비물질적인 이미지로 구성된 인공물이기에 현실의 대상과 다르다. 따라서 현실에서 느끼는 부족함을 가상이 완전히 채워줄 수 없다. 우리는 가상공간이 우리의 현실적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다(사람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고 기대했고 오히려 더 확장된 가능성(전 세계인을 만나는 등의 가능성)을 예상했으나 현실에 남은 것은 외로움이다. 우리는 컴퓨터를 통해 온갖 감정을 느낄 수는 있어도 온기를 느낄 수는 없다. 굽고 튀기는 소리가 나는 음식 사진을 볼 수 있지만 진짜 그 음식을 맛볼 수는 없다. 가상공간은 욕구를 자극하기는 하나 그것을 충분하게 충족시킬 능력은 없는 것이다.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가상공간에서 외로움을 호소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난 뒤, 오프라인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쌀쌀한 외로움이 남아있다. 간혹 가상공간과 현실이 비교되어 더 큰 외로움이 따를 때도 있다. 가상공간에서 나는 일촌도, 팔로워도 많은 사람이지만 현실에서 나는 아무 약속도 없이 쓸쓸한 주말을 보내고 있는 것이 처절하게 비교되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우리는 현실에서 살아가고 싶은 모습의 나를 가상 공간에서 만들어내기도 한다. 감상적인 몽상가, 오타쿠, 냉철한 비판가 등의 모습으로 말이다. 더 흔히는 예쁜 옷을 입고 맛있는 레스토랑을 찾아 다니며 좋은 물건들을 사용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가상공간에서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을 선택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상공간의 나는 진짜 나의 모습 중 일부이긴 하지만 그게 나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진짜 내가 몇 개의 필터를 거르고 나면 가상공간의 내가 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스스로를 어느 정도 통제하고 거르면서 생활하긴 하지만 가상공간만큼 내가 나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정도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때 가상공간에서 새로운 나를 만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임을 알 수 있다. 정체성이 달라지는데도 가상공간과 현실의 내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되면서 자아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진다. 통합되지 않아서 상황에 따라 스스로 관리할 수 없게 된 자아는 스스로를 외롭게 한다. 서로 반대되는 자아를 가지기도 하기에 자아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면하지 않는다는 가상공간의 특징은 나를 솔직하게 만드는 동시에 새로운 나를 창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현실의 나를 소외시키는 다른 나를 만들기에 이른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너무 외롭다.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도 있겠지만, 가상공간은 인간을 외롭게 한다. 기술의 발달은 우리를 컴퓨터가 있는 빈 방으로 밀어 넣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아니, 이제는 각자의 손에 똑똑한 기계를 하나씩 쥐어주고 어딜 가든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가상 공간을 이용하여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자아를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른 면에서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나의 분열을 가져온다. 갈라진 나는 또다시 외롭다. 외로움에 허덕이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현대인들이 인생의 양념 정도의 외로움만 가졌으면 한다.


* 이 글은 2010-2학기 '철학과 과학의 만남' 강의에 학기말 소논문으로 제출했던 파일을 수정, 요약, 재배열한 것입니다.

2011/03/20 23:55 2011/03/20 23:55
  1. 노소영
    2011/03/21 23:19
    우와 되게 재밌게 읽히네요..

    그리고 마지막 '현대인들이 인생의 양념 정도의 외로움만 가졌으면 한다.' 다음에 또다른 한편의 글이 나올것만 같아요! 외로움에 관한 시론같은...?ㅋ

    각자 자신의 외로움을 돌아보게 하는 여운을 남기는 질문같은 글이에요. 잘봤으용ㅋ
  2. 1
    2011/03/24 19:54
    통합되지 않아서 상황에 따라 스스로 관리할 수 없게 된 자아는 스스로를 외롭게 한다. 서로 반대되는 자아를 가지기도 하기에 자아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통합되지 않는 자아와 외로움과 무슨 상관인가요?

    기계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온라인 커뮤니티는 더욱 발전할 것이에요.
    외로움에 허덕이지 않는 우리가 되기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할까요?
    • 박주연
      2011/03/25 19:39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외로울 수도 있지만, 혼자 스스로 외롭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아분열 같은 상황을 떠올려 보시면 될 거 같아요. 'A라는 나'와 'B라는 나'가 서로 반대되면서 충돌하면, 이긴 자아가 진 자아를 소외시키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진 자아 역시 나의 일부분인데 부정하게 되면서 스스로 외롭게 만드는 식으로요.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는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아마 통합적 자아가 중요해질 것 같습니다. 여러 자아를 가지게 되는 게 나쁜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니, 그들을 잘 묶어서 다룰 수 있다면 좋겠지요. 어느 한 쪽으로 심하게 기울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너무 뻔한 대답이네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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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완벽해지기 위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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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함을 위해 대가, 즉 그만큼의 손실이 따른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아무 결점이 없어야 완벽한 것이 아닌가! 스피노자는 이런 말까지 했다. 신은 어떤 결핍도 없는 완전한 존재이기에 최고부터 최저까지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이다. 완벽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우린 완벽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가? 모든 면에서 아무 결점도 없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같이 있지만 혼자인 상태처럼 완벽은 공허하거나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영화 <블랙스완>의 주인공 니나는 재능도 있고 아주 노력하는 발레리나이다. 그녀는 새로운 발레 공연에서 백조 여왕 역을 맡게 되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엄청난 노력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한다. 그녀는 노력으로 완벽해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단장 토마스는 니나에게 노력을 버리고 그녀에게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충동이나 본능을 요구한다. 백조로 완벽해지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연습을 한 것처럼 흑조로 완벽해지기 위해 백조인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그 동안 유지해왔던 철저하게 규칙적인 생활과 노력, 자신에게 엄청나게 기대를 걸고 있는 까다로운 엄마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 같은 걸 포기해야 한다. 백조와 흑조를 모두 소화해내야 하는 배역 때문에 그녀는 점차 변해간다. 밤늦게 놀러 나가기도 하고 늦잠을 자거나 엄마의 의견을 따르지 않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엄마와 니나의 관계는 조금 묘하다. 엄마는 니나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하고, 니나는 그에 전혀 반항하지 않고 순종한다. 니나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해야 했던 엄마의 피해의식이 딸을 무척 사랑하면서도 억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엄마에게 니나는 딸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대리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엄마는 니나의 모든 행동을 함께 한다. 아침에 밥을 차려주고 옷을 갈아 입히고 발레단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하고 자기 전 오르골을 돌려준다. 딸이 몸을 긁는지 감시하고 손톱을 모조리 짧게 잘라버리기도 한다. 엄마는 니나가 규칙적으로 생활하는지 감시하며 딸이 자신의 품에서 떠나 혼자 결정 내리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엄마가 사온 축하 케이크를 먹지 않겠다는 니나의 말에 엄마의 표정은 완전히 바뀐다.

이런 엄마는 니나의 완벽을 가로막는 존재다. 엄마는 니나를 끊임없이 이성과 규칙의 틀 안에 가둔다. 이성과 규칙으로 대표되는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 본능과 자유를 누리려는 니나는 엄마의 존재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니나를 혼자 살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남에게 기생하는 존재를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홀로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를 보일 때마다 엄마는 니나에게 주의와 벌을 내린다. 두 주장이 극에 달했을 때 둘은 소리지르고 힘을 써가며 싸운다. 그날 밤 싸움의 승자는 니나였지만 자고 일어난 아침, 엄마는 니나가 다시 착한 딸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그녀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이성과 규칙에 익숙해져 있는 니나는 차츰 변해가면서 정신적 이상을 겪는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헛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기도 하고, 흑조의 본능에 가까워지자 몸에서 닭살이 돋아나고 검은 깃털이 나오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니나를 결국 해내었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본인이 완벽한 흑조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리고 백조인 자신에게 안녕을 고한다. 니나는 백조로 죽어가면서 말한다. 느꼈어요. 완벽함을 느꼈어요. 나는 완벽했어요.”

완벽이 스피노자가 말한 신처럼 최고부터 최저까지 모든 능력을 다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니나는 완벽한 사람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에서 완벽은 한 면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으며 완벽이란 어느 시점과 순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니나는 완벽한 흑조로서의 순간을 누렸다. 그를 위해 그녀는 꽤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이제껏 해왔던 것들 것 송두리째 바꾸는 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흑조인 그녀에게는 이제 더 이상 돌아갈 엄마가 없다. 엄마는 백조의 죽음을 보며 감격의, 어쩌면 슬픔의 눈물 흘렸다. 또한 그녀는 환영에 시달리기도 했다. 끔찍한 날들이었다. 그 모든 것을 딛고 다시 태어난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한다. 좀더 자유로운 날들을 말이다.

2011/03/16 22:01 2011/03/1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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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도덕을 위한 부도덕은 정당한가?

 

** 영화 <도그빌>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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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도그빌>에서 주인공 그레이스는 갱단에 쫓겨 산 속 작은 마을 도그빌에 도착한다.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대접도 잠시뿐,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 현상 포스터가 마을에 붙게 되자 점점 사람들은 그녀를 모질게 대하기 시작한다. 갱단에 쫓겨 들어온 수상하고 낯선 여자, 우리는 그녀를 숨겨주고 있으니 그에 마땅한 대가를 받아야 해! 그녀에게 가혹한 노동과 성폭력이 시작된다. 그레이스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톰도 이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마을로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사람들을 더욱 잔인한 벌을 내린다. 벌을 내리다 못해 마을 사람들은 갱단에 그레이스에 대한 제보를 하게 된다. 그레이스를 잡으러 온 갱단, 그 갱단의 두목은 알고 보니 그레이스의 아버지였다. 그레이스를 도덕적 우월감에 찬 오만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아버지, 그레이스는 아버지와의 대화 끝에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쓰겠노라 말한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첫 걸음은 바로 도그빌을 없애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몰살당하고 모세라는 개만이 살아남는다.

 

그레이스는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도그빌이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권력을 이용하여 모두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 생각은 옳은 생각일까? 우리 모두 더 나은 것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노력을 하고 발전도 한다. 더 나은 세계라는 목적은 선하나 그 수단과 방법에 문제가 있다. 왜 그녀는 교화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만큼 더 나은 수단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권력을 가진 자가 자신이 꿈꾸는 더 좋은 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 그에 걸맞지 않는 자들을 죽인 일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나치를 떠올려보자. 우월한 게르만족과 열등하다 못해 쓰레기 취급을 당했던 유대인이 있었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유대인은 모두 없어져야 해!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더 좋은 국가를 위해 도덕적이든 부도덕적이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좋은 수단만으로 충분하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거짓말, 배신, 폭력 같은 비도덕적 수단이 훨씬 더 유용하다고 말한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현실 속에서 모두 동의하는 더 좋은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지부터 문제이다. 다양한 사람들만큼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고, 이상적인 국가관에도 차이가 있다. 모두가 자신의 이상을 위해 부도덕을 일삼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더 좋은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엄청나게 많은 부도덕이 이루어질 것이다. 부도덕이 일상이 되어버린 국가가더 좋은 국가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 큰 도덕을 위한 부도덕, 이는 너무 위험한 생각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만 한다면 어떤 방법이든 이용해도 되는가? 좋은 결과가 과정 상의 모든 부도덕을 상쇄시켜주는가? 총합이 도덕에 가깝기만 하다면 그 과정에서 어떤 부도덕이 일어나도 상관없는가? 그렇다면 치명적인 부도덕이 아닌 부도덕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가? 치명적인지 치명적이지 않은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2011/03/06 23:16 2011/03/06 23:16
  1. 박주연
    2011/03/21 21:28
    오늘 다른 영화 짧은 평을 쓰다가 생각난 건데, 저는 설령 그게 더 큰 완벽을 위해서라고 해도 현재의 작은 완벽이 깨지는 것을 아주 꺼려했던 것 같아요. 루빅스 큐브를 맞출 때 한 면을 맞추고 나면 나머지 다섯 면을 맞추기 위해 그 한 면을 잠시 흩어야 하는데, 그걸 참 아까워하고, 또 힘들어하기도 했어요.

    물론 더 큰 도덕을 위한 부도덕은 현재의 도덕이 과연 부도덕을 행해도 된다고 여길 만큼 작은 도덕인가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점에서 위의 예와 조금 다른 성격의 문제인 것 같긴 하지만, 어느 정도 닮은 점도 있는 것 같아서 이렇게 메모를 남깁니다.
  2. 흑퀸
    2011/04/28 11:36
    부도덕을 제거한다고 다 부도덕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흉악범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정말 아주 나쁜 놈이라서 이 사람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정확히 6,344,320,939명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중에 한 명이 총을 들고가 그 사람을 죽입니다. 이 사람은 아마 인류의 영웅이 될 겁니다. 하지만 아마 주연님이 말씀하시는 부도덕한 상황일겁니다.

    그러나 이건 어떨까요. 경찰이 그 흉악범을 잡습니다. 사법기관에 넘겨 절차를 거쳐 사형을 집행합니다. 흉악범은 어쨌든 죽고, 그 흉악범을 잡아 죽게한 그 경찰도 영웅이 됩니다. 앞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여기 그런식의 부도덕은 없어보입니다. 차이는 사적이냐 공적이냐 일뿐입니다.

    물론 이렇게 보실 수도 있습니다. 정부나 갱단이나 같다고요. 갱단 두목 마음에 따라 마을 하나가 아작이 나듯, 대통령 마음에 따라 나라 하나가 아작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보호세 받나 세금 뜯어가나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세금이 어떻게 쓰이느냐, 어떤 법을 갖고 실천하느냐 등등에 따라 정부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겠지만, 최악을 가정할 때 괜찮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이 선하다거나 공적인 것은 선하다 라고 볼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부도덕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도덕을 이야기해야 하고, 또한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이 이야기가 더욱 의미있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다음에 더 써주시리라 기대하고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이걸 오늘에야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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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거 짜깁기해서 글 올려도 편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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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실험실

모든 생각은, 그것이 긍정적 생각이든 회의적 생각이든, 내부에 관한 생각이든 외부에 관한 생각이든, 객관적 진리 개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개념은 오직 타자와 의사소통 중에 있는 피조물들만 접근할 수 있다. 앎의 획득은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에 기초해 있지 않다. 앎의 획득은 전체론적으로 생기며, 그것은 처음부터 상호인간적이다. 데이빗슨의 <외부주의 인식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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